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르스트 푸어만 교수는 즁세 유럽 역사가로 특이하게도 假-이시도루스 법령집 전문가이다. 假-이시도루스 법령집 이란 무엇인가? 이 법령집은 7백여쪽에 걸친 책으로 교황의 교령, 시노드의 결의사항, 프랑크왕국의 제국법, 그리고 중세 이후 가장 큰 논란을 야기한 <콘스탄티누스 증여>를 수록하고 있는 법령집이다. 여기에는 초기 로마 주교의 문서가 115개가 들어있는데 이 문서들은 거의다 프랑크 왕국에서 날조된 것으로 판명되었다. 그리고 125개의 문서는 정본의 문서를 후대에 혹은 나중에 변조하거나 위조한 내용을 끼워넣은 것이다. 역사가들은 이 위조 법령집이 전문적인 성직자 위조꾼들에 의해 프랑크 왕국 중심지역인 라임즈에서 위조된 것으로 보고 있다.

이 문서가 나오게 된 이유는 이제까지 행사되었던 교회에 대한 왕의 간섭을 제거하고 교회의 독자성-혹은 교황의 절대적 권위-을 확보하기 위한 것이었다. 이 가짜 법령집은 이후 교회와 교황권의 세력강화와 확장을 위해 이용되었다. 그럼에도 호르스트 푸어만 교수는 자신의 저서인 <중세의 초대>에서 이 책의 위조와 관련된 두 가지 물음을 우리에게 하고 있다.

첫번째는 "중세 때엔느 윤리가 결여되어 있었던가?" 푸어만 교수는 단호히 그렇지 않다고 대답한다. 그의 대답에 따르면 당시 어떤 법령을 유효하고 정당하게 만드는 것은 입법이란 외적행위가 아니라 오직 그 안에 담겨있는 正義라고 보기 때문이다. 그러기에 푸어만 교수는 법령집을 위조한 위조자들이 하늘나라를 위해 봉사했고, 자신들이 주관적으로 생각한 구원질서에 봉사했다고 본 것이다. 푸어만의 이런 변명은 하늘나라에 봉사한다면 도덕적으로 아무 꺼리낌없이 이런 위조문서를 만들어도 되는가하는 의문을 갖게한다. 그리고 교회의 이름으로, 혹은 교회를 위해 하는 거짓말은 진리가 되는가? 아니면 공익적이고 하느님 뜻에 맞갖은 일을 위한 모든 위조는 수단을 정당화하는 목적이라는 의미에서 윤리적으로 정당화되는가?하는 질문을 하게 된다.

이렇게 인정받은 위조문서들이 야기한 치명적인 결과는 과연 무엇일까? 호르스트 푸어만은 중세의 초대에서 이에 대해 자세히 언급하지는 않는다. 물론 그의 학문적 영역 밖이기에 문제가 되는 것은 아니지만....  假-이시도루스 법령집이 교회에 끼친 몹쓸 영향은 무엇일까? 교회사가 셉펠트는 교회의 법과 제도에 있어서 진화적 사고의 부정교회의 자기이해에 결정적 영향을 끼쳤다는 것이다. 실제로 1983년에 개정된 가톨릭의 교회법전에서 교황의 권한에 관한 중요한 법규의 전거로 옛 법전에서 6개의 전거를 제시했는데 3개는 假-이시도루스 법령집에서 나머지 3개는 그 법령집에서 파생된 것에서 근거한 것이라는 점이다.

호르스트 푸어만의 <중세의 초대>를 읽으면서 중세가 암흑이 아니었다는 점에 중심을 두며 읽다보니  세상은 속아넘어가고 싶어한다. 그래서 속어넘어간다라는 냉소적인 진리를 보지 못한 것은 책을 읽는 우리들의 자세를 다시 한번 가다듬게 하는 것이 아닐런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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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운 여름날 부여를 여행했다. 일박이일의 짧은 여행이었지만 아주 만족스러웠다. 우선 부여의 크기가 가벼운 여행길로는 제격이었다. 버스 터미널을 중심으로 백마강, 정림사, 박물관이 모두 걸어서 15분 정도의 거리였다. 터미널 근처에 숙소를 정하면 하루종일 걸으며 유적과 유물을 들여다 볼 수 있는 도시가 바로 부여였다. 하지만 크기와 깊이는 다른 법.

정림사지터에 있는 정림사 박물관은 여러가지로 알찬 장소였다. 정림사 5층석탑을 주제로한 하나의 박물관은 공주의 무령왕릉 박물관을 연상시키지만 맛은 약간 달랐다. 무령왕릉이 있었던 과거의 영화로운 모습을 반추하는 곳이라면 정림사 박물관은 없어진 한 제국의 몰락을 슬프게 바라봐야만 하는 차이가 아닐까? 사실 백제의 유물은 워낙 철저하게 파괴되어 남아있는 것이 거의 없다. 기록에도 나타나듯 점령군 나당군의 방화로 백제의 수도 부여는 3일 밤낮을 불타올랐고 백마강은 그 불빛에 밤에도 번들거렸다고 한다. 이런 연유로 백제의 수도였던 부여에는 백제를 대표할 만한 유적이 거의 없다. 남아있는 정림사 5층석탑은 그 장대함을 뽐낼 금당이 남아있지 못하다. 그리고 그 장대한 탐의 몸체에는 소정방의 낙서가 휘갈겨져 있다. 그럼에도 정림사 박물관은 그 탑과 이름을 알 수 없는 절을 가지고 다양한 모습으로 백제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부여박물관은 김수근 선생이 설계한 부소산성 내에 위치한 예전의 건물을 뒤로 하고 정림사 박물관에서 5분 거리에 위치한 곳으로 이전하였다. 김수근 선생의 설계가 워낙 시비의 대상이 되었던지라-시비의 촛점은 왜색倭色이었다-아주 옮겨버리고 말았다. 예전의 건물이 일본의 신사神社와 유사성을 띠고 있지만 지금의 박물관의 모습은 아무런 시비거리도 제공할 수 없을 만큼 평범하게 만들어져 있다. 부여 박물관의 핵심은 최근에 발견된 금동향로라고 할 수 있다. 유불선의 세계가 혼합된 그 다양하고 섬세하며 화려한 모양은 백제박물관의 새로운 얼굴이라 할 수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백제에 관심이 있는 사람이라면 창왕 사림함이나 사택지적비와 같은 스쳐 지나갈 수 있는 유물 앞에서 잠시 발걸음을 멈추는 것도 좋을 듯 하다.

그리고 백마강으로 나가 나룻배-지금은 유람선이지만-를 타고 백마강을 돌아보는 것도 좋을듯하다. 옛 분들의 말에 따르면 오래 전에 백마강 나룻배 위에 화롯불을 실고서 그 불로 강에 잡아올린 피래미와 같은 물고기로 튀김을 해서 먹기도 했다고 하지만... 지금은 그런 낭만적인 풍경은 없다. 백마강을 거슬러 올라가다보면 오른편으로 낙화암이 보인다. 낙화암은 우리의 상상 속에는 백척절벽으로 언제나 기억되지만 현실의 높이는 그리 높지 않다. 이런 상상과 현실의 차이가 바로 우리가 생각하는 백제의 모습이 아닐런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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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세 프랑스사를 읽다보면 항상은 아니더라도 귀에 익은 두 사람의 이름이 자주 등장한다. 이 두 사람은 거의 같은 시기를 살았으면서도 서로 다른 세계 속에서 존재한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한 사람은 장 프루아사르Jean Froissart(1337~?1400), 다른 한 사람은 프랑수아 비용Francois Villon (1431-1463)이다. 이 두 사람은 삶의 궤적을 보면 이 말이 더 한층 실감난다. 프루아사르가 백년전쟁이 시작되는 1337년에 태어난 반면 비용은 백년전쟁이 끝난 뒤(1453년)에도 십 여 년을 더 살았다. 프루아사르는 116년 동안 지속된 백년전쟁 가운데 그는 63년을 보낸 사람이었다. 그러므로 그의 관심은 온통 전쟁과 그에 관련된 것이었다. 그의 대표작인 <연대기Chronicles>는 백년전쟁의 과정에서 발생한 전쟁의 숭고함과 잔인함 그리고 야비함과 거룩함을 동시에 기록하고 있다. 아쉽게도 그의 연대기는 국내에서 아직 번역되지 않았지만 영어 번역본은 인터넷 상에서 쉽게 구해 읽어볼 수 있다. 프루아사르에게 있어서 전쟁은 특별한 것이 아니라 하나의 삶 속에 존재하는 그 무엇이었다.

프루아사르의 연대기를 이해하려면 ‘칼레의 이야기’를 살펴봐야 한다. 이 역사적 기록은 잉글랜드의 에드워드3세에게 포위된 칼레가 주민학살이라는 최악의 상황을 벗어나기 위해 시의 대표 6명이 삭발을 하고 밧줄을 목에 건채 에드워드 3세 앞으로 나와 항복의 치욕을 겪으며 칼레를 구원한 이야기이다. 마치 성서 속의 ‘한 사람이 죽어 전체를 살릴 수만 있다면...’이라는 대목이 생각나는 이야기이다. 프루아사르는 이 이야기의 정점에 프랑스라는 국가를 올려놓지는 않았다. 당시 프랑스는 단일한 민족국가도 위대한 프랑스도 아닌 카페왕가의 왕국이었을 뿐이었다. 그럼에도 이 이야기는 잔 다르크의 이야기와 함께 잉글랜드에 대항하는 카페 왕가의 프랑스를 그리고 잡다한 지역의 사람들을 하나로 묶는 역할을 하였다. 물론 이런 과정의 신화화는 조르쥐 뒤비의 <부빈의 일요일>에서도 취급하고 있지만 당시의 프루아사르는 이런 신화화를 상정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다만 그 당시의 기사도 정신과 그 맥락에 따른 하나의 삽화였을지도 모른다. 이는 프루아사르가 전쟁의 한 가운데서 생의 대부분을 보냈지만 그는 여전히 중세의 기사도적 사회질서를 신봉하고 믿고 있었음이 틀림없다.

반면 비용은 전쟁의 살벌함이 가시지 않은 1431년에 태어났다. 전쟁의 막바지에 다다랐지만 프랑스의 카페왕가는 여전히 잉글랜드의 플란타지넷트가에 고전하고 있었고, 페스트의 창궐, 농촌지역의 황폐는 전쟁이 결코 낭만이 아님을 보여주고 있었다. 이런 전쟁의 소모적인 낭비성 잔혹은 어린 비용의 뇌리에 공포의 이미지를 커다랗게 각인시켰다. 그에게 있어서 전쟁은 기사도적인 유희가 아니라 삶 그 자체의 존재를 가늠하는 생존게임으로 비춰졌다. 비용이 공부하던 파리의 분위기 역시 다르지 않았다. 그는 자신이 이 혼란한 세상을 살아가기 위해서는 그럴듯한 포장이 있어야 함을 자각했고, 그 결과 그는 파리 대학에서 문학사 자격을 획득하고 당시 가장 안정적인 직업이었던 성직에 몸담아 일생을 보내려 하였다. 그러나 세속의 찌든 때를 결코 벗어날 수 없었던 비용은 악동의 길로 접어들게 된다.

그의 분방함과 모험과 방랑기질, 범죄적인 성향과 회한과 속죄, 연민과 공포와 종교적인 갈등, 그리고 삶에 대한 환상은 그를 중세에 살고 있지만 근대의 탐미주의적 인물을 보는 것처럼 착각하게 한다. 즉 비용은 중세 속에서 근대성을 이끌어낸 인물이 되었던 것이다.

이처럼 중세의 시대를 연이어 살다간 프루아사르와 비용은 평가의 호오好惡에도 불구하고 근대 이후 재발견 되었다는 점에서 공통적인 특징을 지니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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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08-02 20:03   URL
비밀 댓글입니다.

dohyosae 2007-08-03 15:1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반갑습니다. 피에르 아벨라르Pierre Abelard는 1079년에 태어나 1142년에 죽었으니 이들보나 한참 전의 인물이었습니다. 아마도 이들이 활동하던 시절에는 아벨라르의 이름마저도 잊혀졌는지 모르죠... 비용의 시 귀절처럼 '그대 지금 어디에 있느뇨...'이지만 아벨라르는 정말 대단한 인물이었습니다. 그와 같은 시대에 클레르보의 베르나르드가 있었다는 것이 비극인지도 모릅니다.
 

르네 지라르의 '희생양'이란 책을 읽고 한 대목을 깊이 생각해 보았다. '욕망은 타인이 욕망하는 것을 욕망하면서 그모델을 경쟁자와 장애물로 여긴다는 것을 정확히 알고 있다'. 이 말을 현학적인 세계에서 삶의 세계로 이동시키면 결국은 '욕하면서 배운다'라는 구절과 정확히 들어맞는다. 이 현실감있으면서 약간은 주저하게 만드는 경구는 아직도 우리들의 주변에서 유효하게 작동하고 있다. 이것은 장애물로 이야기되는 그 어떤 것을 극복하지 못하고 있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즉 우리들은 언제나 겉으로 드러난 말과 속마음 사이의 간극에 고민한다. 누구든지 첫번째 경험에서 그 어떤 장애물에 걸려 비틀거리거나 넘어지게 되면 그것은 하나의 "스켄달"로 변해 버린다. 그리고 그 어떤 장애물에 또 다시 걸려 넘어지게 된다. 그러면서 그 장애물은 걸려 넘어지는 횟수가 증가할 수록 없애야만 하는 것, 혹은 제거해야만 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을 꾸며주는 매혹적인 것으로 미화시키게 된다. 그러므로서 "스켄들"은 자신의 파괴를 미화시키거나 정당화시키는 올가미가 된다. 이것은 성서적으로 표현한다면 '목에 멧돌을 매달고 깊은 물 속에 빠지는 것'이 된다. 이 성서적인 어구는 불의에 대한 모방은 결국 그 자신이 스스로의 지옥을 파는 것과 같은 것이다.

나쁜 욕망, 혹은 나쁜 방법은 결국에는 파멸한다. 그러나 문제는 여기에 있는 것이 아니다. 그것을 시키는 사람이 아니라 전면에 나서서 행동하는 사람이 문제인 것이다. 르네 지라르는 헤로데와 살로메의 관계를 통해 이 과정을 아주 상세히 전달하고 있지만 이런 과정은 우리 주위에서도 쉽게 볼 수 있다. 시에라리온의 내전을 생각해 보자. 반군들은 자신들의 방패막이로 어린 아이들을 납치하여 자신들의 대역으로 훈련시킨다. 그들은 아이들에게 온갖 악행을 주문하고 아이들은 그것을 그대로 시행한다. 아이들은 그 행위의 직접적인 행위자가 아니다. 그들은 스스로 가담하는 주체가 아니면서 성인들의 욕망에 의해 그 행위를 스켄들로 받아들인다. 스켄들이란 그리스어 스카제인에서 온 말이다. 이 말은 다리를 절다라는 의미이다. 이 단어는 불구라는 의미가 아니다. 말 그대로 어떤 것에 걸려 비틀거리는 것, 혹은 넘어지는 약간의 균형을 잃은 상태일 뿐이다. 그러기에 스켄들은 '욕망이 붙잡으려 하지만 잡을 수 없는 어떤 것이며, 욕망이 소유하려 하는 없어서는 안 될 꼭 필요한 것이다'. 그러기에 스켄들은 더 가벼울수록 더 다루기 쉽고 갖고 다니기 쉽다. 그러기에 희생양은 이런 전제에 부합되어야만 한다.

그렇다면 처음으로 다시 돌아가 '욕망은 타인이 욕망하는 것을 욕망하면서 그모델을 경쟁자와 장애물로 여긴다는 것을 정확히 알고 있다'라는 말을 다시 한번 더 생각해 보자. 이 말은 결국 '희생은 타인이 희생하는 것을 희생하면서 그 모델을 경쟁자와 장애물로 여긴다는 것을 정확히 알고있다'는 것과 평행적인 관계를 이루고 있는 것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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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2년 5월 31일, 일요일. 독일 쾰른 상공에 연합군 폭격기 1,080대가 나타났다. 이들은 쾰른 상공에서 2000톤의 폭탄을 투하한 다음 유유히 사라졌다. 이 폭격으로 인구 60만의 도시인구 가운데 1/10이 사라졌다. 이 포격은 이후 함부르크와 드레스텐으로 이어지는 무차별 폭격의 효시가 되었다. 하지만 쾰른에서의 단일폭격에 의한 사망자 숫자는 히로시마가 기록을 깰 때까지 그대로 남아있게 된다.

철저하게 파괴된 쾰른을 배경으로 진행되는 하인리히 뵐의 '그리고 아무말도 하지 않았다'는 전쟁 직후의 허무와 히미한 희망이 히미하게 교차한다. 교회의 성체대회와 약사협회의 회합을 배경으로 삼아 두 주인공 케테와 프레드의 이야기가 교대로 전개된다. 모두 13장으로 구성된 이 소설은 수많은 상징성이 곳곳에 존재하고 있다. 이 소설에서 재미있는 사실은 종교적인 케테가 낡은 집의 회벽과 가난과 미래에 대한 절망으로 싸울 때 흘러나오는 노래는 '그리고 아무말도 하지않았다'라는 성가이다. 그리스도가 해골산에서 십자가에 못박혀 죽기 직전의 모습을 묘사한 노래는 아마도 마할리아 잭슨의 목소리로 짐작된다. 그 노래는 케테라는 한 여성이 의지하고자 하는 당시의 교회를 사람들이 어떻게 보고 있는가를 잘 드러내고 있다고 본다. 실제로 흉측한 모습으로 폐허 속에 우뚝 서 있는 쾨른 대성당의 모습은 세기말적인 기괴감을 주었을지도 모른다.

반면 교회속에 웅크리고 있는 프레드의 앞에는 언제나 약사협회의 화려한 광고 문구가 나타난다. '약사를 신뢰하자'라는 구호는 교회의 신앙에 회의를 가지고 있는-아니 좀더 솔직히 말하면 -신앙을 잃어버린 프레드가 갈구하는 또 다른 구호이다. 신에게 절망한 귀환 병사에게 약사협회의 '약사를 신뢰하자'라는 것은 인간에 대한 믿음을 갈구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프레드는 케테라는 자신의 가장 믿음직한 반려자를 신뢰하지 못한다. 오히려 그에게 위안을 주는 것은 교회에서 만난 식당 아가씨이다. 그 아가씨의 모습-어쩌면 마리아의 새로운 구현인지도 모른다-을 통해 그는 인간에 대한 신뢰감을 조금이나마 느껴보려 한다. 케테 역시 그 음식적 소녀의 모습에서 조금이나마 위안을 얻는것은 두 사람의 마음 속에 자리잡은 공포는 본질적으로 동일한 것임을 뜻하는 것이리라.

교회는 성체대회를 거행하면서 잃어버린 신심과 믿음을 회복시키려 한다. 하지만 그 행렬의 모습은 위선적인 모습으로 그려진다. 확고한 신념보다는 화려한 외양을 통해 힘겹게 종교는 유지되고 있는 것이다. 반면 약사협회의 광고는 도전적이다 못해 공격적이기 까지 하다. 밤 하늘을 장식하는 화려한 네온싸인의 광고와 에드벌룬에서 투하되는 무수한 광고용상품들은 궁핍과 가난 속에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하나의 오아시스아 같은 느낌을 준다.

구원을 갈구하는 종교는 '한마디 말'도 없이 침묵하고 있지만 물질의 세계는 전방위적인 물량공세로 사람들의 마음을 사로잡는다. 케테와 프레드는 허름한 여관에서 만난다. 그 여관은 도심에 있는 좋은 여관이 아니다. 오랫만에 만난 두 부부의 회포를 풀어줄 만한 장소가 아니라, 하룻밤의 쾌락을 위해 존재하는 그런 여관이다. 그곳에서 두 사람은 '죽음이 갈라놓을 때까지' 약속한 결혼이 허락한 의미를 되새겨보려 한다. 하지만 케테는 그 서약의 저 편에 '그리고 아무말도 하지 않았다'라는 공허함이 자리잡고 있다. 프레드 역시 전쟁에서 입은 마음의 상처를 치유하기 위해 침묵하는 교회의 저편에 '약사를 신뢰하자'라는 네온이 번쩍거리고 있음을 알게된다.

두 사람은 아침에 일어나 그 금발의 소녀가 일하고 있는 가게로 가서 음식을 먹는다. 그러나 케테는 불현듯 좁은 집에 두고 온 아이들이 생각난다. 그래서 그녀는 음식을 먹지 않고 다시 '한마디 말도 없는' 현실속으로 돌아온다. 반면 프레드는 그 곳에 머물며 '약사를 신뢰하자'라는 구호의 비현실 속에 침잠한다.

금요일 오후부터 일요일 오후까지 전개되는 이 이야기는 예수의 수난과 죽음 그리고 부활의 일정과 유사하다. 하지만 정말로 궁금한 것은 케테와 프레드가 수난과 죽음의 깊고 깊은 터널을 벗어나 부활을 경험했을까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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