르네 지라르의 '희생양'이란 책을 읽고 한 대목을 깊이 생각해 보았다. '욕망은 타인이 욕망하는 것을 욕망하면서 그모델을 경쟁자와 장애물로 여긴다는 것을 정확히 알고 있다'. 이 말을 현학적인 세계에서 삶의 세계로 이동시키면 결국은 '욕하면서 배운다'라는 구절과 정확히 들어맞는다. 이 현실감있으면서 약간은 주저하게 만드는 경구는 아직도 우리들의 주변에서 유효하게 작동하고 있다. 이것은 장애물로 이야기되는 그 어떤 것을 극복하지 못하고 있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즉 우리들은 언제나 겉으로 드러난 말과 속마음 사이의 간극에 고민한다. 누구든지 첫번째 경험에서 그 어떤 장애물에 걸려 비틀거리거나 넘어지게 되면 그것은 하나의 "스켄달"로 변해 버린다. 그리고 그 어떤 장애물에 또 다시 걸려 넘어지게 된다. 그러면서 그 장애물은 걸려 넘어지는 횟수가 증가할 수록 없애야만 하는 것, 혹은 제거해야만 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을 꾸며주는 매혹적인 것으로 미화시키게 된다. 그러므로서 "스켄들"은 자신의 파괴를 미화시키거나 정당화시키는 올가미가 된다. 이것은 성서적으로 표현한다면 '목에 멧돌을 매달고 깊은 물 속에 빠지는 것'이 된다. 이 성서적인 어구는 불의에 대한 모방은 결국 그 자신이 스스로의 지옥을 파는 것과 같은 것이다.

나쁜 욕망, 혹은 나쁜 방법은 결국에는 파멸한다. 그러나 문제는 여기에 있는 것이 아니다. 그것을 시키는 사람이 아니라 전면에 나서서 행동하는 사람이 문제인 것이다. 르네 지라르는 헤로데와 살로메의 관계를 통해 이 과정을 아주 상세히 전달하고 있지만 이런 과정은 우리 주위에서도 쉽게 볼 수 있다. 시에라리온의 내전을 생각해 보자. 반군들은 자신들의 방패막이로 어린 아이들을 납치하여 자신들의 대역으로 훈련시킨다. 그들은 아이들에게 온갖 악행을 주문하고 아이들은 그것을 그대로 시행한다. 아이들은 그 행위의 직접적인 행위자가 아니다. 그들은 스스로 가담하는 주체가 아니면서 성인들의 욕망에 의해 그 행위를 스켄들로 받아들인다. 스켄들이란 그리스어 스카제인에서 온 말이다. 이 말은 다리를 절다라는 의미이다. 이 단어는 불구라는 의미가 아니다. 말 그대로 어떤 것에 걸려 비틀거리는 것, 혹은 넘어지는 약간의 균형을 잃은 상태일 뿐이다. 그러기에 스켄들은 '욕망이 붙잡으려 하지만 잡을 수 없는 어떤 것이며, 욕망이 소유하려 하는 없어서는 안 될 꼭 필요한 것이다'. 그러기에 스켄들은 더 가벼울수록 더 다루기 쉽고 갖고 다니기 쉽다. 그러기에 희생양은 이런 전제에 부합되어야만 한다.

그렇다면 처음으로 다시 돌아가 '욕망은 타인이 욕망하는 것을 욕망하면서 그모델을 경쟁자와 장애물로 여긴다는 것을 정확히 알고 있다'라는 말을 다시 한번 더 생각해 보자. 이 말은 결국 '희생은 타인이 희생하는 것을 희생하면서 그 모델을 경쟁자와 장애물로 여긴다는 것을 정확히 알고있다'는 것과 평행적인 관계를 이루고 있는 것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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