1942년 5월 31일, 일요일. 독일 쾰른 상공에 연합군 폭격기 1,080대가 나타났다. 이들은 쾰른 상공에서 2000톤의 폭탄을 투하한 다음 유유히 사라졌다. 이 폭격으로 인구 60만의 도시인구 가운데 1/10이 사라졌다. 이 포격은 이후 함부르크와 드레스텐으로 이어지는 무차별 폭격의 효시가 되었다. 하지만 쾰른에서의 단일폭격에 의한 사망자 숫자는 히로시마가 기록을 깰 때까지 그대로 남아있게 된다.
철저하게 파괴된 쾰른을 배경으로 진행되는 하인리히 뵐의 '그리고 아무말도 하지 않았다'는 전쟁 직후의 허무와 히미한 희망이 히미하게 교차한다. 교회의 성체대회와 약사협회의 회합을 배경으로 삼아 두 주인공 케테와 프레드의 이야기가 교대로 전개된다. 모두 13장으로 구성된 이 소설은 수많은 상징성이 곳곳에 존재하고 있다. 이 소설에서 재미있는 사실은 종교적인 케테가 낡은 집의 회벽과 가난과 미래에 대한 절망으로 싸울 때 흘러나오는 노래는 '그리고 아무말도 하지않았다'라는 성가이다. 그리스도가 해골산에서 십자가에 못박혀 죽기 직전의 모습을 묘사한 노래는 아마도 마할리아 잭슨의 목소리로 짐작된다. 그 노래는 케테라는 한 여성이 의지하고자 하는 당시의 교회를 사람들이 어떻게 보고 있는가를 잘 드러내고 있다고 본다. 실제로 흉측한 모습으로 폐허 속에 우뚝 서 있는 쾨른 대성당의 모습은 세기말적인 기괴감을 주었을지도 모른다.
반면 교회속에 웅크리고 있는 프레드의 앞에는 언제나 약사협회의 화려한 광고 문구가 나타난다. '약사를 신뢰하자'라는 구호는 교회의 신앙에 회의를 가지고 있는-아니 좀더 솔직히 말하면 -신앙을 잃어버린 프레드가 갈구하는 또 다른 구호이다. 신에게 절망한 귀환 병사에게 약사협회의 '약사를 신뢰하자'라는 것은 인간에 대한 믿음을 갈구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프레드는 케테라는 자신의 가장 믿음직한 반려자를 신뢰하지 못한다. 오히려 그에게 위안을 주는 것은 교회에서 만난 식당 아가씨이다. 그 아가씨의 모습-어쩌면 마리아의 새로운 구현인지도 모른다-을 통해 그는 인간에 대한 신뢰감을 조금이나마 느껴보려 한다. 케테 역시 그 음식적 소녀의 모습에서 조금이나마 위안을 얻는것은 두 사람의 마음 속에 자리잡은 공포는 본질적으로 동일한 것임을 뜻하는 것이리라.
교회는 성체대회를 거행하면서 잃어버린 신심과 믿음을 회복시키려 한다. 하지만 그 행렬의 모습은 위선적인 모습으로 그려진다. 확고한 신념보다는 화려한 외양을 통해 힘겹게 종교는 유지되고 있는 것이다. 반면 약사협회의 광고는 도전적이다 못해 공격적이기 까지 하다. 밤 하늘을 장식하는 화려한 네온싸인의 광고와 에드벌룬에서 투하되는 무수한 광고용상품들은 궁핍과 가난 속에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하나의 오아시스아 같은 느낌을 준다.
구원을 갈구하는 종교는 '한마디 말'도 없이 침묵하고 있지만 물질의 세계는 전방위적인 물량공세로 사람들의 마음을 사로잡는다. 케테와 프레드는 허름한 여관에서 만난다. 그 여관은 도심에 있는 좋은 여관이 아니다. 오랫만에 만난 두 부부의 회포를 풀어줄 만한 장소가 아니라, 하룻밤의 쾌락을 위해 존재하는 그런 여관이다. 그곳에서 두 사람은 '죽음이 갈라놓을 때까지' 약속한 결혼이 허락한 의미를 되새겨보려 한다. 하지만 케테는 그 서약의 저 편에 '그리고 아무말도 하지 않았다'라는 공허함이 자리잡고 있다. 프레드 역시 전쟁에서 입은 마음의 상처를 치유하기 위해 침묵하는 교회의 저편에 '약사를 신뢰하자'라는 네온이 번쩍거리고 있음을 알게된다.
두 사람은 아침에 일어나 그 금발의 소녀가 일하고 있는 가게로 가서 음식을 먹는다. 그러나 케테는 불현듯 좁은 집에 두고 온 아이들이 생각난다. 그래서 그녀는 음식을 먹지 않고 다시 '한마디 말도 없는' 현실속으로 돌아온다. 반면 프레드는 그 곳에 머물며 '약사를 신뢰하자'라는 구호의 비현실 속에 침잠한다.
금요일 오후부터 일요일 오후까지 전개되는 이 이야기는 예수의 수난과 죽음 그리고 부활의 일정과 유사하다. 하지만 정말로 궁금한 것은 케테와 프레드가 수난과 죽음의 깊고 깊은 터널을 벗어나 부활을 경험했을까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