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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너스. 마리아. 파티마
에케하르트 로터 외 지음 / 울력 / 2001년 10월
평점 :
품절
이쉬타르, 비너스, 마리아로 이어지는 신화 혹은 역사의 과정은 슬픈 역사이며 왜곡의 역사라 할 수 있다. 고대 중근동에서 행해지던 이쉬타르 여신의 축제 혹은 숭배는 다산과 풍요라는 주제와 깊은 관련이 있다. 곡식의 생장과정과 밀접하게 연관된 이쉬타르 숭배는 일년을 주기로 되풀이되는 특징을 지니고 있다는 점이다. 이런 이쉬타르 숭배는 그리스 신화에 깊이 침투되었고, 뿌려지고 생장하고 거두어진다는 순환적인 패턴은 인간의 태어남, 자람, 죽음과 결합되어 이쉬타르 여신의 숭배를 우리의 삶과 연결시켰다. 그런데 이쉬타르 숭배는 생장과 추수라는 이미지에 의해 인간의 성적 능력과도 연결되었다는 점이다. 이로 인해 이쉬타르 숭배는 성적인 축제로 오인되었다는 점이다. 하지만 그 당시 사람들에게 이런 성적 방종-현대인의 관점일 뿐이다-은 일년을 주기로 반복되는 자연의 순화을 모방하는 하나의 의식이었다는 점이다. 그들에게 이런 성적인 의식은 중지될 수 없는 순환의 의식이었다. 만약 자연의 순환이 틀어지거나 중지된다면 그것은 인간에게 재앙이듯이 인간 역시 자연의 순환이 원활하게 이루어지도록 자신들의 의식을 중지할 수 없었다.
이런 중근동의 의식은 레반트 지역에서 페니키아인들의 식민지를 통해 카르타고와 히스파니아지역으로 퍼졌고, 소아시아를 통해 그리스와 로마로 전파되었다. 지중해 지역을 재패한 로마인들은 이런 중근동의 의식을 자신들만의 의식으로 변형시켰다. 이쉬타를 역시 비너스로 변형되었다. 로마인들은 이쉬타르 의식을 받아들이는데 있어 자연의 순환보다는 자신들의 기원에 연결시켰다. 즉 자연의 생식력을 민족의 기원인 비너스 의식으로 변형하였던 것이다. 이것은 일년 주기의 원초적인 행위를 특별한 행사의 의식으로 대체했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그러면서 로마인들은 성적인 생식력의 방탕함 혹은 방종을 민족의 탄생이라는 거룩한 의식으로 승화시키면서 성적인 요소를 억제하려 노력하였다. 하지만 로마인들의 이러한 노력은 큰 효과를 거둘 수 없었다. 판테온-萬神殿-으로 상징되는 로마의 종교적 성향은 모든 사람들에게 영향을 끼칠 수 있는 하나의 도그마를 형성하는데 실패하였음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313년 로마는 더 이상 다신교의 제국이 아니었다. 로마는 자신들이 박해하였던 그리스도교를 제국의 종교로 공인하였다. 이것은 또 다른 변혁을 의미하는 대사건이었다. 그동안 제국의 모든 사람들이 숭배하고 공경하였던 신이 바뀌었다는 것을 암시하는 것이었다. 민족의 어머니로 추앙되던 비너스는 이제 더 이상 존재할 수 없었다. 왜냐하면 인류의 어머니가 새롭게 등장해야만 했기 때문이었다. 그리스도교도들이 인류의 어머니라고 주장하는 마리아는 이쉬타르와 비너스와는 전혀 다른 모습을 가지고 있었다. 다산과 풍요, 민족의 번성과는 관련이 없었다. 왜냐하면 마리아는 단 한번의 임신으로 인류를 구원할 구세주를 낳았기 때문이었다. 이것은 다른 의미로 해석한다면 그동안 고대 세계를 지배했던 여성의 성적인 요소를 제거하였다는 것을 뜻하기 때문이었다. 단 한번의 행위를 통해 인류를 구원할 구세주를 이 세상에 보냈다면 더 이상 여성의 생식행위는 의미가 없게 되는 것이다. 즉 그리스도교는 여성의 가장 중요한 생식을 제어함으로서 고대세계의 자유분방했던 여성의 성적 요소를 확실하게 제거하였던 것이다.
그리스도교의 신학 혹은 이슬람의 신학은 여성의 위치를 남성의 아래에 위치시킨다. 그 이유는 여성의 성적요소에 근거한다. 중세의 그리스도교 신학이 완성될 수 있도록 초석을 놓은 초세기 그리스도교 교부들은 자신들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고대 세계의 자유분방한 종교적 분위기 속에서 성장하였다. 이들 초세기 교부들은 고대의 여성성이 얼마나 파급효과가 큰 것인지를 잘 알고 있었다. 성 아우구스티누스의 고백록을 언급하지 않더라도 초세기 교부들은 여성의 성적요인과 연결된 종교적 폭발성을 잘 알고 있었다. 그럼에도 인간에게 있어 성적인 요소는 결코 제거될 수 없다는 점도 잘 알고 있었다. 즉 종교적 엄숙성과 인간의 원초적인 본성 사이에 종교적 실험이 시작되었던 것이다. 성 히에로니무스와 테르툴리아누스는 가장 극단적인 노선을 선택하였다. 고대 종교에서 숭배되었던 여성의 다산성과 풍요에 관한 모든 것을 제거하고 에덴 동산에서의 이브에게로 여성의 모습을 집중함으로서 성적인 요소가 악이라는 등식을 중세에 성립하도록 기여하였다. 반면에 교회로부터 파문된 조비니아누스는 반대의 길을 걸었다. 그는 무엄하게도(?) 성모 마리아의 처녀성을 언급하였던 것이다. 조비니아누스는 초세기 교부들이 그토록 옹호하였던 성모 마리아의 처녀성에 의심을 가졌다. 처녀막이 성교에 의해 파열된다면 동정으로 잉태한 성모 마리아의 처녀막이 출산으로 인해 온전히 보전되었을까하는 의심을 가졌던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사고의 결과로 그는 만약 아담과 이브의 자손들이 이 세상 인류의 시작이라면 우리들은 근친상간에 의해 탄생한 죄많은 인간들이 아닐까하는 사고의 확장으로 발전하였다. 조비니아누스의 이런 사고는 결국 신의 단일성이 아니라 고대의 다신성에 접목된 인간 사고의 당연한 결과였는지 모른다.
조비니아누스의 패배는 그리스도교회가 앞으로 어떤 길로 나아가는가를 가늠할 수 있는 시금석이 되었다. 이제 여성은 다산과 풍요의 기원으로서 숭배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을 낙원에서 추방한 악의 근원으로 규정되는데 큰 기여를 하였다. 상호간에 기쁨이어야 할 성행위는 죄악이었고, 이 결과로 나타나는 임신은 죄악의 결과였고, 이로 인해 고통이 수반된다고 배워야만 했다. 그리고 성적인 행위는 합법이든 불법이든 모두 죄악으로 인식되었다. 성이 더러운 것, 혹은 피해야만 하는 것으로 인식될 때 가장 큰 피해자는 성행위의 결과를 잉태하는 여성이었다. 그리스도교는 여성들에게 모든 죄악의 근원을 집중시킴으로서 고대에 여성들에게 집중되었던 풍요로운 숭배를 모두 제거하였다. 그리고 그 숭배의 대상을 단 하나의 주제, 남성인 예수 그리스도로 집중시킴으로서 고대로부터 존재하였던 인간 정신의 자유를 하나의 신학적 교리로 치환시키는데 성공하였다.
이것은 빛을 가져오는 자라는 의미인 루시퍼-빛을 의미하는 룩스Lux와 가져온다는 뜻의 라틴어 ferre가 합성된 단어-가 왜 빛에서 악마로 변질되었는가를 생각하게 한다. 여기서 빛은 금성, 즉 비너스, 혹은 이쉬타를를 의미한다는 점이다.
*나는 사탄이 번개처럼 하늘에서 떨어지는 것을 보았다라는 뜻