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몰랐던 왜군의 백제파병 이야기 - 白村江戰鬪
도야마 미쓰오 지음, 이성범 옮김 / 제이앤씨 / 2002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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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과 일본의 고대사를 살펴볼 때는 아주 신중해야만 한다. 한쪽에 대한 일방적인 시각에서 고대사를 보다 보면 두 나라 사이의 심도있고 미묘한 사실을 놓칠 수 있기 때문이다. 한 예로 언어로 본 일본 고대사에 일가견이 있는 이영희 교수의 저작을 읽어보면 온통 일본어는 고대 한국어의 영향 속에서 발전한 것처럼 보인다. 이러한 관점 속에는 일본이 대륙뿐만 아니라 남방 해양세력을 통해서도 문화를 전수받았다는 사실을 망각하게 된다. 이것은 마치 잉글랜드의 영어가 오직 프랑스어의 영향만을 받았다고 주장하는 것과 다를 바 없다. 잉글랜드의 영어는 켈트어, 라틴어, 불어, 게일어, 웨일즈어 등  많은 언어의 영향을 받았다. 다만 프랑스어가 그 가운데 가장 큰 부분을 차지하고 있다는 점은 분명하다. 마찬가지로 일본의 언어 역시 고대 한국어의 일방적인 영향보다는 일정한 부분에서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고대 역사도 이런 입장에서 접근해야 할 것이다. 일방적이라는 타협할 수 없는 단어보다는 상호적이며 보편적인 관계 속에서 냉철하게 한일 고대사를 살펴봐야만 한다. 백제의 분국이 일본이라는 학설은 임나일본부설과 다른 점이 무엇인가? 일본의 국수적인 입장을 한국의 국수적인 입장으로 치환했을 뿐이다. 이런 강경론적인 역사관을 대다수의 한일 국민들은 수긍할 수 있을까? 역사란 감정의 학문이 아니다. 아주 피곤하고 느린 학문이라 할 수 있다. 땅을 한자 파서 헤치고 털고 쓸어내면 겨우 한 세대의 히미한 흔적을 살펴볼 수 있을 뿐이다. 몇 백년 몇 천년의 깊이를 알고자 한다면 엄청난 인내가 필요할 것이다.

이 책은 이런 전제를 책 밑바닥에 깔고 시작한다. 그래서 한일고대사 가운데 가장 극적인 장면이 오히려 차분하게 느껴진다. 백촌강 전투 혹은 백강 전투는 신라, 백제, 당, 일본이 어울어져 치열하게 싸웠던 가장 큰 전쟁이었다. 이 전투로 6백여년을 지속해오던 한 왕조는 몰락하였고, 다른 왕조는 1천년을 지속할 원동력을 얻었으며, 다른 국가는 자신들만의 새로운 왕조를 수립할 수 있었다. 이렇게 엄청난 변화를 초래한 백촌강 전투를 한 일의 입장에서 어떻게 보고 있을까? 이 책은 일본의 입장을 볼 수 있는 귀중한 자료이면서 그들이 이 전쟁을 어떻게 역사 속에 투영시키고 있는가를 알 수 있다.

사실 일본 사학계는 일본서기나 고사기를 토대로 여기에 신당서 구당성와 같은 중국 사서를 접목시켜 고대사를 구성하는 것이 한계에 달하고 있음을 너무나도 잘 알고있다. 그럼에도 그 한계를 정직하게 실토할 수 없는 것은 고고학의 왜곡에서처럼 자국 중심적 사관의 기풍이 너무 강하기 때문이라 할 수 있다. 그래서 일본의 고대사 저서를 읽어보면 정신병 상담의의 심리분석기록과 유사한 느낌을 저버릴 수 없다. 어느 짧은 한 귀절을 통해 모든 상황을 유추하고 그 유추를 토대로 자신들이 원하고자 하는 방향으로 역사적 사실을 결론짓는다. 그리고 그것에 대한 검증으로 중국의 사서를 꼭 인용한다. 이러한 기술의 장점은 역사를 보는 관점을 넓게 확산시킨다는 점에서 어느 정도 고무적인 것이지만 자의적 심리적 해석으로 인한 앞뒤 모순의 관계가 명확하게 해소되지 않고, 이로 인한 역사의 왜곡이 문제가 될 수 있다는 점이다.

이 책은 이러한 일본 사학계의 약점과 장점이 고스란히 드러나 있다고 볼 수 있다. 사서의 아주 짧은 백촌강 전투에 대한 분석과 그로인한 일본의 탄생에 촛점을 맞춘 이 책은 일본의 역사학계가 동아시아의 고대사 관계 속에서 자신들의 위치를 어떻게 보고 있는지 잘 드러난다. 저자의 말대로 당시 왜는 중국을 너무 모방한 나머지 자신들을 중심으로 그 주변을 주국 세계관의 축소판으로 재단한 다음 그 바탕에서 역사를 기록하였던 것이다. 이것은 자국의 만족감을 성취시켰는지는 모르지만 그만큼 왜는 당시 동아시아 역학관계속에서 축소되어 있었다는 것을 스스로 실토하고 있는 것이나 마찬가지라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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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으로 본 음식의 문화사
케네스 벤디너 지음, 남경태 옮김 / 예담 / 2007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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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은 아주 특이하게 그림 속의 음식에 대해 논하고 있다. 음식이 그려진 시대와 그 배경에 대해 논하면서 음식이 어떻게 인간의 역사 안에서 감각적 본능을 넘어서 이성적 절제의 주제로 넘어왔는지도 설명하고 있다. 그러면서 저자는 중세와 르네상스시대로 음식그림을 한정시키지 않고 현대유럽으로까지  확대하여 보여준다. 그럼에도 중세 유럽의 모습을 소흘하게하지 않는다. 오히려  현대와 대비되는 중세의 모습이 더 심도있게 보여진다.

인간의 역사 초기에 음식은 단순이 삶을 유지하는 기능으로 인식되었다. 음식을 가지고 있다는 것은 최소한 죽을 염려는 없었다. 즉 먹는 것과 존재하는 것이 동일시 되었다. 하지만 지배와 피지배의 관계가 심화되면서 잉여물이 생겨나면서 먹는 것과 존재하는 것은 서서히 변질되기 시작하였다. 이제 먹는 것은 삶과 죽음의 편가름이 아니라, 인격의 한 모습을 드러내게 되었던 것이다. 무엇을 먹느냐가 아니라 어떻게 먹느냐가 잉여시대를 살아가는 인간들의 관심이 되었던 것이다. 염장한 고기를 먹느냐 사냥한 싱싱한 고기를 먹느냐에 따라 신분은 구분되었다. 식탁에 고기가 많으냐 곡물이 많으냐에 따라 천함과 귀함이 드러났다.

 있던 시대로부터 음식이 신분을 상징하는 것으로 그리고 음식과 소외, 음식과 풍자의 역사를 그림을 통해 보여준다. 저자는 이 실마리를 플랑드르 지역과 네덜란드 지역의 음식 정물화를 통해 분석한다. 사람들의 삶과는 거리가 있는듯이 보이는 청어나 치즈, 사과의 그림과 나이프의 배열을 통해 저자는 그림의 시점에서부터 이들이 갈구하는 욕망과 이들이 직면한 소외를 재미있게 지적한다. 저자에게 저지대 지역 화가들의 음식 정물화가 풍경화와 다른 모습으로 다가온 것만은 확실하다. 저자는 왜 저지대 화가들이 음식 정물화에 그렇게 집착했는가를 재미있게 해석한다. 대항해 시대로 열린 네덜란드의 전성시대는 그림에 대한 다양성을 열어 놓았다. 그리고 이 시대를 통해 아메리카 식민지로부터 들어온 다양한 식물들과 채소 그리고 열매들은 이국의 색다른 정서를 표현하는 도구이면서 자본주의 과시의 또 다른 모습이었다. 자본주의는 레스토랑이라는 규격화된 식당을 통해 규격화된 식사를 제공함으로서 어느 정도 사회에서 식사를 통한 신분과 경제적 차이를 제거하는데 일조하였다.

자본주의적 분위기가 음식문화를 지배하면서 그림 속에서 변해가는 것은 자리의 위치이다. 주인의 자리가 언제나 고정되어 있었고, 그 자리에서 혼자 식사하는 그림이 어느새 어울리고 자리의 구분이 모호한 형태로 변모해 간다. 그렇다면 정말로 음식 앞에서 인간은 평등해 진 것일까. 그것은 결코 아니다. 왜냐하면 인류의 역사 속에서 진정한 평등이 이루어졌던 적은 한번도 없었다. 그와 유사한 사건은 오직 갈보리에서 한번 있었을 뿐이다. 그리고 평등의 상징인 빵과 포도주가 남겨졌지만 그 음식을 통해 진정한 평등과 평화가 이루어졌다는 소식은 아직껏 듣지 못했다. 격식이 사라진 식탁에서 신분을 나타낼 수 있었던 것은 무엇일까? 엘리트주의라는 것이 그것이다. 일정한 식사의 자리에 초대를 받느냐 받지 못하느냐에 따라 보는 자의 입장에서 크게 달라지는 것이다.

음식 그림의 역사에서 가장 주목해야 할 부분은 네덜란드 정물화 속에 표현된 음식그림이라 할 수 있다. 네덜란드 인들은 스페인 사람들 처럼 규칙적이지도 규격적이지도 않았다. 아무렇게나 배열한 듯한 음식은 후대 세잔이나 마네와 같은 거장들의 그림 속에도 그대로 유지된다. 그리고 음식그림의 대상으로 정한 과일, 생선, 조개, 햄, 잔에 담긴 포도주, 빵, 파이, 닭고기, 올리브, 견과와 같은 것은 지금까지도 우리들의 음식정물에 심심치않게 등장한다. 그리고 네덜란드 정물화 속에 표현된 음식그림을 자세히 보면 식사 장면을 그린 것이 아주 드믈다는 점이다. 식탁에는 오직 음식만이 존재할 뿐이다. 인간들이 나온다 하더라도 당시 네덜란드에서 유행하던 인물그림의 부수적인 모습일 뿐이다. 네덜란드 정물에서 표현하는 음식만을 그린 그림은 식사가 이제 더 이상 공적인 질서 속에서 과시되는 하나의 이벤트가 아니라 무질서하고 풍요로운 사적인 공간으로 넘어갔다는 것을 암시하는 것이라 하겠다. 이것은 과거 그림에서 표현되었던 음식에 대한 죄악적인 모습이 서서히 제거되고 있음을 보여주는 것이라 하겠다. 이것은 현실의 유혹적인 냄새가 도덕적 이념을 뛰어 넘었다는 것을 암시하는 것이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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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렉산드리아 - 인류 최초의 세계도시 알렉산드리아, 그 탄생과 몰락
만프레드 클라우스 지음, 임미오 옮김 / 생각의나무 / 2004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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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도상에서 알렉산드리아라는 지명은 발칸반도에서 소아시아를 거쳐 이란과 인도에 이르는 지역에서 쉽게 찾아볼 수 있다. 알렉산더 대왕의 이름에서 유래된 이 도시는 발칸과 근동에서는 그리스식의 알렉산드리아로 이란과 인도 지역에서는 알렉산더의 현지발음인 이스칸더의 변형으로 존재한다. 이스칸데룬, 칸다하르 등등.

알렉산더 대왕은 자신이 정복한 지역에 자신의 이름을 딴 도시를 건설하였다. 그것은 우리들이 흔히 말하는 문명의 전파지가 아니라 정복을 위한 전진기지에 지나지 않았다. 그러한 보급기지 가운데 가장 화려하게 살아남은 도시가 바로 이집트의 알렉산드리아이다. 이 결과 이집트의 알렉산드리아는 전 세계의 알렉산드리아를 대표하게 되었고, 알렉산드리아 하면 이집트의 알렉산드리아를 떠올리게되었다.

이집트 공략의 보급기질 선택된 알렉산드리아는 프톨레마이오스 소테르에 의해 이집트가 자신의 영지로 확보되면서 급속하게 발전하기 시작한다. 사실 알렉산드리아의 근본적인 틀은 이때 정해진 것이나 마찬가지라 할 수 있다. 그 후의 알렉산드리아는 月下僧推門이냐 月下僧敲門이냐 하는 형식상의 발전만이 있었을 뿐이다. 아니 어쩌면 헬레니즘 시대 이후의 알렉산드리아는 최정점에서의 완만한 미끄러짐이라고 할 수 있다.

헬레니즘 시대의 그 화려함은 로마시대에 이르러 이집트가 로마의 빵공장으로 전락하면서 알렉산드리아 역시 학문과 예술, 문화의 중심지에서 경제의 중심지로 균형추가 이동하게 된다. 사실 알렉산드리아라는 도시는 후에 탄생한 도시 콘스탄티노플과는 또 다른 모습을 보인다. 콘스탄티노플이 종교의 도시이며 제왕의 도시로 끝까지 남았던 반면 알렉산드리아는 이교 종교의 중심지로 남아있게되어 결국 그리스도교가 서방의 종교가 되면서 서서히 쇠퇴하게 된다. 그리고 그 명맥은 이 지역이 이슬람화하면서 완전히 끊어지게 된다. 그리고 알렉산드리아는 서구에게는 잊혀진 도시로 남게된다.

알렉산드리아는 굉장히 다양한 성격을 지닌 도시였다. 박식함과 화려함그리고 세련됨을 고루 가지고 있던 이 도시의 가장 큰 장점은 포용과 관용이었다. 어쩌면 이 도시는 알렉산드로스 대왕의 동서양 융합정책을 가장 충실히 따랐던 도시였는지도 모른다. 이 도시에서는 인종이나 종교에 의해 시민들은 차별받지 않았다. 이러한 관용성과 다양성은 이 도시가 고대 세계 사상의 보금자리이자 양성소가 되게 하는데 다대한 공헌을 하였다. 그러나 역설적이게도 이 도시가 그리스도화되면서 이런 관용과 다양성이 사라져 버렸다는 점이다. 사랑을 선포하는 종교에 의해 획일적으로 변화되었다니...관용과 다양성이 사라진 도시에게 남은 것은 무엇이었을까? 교조적인 엄격함과 단일성만이 견고하게 존재할 뿐이다. 이렇게 알렉산드리아는 서서히 자신의 화려함을 상실해가면서 고대 세계의 여왕의 자리에서 서서히 내려오게 되었다. 이후 알렉산드리아는 로마와 그리스도교의 알렉산드리아 총대주교좌의 위치에 머물렀지만 그것은 과거의 화려함에 기댄 회칠한 영광이었을 뿐이었다. 그리고 이 도시가 마침내 이슬람에게 정복되었을 때 서구는 아무도 슬퍼하지 않았다. 오히려 로마에 완강하게 아니 고고하게 대립하던 한 총대주교좌의 몰락으로 치부해 버렸다.

고대의 수많은 도시 가운데 알렉산드리아 만큼 관용과 다양함을 지녔던 도시는 없었다. 그만큼 알렉산드리아는 국제적이었던 것이다. 알렉산드리아가 변모의 조짐을 보인 것은 로마시대부터라 할 수 있다. 로마는 철저하게 그리스의 이성을 경멸한 민족이었다. 그래서 알렉산드리아의 학문적인 모습을 경제적인 모습으로 탈바꿈시켰다. 이제 알렉산드리아는 학문을 전파하는 지식의 항구가 아니라 로마에 밀을 수출하는 항구로 전락하였다. 그리고 그리스도교의 알렉산드리아 진입은 히파티아의 전설에서도 볼 수 있듯이 더 이상 알렉산드리아가 사상의 자유를 구가할수 없게 하였다. 그렇게 알렉산드리아는 서서히 자신의 장점을 죽여갔다. 이러한 알렉산드리아에게 새로운 숨을 불어넣은 것은 정복자 이슬람이었다. 그들은 이 도시를 정복하면서 '세상의 가장 큰 도시를 정복하였다'고 기뻐하였다. 그 기쁨 속에는 풍요로운 도시를 획득하였다는 자부심과 이 세상의 지식을 얻었다는 감격이 가득 배어 있었다. 이 도시는 무슬림들이 콘스탄티노플을 점령하기 전까지 이들이 정복하였던 가장 큰 도시였다. 비스밀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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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세는 살아있다 - 그 어둠과 빛의 역사 역사도서관 교양 8
장 베르동 지음, 최애리 옮김 / 길(도서출판) / 2008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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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세가 암흑시대였는가? 이제는 더 이상 중세가 암흑이 아니었다는 사실은 분명하다. 하지만 왜 암흑이 아니었는가에 대해서는 쉽게 설명되지 못한다. 신에 대한 열정과 정치한 스콜라 철학을 접하면 중세는 정말로 신앙의 시대였구나하지만 종교재판과 자신과 다른 것에 대한 불관용에서는 암흑이라는 사실을 절실하게 느끼게 된다. 그러면서 한편으로 현대 유럽은 과연 중세 유럽에서 얼마나 멀리 떨어져 나왔는가를  물어본다면 그것 역시 애매하게 표현될 수 밖에 없다. 지금도 유효하게 작동하는 유럽의 마이스터제도는 중세의 도제제도의 새로운 변형이다. 그리고 아직도 존재하는 왕실과 귀족가문의 삶은 현대 유럽에서 아직도 중세는 끝나지 않았고, 유효하다는 사실을 느끼게 한다. 하지마 사상의 자유와 인간본성의 해방을 추구하는 정치와 문화의 현주소를 본다면 유럽의 중세는 오래전에 소멸되었음을 느끼게 한다.

이런 유럽의 모습에서 지금까지 연장되어 있는 중세를 느끼게 한다. 사실 현대 유럽에서 중세의 흔적을 찾는 것은 어렵지 않다. 오랫동안 보전된 성당과 중세의 거리를 통해 우리는 외형적인 중세의 모습을 볼 수 있다. 화려한 장식가 고딕, 스테인드글라스로 치장된 교회를 바라보며 중세는 암흑이라는 사실을 느낄 수 있을까?

식생활, 약자, 강자, 교회, 불관용, 여성 등의 주제를 통해 바라보는 중세의  모습은 현대의 모습과 큰 차이를 보이지 않는다. 우리들이 큰 차이라고 느끼는 것은 삶의 자리가 이동되었을 때 느끼는 그런 감정일 뿐이다. 유대인과 나병환자, 동성애자에 대한 중세의 불관용은 현대의 기준에서 볼 때 얼마나 많이 개선되었을까? 아마도 여기에 자신있게 대답할 사람들은 없을 것이다. 그렇다면 가장 장족의 발전을 이루었다는 여성의 권리에 대한 것은 어떠할까? 중세의 여성에 대한 남성의 시각은 현대의 시각에서 볼 때 그 야만성이란 관점은 조금도 변하지 않았다. 현대의 남성들은 아마 지금도 중세의 남성을 그리워할지도 모른다. 왜냐하면 그 증거로 범람하는 포르노를 보면 수긍할 수 있을 것이다. 자신과 다른 성에 대한 경멸과 차별은 지금도 결코 완전하게 해결되지 않은 과정의 문제로 남아있다. 약자에 대한 멸시와 강자의 횡포는 지금도 정치적 제국주의의 시선에서 본다면 중세보다 결코 나아지지 않았다. 경제적 불평등과 부의 편중은 중세의 계급사회의 불평등의 또 다른 모습인 것이다.

이렇게 본다면 중세적인 틀은 근대를 거치면서 조금도 변형되지 않았다는 점이다. 오히려 중세적인 틀은 근대의 이성과 현대의 기계적 문명과 결합하여 좀더 교묘해지고 정교해 지지 않았을까? 그런 의미에서 중세는 아직도 살아있고, 현대는 중세의 연장선상에 놓여있는 포스트 중세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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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늘빵 2008-05-25 20:3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관용과 불관용, 평등과 불평등, 자유와 부자유의 문제에 관심이 많은데, 이 책은 어쩌면 현실 스케치인지도 모르겠습니다.
 
비너스. 마리아. 파티마
에케하르트 로터 외 지음 / 울력 / 2001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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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쉬타르, 비너스, 마리아로 이어지는 신화 혹은 역사의 과정은 슬픈 역사이며 왜곡의 역사라 할 수 있다. 고대 중근동에서 행해지던 이쉬타르 여신의 축제 혹은 숭배는 다산과 풍요라는 주제와  깊은 관련이 있다. 곡식의 생장과정과 밀접하게 연관된 이쉬타르 숭배는 일년을 주기로 되풀이되는 특징을 지니고 있다는 점이다. 이런 이쉬타르 숭배는 그리스 신화에 깊이 침투되었고, 뿌려지고 생장하고 거두어진다는 순환적인 패턴은 인간의 태어남, 자람, 죽음과 결합되어 이쉬타르 여신의 숭배를 우리의 삶과 연결시켰다. 그런데 이쉬타르 숭배는 생장과 추수라는 이미지에 의해 인간의 성적 능력과도 연결되었다는 점이다. 이로 인해 이쉬타르 숭배는 성적인 축제로 오인되었다는 점이다. 하지만 그 당시 사람들에게 이런 성적 방종-현대인의 관점일 뿐이다-은 일년을 주기로 반복되는 자연의 순화을 모방하는 하나의 의식이었다는 점이다. 그들에게 이런 성적인 의식은 중지될 수 없는 순환의 의식이었다. 만약 자연의 순환이 틀어지거나 중지된다면 그것은 인간에게 재앙이듯이 인간 역시 자연의 순환이 원활하게 이루어지도록 자신들의 의식을 중지할 수 없었다.

이런 중근동의 의식은 레반트 지역에서 페니키아인들의 식민지를 통해 카르타고와 히스파니아지역으로 퍼졌고, 소아시아를 통해 그리스와 로마로 전파되었다. 지중해 지역을 재패한 로마인들은 이런 중근동의 의식을 자신들만의 의식으로 변형시켰다. 이쉬타를 역시 비너스로 변형되었다. 로마인들은 이쉬타르 의식을 받아들이는데 있어 자연의 순환보다는 자신들의 기원에 연결시켰다. 즉 자연의 생식력을 민족의 기원인 비너스 의식으로 변형하였던 것이다. 이것은 일년 주기의 원초적인 행위를 특별한 행사의 의식으로 대체했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그러면서 로마인들은 성적인 생식력의 방탕함 혹은 방종을 민족의 탄생이라는 거룩한 의식으로 승화시키면서 성적인 요소를 억제하려 노력하였다. 하지만 로마인들의 이러한 노력은 큰 효과를 거둘 수 없었다. 판테온-萬神殿-으로 상징되는 로마의 종교적 성향은 모든 사람들에게 영향을 끼칠 수 있는 하나의 도그마를 형성하는데 실패하였음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313년 로마는 더 이상 다신교의 제국이 아니었다. 로마는 자신들이 박해하였던 그리스도교를 제국의 종교로 공인하였다. 이것은 또 다른 변혁을 의미하는 대사건이었다. 그동안 제국의 모든 사람들이 숭배하고 공경하였던 신이 바뀌었다는 것을 암시하는 것이었다. 민족의 어머니로 추앙되던 비너스는 이제 더 이상 존재할 수 없었다. 왜냐하면 인류의 어머니가 새롭게 등장해야만 했기 때문이었다. 그리스도교도들이 인류의 어머니라고 주장하는 마리아는 이쉬타르와 비너스와는 전혀 다른 모습을 가지고 있었다. 다산과 풍요, 민족의 번성과는 관련이 없었다. 왜냐하면 마리아는 단 한번의 임신으로 인류를 구원할 구세주를 낳았기 때문이었다. 이것은 다른 의미로 해석한다면 그동안 고대 세계를 지배했던 여성의 성적인 요소를 제거하였다는 것을 뜻하기 때문이었다. 단 한번의 행위를 통해 인류를 구원할 구세주를 이 세상에 보냈다면 더 이상 여성의 생식행위는 의미가 없게 되는 것이다. 즉 그리스도교는 여성의 가장 중요한 생식을 제어함으로서 고대세계의 자유분방했던 여성의 성적 요소를 확실하게 제거하였던 것이다.

그리스도교의 신학 혹은 이슬람의 신학은 여성의 위치를 남성의 아래에 위치시킨다. 그 이유는 여성의 성적요소에 근거한다. 중세의 그리스도교 신학이 완성될 수 있도록 초석을 놓은 초세기 그리스도교 교부들은 자신들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고대 세계의 자유분방한 종교적 분위기 속에서 성장하였다. 이들 초세기 교부들은 고대의 여성성이 얼마나 파급효과가 큰 것인지를 잘 알고 있었다. 성 아우구스티누스의 고백록을 언급하지 않더라도 초세기 교부들은 여성의 성적요인과 연결된 종교적  폭발성을 잘 알고 있었다. 그럼에도 인간에게 있어 성적인 요소는 결코 제거될 수 없다는 점도 잘 알고 있었다. 즉 종교적 엄숙성과 인간의 원초적인 본성 사이에 종교적 실험이 시작되었던 것이다. 성 히에로니무스와 테르툴리아누스는 가장 극단적인 노선을 선택하였다. 고대 종교에서 숭배되었던 여성의 다산성과 풍요에 관한 모든 것을 제거하고 에덴 동산에서의 이브에게로 여성의 모습을 집중함으로서 성적인 요소가 악이라는 등식을 중세에 성립하도록 기여하였다. 반면에 교회로부터 파문된 조비니아누스는 반대의 길을 걸었다. 그는 무엄하게도(?) 성모 마리아의 처녀성을 언급하였던 것이다. 조비니아누스는 초세기 교부들이 그토록 옹호하였던 성모 마리아의 처녀성에 의심을 가졌다. 처녀막이 성교에 의해 파열된다면 동정으로 잉태한 성모 마리아의 처녀막이 출산으로 인해 온전히 보전되었을까하는 의심을 가졌던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사고의 결과로 그는 만약 아담과 이브의 자손들이 이 세상 인류의 시작이라면 우리들은 근친상간에 의해 탄생한 죄많은 인간들이 아닐까하는 사고의 확장으로 발전하였다. 조비니아누스의 이런 사고는 결국 신의 단일성이 아니라 고대의 다신성에 접목된 인간 사고의 당연한 결과였는지 모른다.

조비니아누스의 패배는 그리스도교회가 앞으로 어떤 길로 나아가는가를 가늠할 수 있는 시금석이 되었다. 이제 여성은 다산과 풍요의 기원으로서 숭배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을 낙원에서 추방한 악의 근원으로 규정되는데 큰 기여를 하였다. 상호간에 기쁨이어야 할 성행위는 죄악이었고, 이 결과로 나타나는 임신은 죄악의 결과였고, 이로 인해 고통이 수반된다고 배워야만 했다. 그리고 성적인 행위는 합법이든 불법이든 모두 죄악으로 인식되었다. 성이 더러운 것, 혹은 피해야만 하는 것으로 인식될 때 가장 큰 피해자는 성행위의 결과를 잉태하는 여성이었다. 그리스도교는 여성들에게 모든 죄악의 근원을 집중시킴으로서 고대에 여성들에게 집중되었던 풍요로운 숭배를 모두 제거하였다. 그리고 그 숭배의 대상을 단 하나의 주제, 남성인 예수 그리스도로 집중시킴으로서 고대로부터 존재하였던 인간 정신의 자유를 하나의 신학적 교리로 치환시키는데 성공하였다.

이것은 빛을 가져오는 자라는 의미인 루시퍼-빛을 의미하는 룩스Lux와 가져온다는 뜻의 라틴어 ferre가 합성된 단어-가 왜 빛에서 악마로 변질되었는가를 생각하게 한다. 여기서 빛은 금성, 즉 비너스, 혹은 이쉬타를를 의미한다는 점이다.

*나는 사탄이 번개처럼 하늘에서 떨어지는 것을 보았다라는 뜻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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