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력과 은총
시몬느 베이유 지음, 윤진 옮김 / 이제이북스 / 2008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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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생시절 이 책을 처음 접했었다. 그 당시 유행하던 문고본으로 나온 책이었는데 제목이 너무 심오해서 무작정 집어들었었다. 그리고 책 표지 안쪽으로 안경을 쓴 조그만 여자-상반신 사진이었는데 그렇게 느껴졌다-가 작업복 비슷한 옷을 입고 있었다. 시몬 베유라는 여성을 처음 만나는 순간이었다. 첫번째 쪽에 이 세상은 모든 것이 중력이 지배하지만 오직 하나의 예외가 있는데 그것은 은총이라는 구절을 보았을 때 순간 떠오른 것이 수평축과 수직축이 교차하는 십자가였다. 인간의 사랑과 신의 은총의 하강, 우리 마음의 상승이라는 단순한 도식의 십자가가 아니라. 그 교차점이 떠올랐다. 그 교차점은 은총과 중력의 무풍지대, 즉 격렬함이 들이닥치기 전의 태풍의 눈과 같은 곳이란 생각이었다. 그곳에 그리스도가 못박혔고, 그곳에서 수용과 반발이 시작되었던 것이다.

나는 시몬 베유의 심오함을 다 이해하지 못한다. 그 짧은 단상 속에 얼마나 많은 고뇌와 사색과 고통이 들어있을까? 왜냐하면 시몬 베유는 파스칼이 말한 지구를 멸망시킬 수 있는 우주의 물방울과 같은 존재가 아니라 행동하는 인간이었기 때문이다.

그녀가 말하는 중력과 은총은 무엇이었을까? 밑으로 하강하는 중력의 성질과 사방으로 스며들고자 하는 은총은 결코 화합되거나 어울리지 못할 것처럼 보인다. 중력은 지상에서 느끼지만 결코 우리가 의식하지 않고도 살아갈 수 있다. 은총 역시 시공간의 역사 속에서 처음 부터 있었지만 그것을 우리는 결코 의식하지 않는다. 그렇다면 시몬 베유가 느낀 중력과 은총은 본질적으로 같은 것이었을까?

그 당시 문고본의 여백에는 "신의 하강(중력)과 은총의 상승(부활 혹은 구원)...?"이라는 히미한 글씨가 남아있다. 그것은 아직 미숙한 한 사람의 사고의 시발점이 아니었을까? 신과 인간을 엄격히 구분하는 정통적인 이해에서 지금은 얼마나 변했을까? 신이 인간이 되었다는 사실과 그 인간이 삶을 마감하고 중력의 법칙을 거슬렸다는 그 사실을 얼마나 이해하고 있을까? 오로지 중력이라는 입장에서 은총을 이해하는 것은 아닐까. 아니면 은총이 존재한다는 사실조차 잊은 것은 아닐까?

중력과 은총의 접점은 두려움일까 아니면 경외감일까. 그곳에서는 여전히 "엘리, 엘리, 라마 사박타니..."라는 소리가 들려온다. 그것은 울분도 탄원도 아닌 한 인간이 고독한 부르짖음이었다. 중력과 은총의 중간지대는 그만큼 고독한 장소인지도 모른다. 그러기에 아무도 그곳을 감히 꿈꾸지 못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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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라큘라 - 피귀르 미틱 총서 13
장 마리니 지음, 이병수 옮김 / 자음과모음(이룸) / 2005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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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라큘라! 아마도 메시아 혹은 예수 그리스도 만큼이나 서구문화에서는 강렬한 이름이라고 할 수 있다. 이름nomen, 그 매혹과 불경의 이중성.

드라큘라는 언제나 그리스도의 신성과 대비가 된다. 마굿간에서 태어남. 숲 저 너머라는 의미인 트란실바니아-Transilvania-의 귀족. 영원한 생명. 영원한 죽음. 내 몸과 내 피를 먹고 받아 마시라. 영원한 생명의 입구. 흡혈과 저주받은 삶. 태양과 어둠.

드라큘라의 탄생은 대영제국의 전성기였던 빅토리아 여왕 시대라는 점이다. 이 시대는 모순의 시대였다. 대영제국은 전 세계에 자신들의 깃발이 올라가고 해가 지지 않는 왕국이라고 자부하고 있었지만 이 시대 만큼 二重規範이 지배했던 시대도 없었다. 프로테스탄트적인 윤리가 전 왕국을 지배했지만, 식민지에서는 그리스도의 자비와 사랑이 결코 실천되지 않았다. 윈저의 과부-알버트공이 사망한 뒤 신민들은 여왕을 그렇게 불렀다-는 윤리적 엄격함을 원했지만 런던의 뒷골목은 혼탁함 그 자체였다. 잭더리퍼는 매춘부들의 배를 갈랐고, 홈즈는 아편을 흡입하고 있었다. 문제는 이러한 혼란이 진보를 위한 하나의 과정이라고 생각하였다는 점이다. 이런 사고는 다윈의 '종의 기원'이 촉발한 하나의 새로운 조류였다.

이런 시대에 드라큘라는 등장하였다. 그의 등장은 기독교적 신화에 대한 은근한 패러디였다. 빛의 그리스도와 어둠의 드라큘라는 아주 잘 어울리는 異音同意語가 아닐까? 사람들은 신성모독의 아슬함 속에서 드라큘라의 진가를 발견하였다. 그것은 시대를 통하여 끊임없이 변형시킬 수 있는 다양성이었다. 그리스도의 다양성은 시대의 변화 속에서 다양하게 시도되었다. 절대자에서 가난한 노동자의 아들, 사랑의 메신저... 그 다양한 변신은 드라큘라에게도 그대로 적용된다. 빅토리아 시대의 불안함. 그 불안함은 산업혁명으로 야기된 사회구조의 격변이었다. 이 격변속에서 종교가 채워주지 못한 인간의 잠재적 불안이 드라큘라를 통해 투영되었다. 이렇게 등장한 드라큘라는 1,2차 세계대전을 통해 다시 한번 조명된다. 전쟁으로 피폐해진 인간의 심성 속에 드라큘라는 자연스럽게 들어왔다. 그것은 흡혈귀의 이미지가 아니라 공포와 전율, 그리고 죄책감이 혼합된 드라큘라였다. 그리고 냉전 시대를 거쳐 월남전에 이르기까지 드라큘라는 이전의 모습과는 아주 다른 새로운 모습으로 해석되었다. 이제 드라큘라는 무자비한 살인자, 흡혈귀에서 자기 나름대로 변명을 하는 자기 방어적 드라큘라로 변형되었다.

이렇게 시대를 통해 변형되고 변조될 수 있는 장점이 바로 드라큘라의 매력이며 그에게 빠질 수 밖에 없는  한 이유일 것이다.

그러나 여전히 변함없는 상징성도 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구원의 십자가이다. 그리스도는 나무로 만든 십자가에 매달려 죽고 부활함으로서 우리에게 구원을 가져다 주었다. 마찬가지로 드라큘라는 나무로 만든 말뚝에 자신의 심장을 찔림으로서 죽음에 이르게 된다. 즉 나무말뚝에 의해 드라큘라는 저주의 반복적인 삶을 마감하고 영원한 안식을 얻게 되는 것이다.

이 기본적인 종교적 상징성을 허물지 않는한 드라큘라의 변주는 언제까지나 계속 될 것이다. 바로 이 은폐된 종교적 상징성으로 인해 드라큘라는 신화로 인식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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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레이트 게임 - 중앙아시아를 둘러싼 숨겨진 전쟁
피터 홉커크 지음, 정영목 옮김 / 사계절 / 2008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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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은 전부터 관심을 가지고 있던 제1차 앵글로-아프가니스탄 전쟁에 대한 전말이 담겨 있어 망설이지 않고 구입했다. 사실 인도 식민지에 근무했던 영국의 지식인들에게 제1차 앵글로-아프가니스탄 전쟁은 잊고 싶은 기억이었다. 카불에 주둔해 있던 1만6천명의 군인과 군속 가운데 오직 한 사람만이 생존해 왔다는 역사적 사실성-생존자가 1명은 아니었다. 다만 역사에 조명된 유일한 백인이 한 사람 뿐이었다는 점이다-은 나에게 키플링의 소설 "왕이 되고싶은 사나이"의 모습과 겹쳐져서 쉽게 잊지 않고 기억 속에 각인되어 있었다. 그 자세한 역사적 사실을 인터넷에서 대략 알고 있었지만 그 자세한 전후의 시말이 궁금했는데 이 책은 나의 이런 갈증을 해결해 주었다. 대영제국이 아프가니스탄에서 엄청난 패배를 당했음에도 이 지역에 확실한 군사적 교훈을 남겨주지 못한 것은 수단에서 고든 장군이 마흐디의 반란에 고전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대영제국에게 이곳은 아프리카의 수단과 이집트만큼 중요한 지역이 아니었다는 점 또한 크게 작용하였을 것이다. 그러나 이 지역은 러시아가 부동항을 찾아 남진정책을 적극적으로 추진하면서 대영제국 식민지의 핵심인 인도 방어를 위해 필요불가결한 지역으로 인식되면서 사정이 복잡해 지기 시작한다.   

대영제국과 러시아가 '그레이트 게임'을 벌인 이 지역은 우리가 흔히 西域으로 지칭하는 곳이기도 하다. 이 길은 혜초가 西天竺으로 들어간 길이며,고선지가 중앙아시아로 진겨한 길이기도 하다. 하지만 이슬람이 흥기하여 이 지역을 장악하고, 유럽이 대항해 시대를 거치면서 바다 중심으로 움직이면서 이 위대한 문명의 길에 위치한 이곳은 잊혀진 장소가 되었다. 하지만 대영제국과 러시아의 힘겨루기가 본겨화되면서 이 지역은 다시 주목을 받게된다. 그러나 이 지역에대한 지식은 전무하였기 때문에 러시아와 대영제국은 야심에 찬 젊은 장교들을 이용하여 본격적인 지리탐사에 나서게 된다.

러시아는 페테르 대제 이후 부동항을 얻기 위하여 적극적인 팽창정책을 채택한다. 그러나 유럽에서는 발트해에서 막혀버리고 지중해에서는 흑해에 갇혀버리게 된다. 러시아의 선택은 남쪽과 동쪽이 될 수밖에 없었다. 이 결과 극동으로의 진출은 성공적-러시아의 동방정책에 겁을 먹은 대영제국은 조선의 거문도를 점령한다-으로 완수되었다. 아니 알래스카까지 진출한 러시아의 동방정책은 너무 멀리까지 확대되었던 것이다. 반면에 남진정책은 대영제국의 견제를 받게된다. 그 이유는 러시아는 남진정책의 확고한 장소를 흑해와 카스피해 사이의 코카사스 지역으로 확정하였기 때문이었다. 러시아는 이 지역으로 밀고 내려와 페르시아를 점령한 다음 인도양으로 진출한다는 구상이었다. 러시아의 이런 구상은 대영제국의 카이로, 케이프타운, 켈커타를 연결하는 식민지 정책을 위협하는 것이 될 수밖에 없었다. 특히 페르시아의 점령은 잉글랜드에서 인도를 연결하는 해상로를 중간에서 차단할 수 있다는 점에서 대영제국이 결코 받아들일 수 없는 것이었다. 

결국 러시아와 대영제국은 코카사스 지역에서는 이란을 경계로 서로의 세력권을 인정하였다. 러시아가 코카사스 지역의 지배권을 확보하는 대신 대영제국은 페르시아에 대한 암묵적인 지배권을 인정받았다. 이 결과 영국은 아프리카에서처럼 러시아에게 고달픈 인종적 종교적 문제를 선심쓰듯 주고 자신들의 이익을 챙겼던 것이다. 반면 아프가니스탄에서는 문제가 간단하지 않았다. 이곳은 러시아뿐만 아니라 淸제국의 이익도 첨예하게 걸린 지역이었기 때문이었다. 게다가 이곳에 오래전부터 정주하고 있는 민족은 가장 호전적인 우즈벡인 키르키즈인, 타직크인들이었다. 이들은 오랫동안 지역영주의 지배하에 험준한 지형-사막-을 방패로 독립적으로 존재하고 있었다. 사실 이런 지형적인 막연함 때문에 대영제국은 러시아의 남진이 인도에 크게 위험할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그러나 러시아와 대영제국의 젊은 장교들이 지리탐사를 거듭하면서 이 지역이 의외로 취약한 곳임을 알게되었다. 사실 역사적 지식만 조금 있다면 이 지역은 알렉산드로스의 東進에서부터 징기스칸의 西進, 고선지의 서역進出이란 역사적 사실을 통해 대규모 군사 이동이 가능한 지역임을 쉽게 알 수 있었던 것이다.

이런 사실이 밝혀지면서 아프가니스탄은 전략적으로 러시아와 대영제국이 결코 포기할 수 없는 요충지로 선택되었다. 대영제국은 인도를 방어할 수 있는 지역이었고, 러시아는 인도를 침공할 수 있는 전초지였던 것이다. 아프가니스탄은 자신들이 알지 못하는 사이에 제국들의 전장터가 되었던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대영제국과 러시아는 이 지역을 차지하기 위한 전쟁을 선택하기 보다는 서로의 영향력을 유지하며 아무도 갖지 못하게하는데 동의하였다. 하지만 여기에 청제국이 끼어들면서 아프가니스탄 동쪽의 취약점이 드러나게 되자 러시아, 청, 대영제국은 지도상으로 자신들이 서로 만나지 못하게 만들어 버리게 된다. 그래서 지금 아프가니스탄의 지도를 보면 동쪽으로 길게 뻗어 있는 가느다란 와칸 회랑을 볼 수 있다. 이 회랑을 통해 러시아, 대영제국, 청이 자신들의 세력확장을 멈출 수 있게 하였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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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들은 뉴스나 어떤 이야기를 할 때 지한파니 혐한파니하는 소리를 듣게 된다. 당연히 지한파는 우리를 좋게 보는 사람이고 혐한파는 우리를 나쁘게 보는 사람이라고 인식하고 느낀다. 정말 그럴까? 범위를 축소시켜 일본에 한정시켜 보자. 일본의 지식인 가운데 지한파가 있고, 혐한파가 있을 것이다. 물론 정치, 연예, 경제계에도 이런 비유가 그대로 성립될 것이다. 일본의 지한파와 혐한파의 차이는 무엇일까. 지한파는 정말로 한국을 이해하고 지지하는 부류이고, 혐한파는 한국을 반대하고 사사건건 염장을 지르는 부류일까. 

아주 재미있는 일화가 하나있다. 명치유신 이후 일본은 조선을 침략하고자하는 征韓論이 정계의 화두로 등장하게 된다. 당장 조선을 치자는 쪽과 익을 때까지 기다리자는 파가 대립하게 된다. 익을 때까지 기다리자는 파의 대표가 伊藤博文이다. 아이러니하게도 안중근의사가 하얼빈에서 그를 저격함으로써 조선의 식민지화가 앞당겨지게 되었다는 사실이다. 그렇다면 伊藤博文은 지한파일까? 아닐 것이다. 전두환 정권이 집권했을 때 일본은 中曾根康弘이 수상을 하고 있었다. 그는 한국측이 협력자금을 요청하자 우리의 요구를 들어주었다. 그는 지금 일본의 보수화를 완성시킨 장본인이란 점이다. 일본열도의 不沈航母說을 강조하며 神國日本이란 망언을 낳게한 근원이었다. 그럼에도 그는 재임기간 내내 한국에 우호적인 제스처를 보냈고 우리의 요구조건을 수용하는 척 하였다. 정말로 中曾根康弘가 친한파였을까?

일본의 친한과 혐한은 유감스럽게도 같은 뿌리에서 나온 색깔이 다른 꽃일 뿐이다. 그 꽃의 근원을 추적해 보면 동일한 뿌리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이 뿌리의 시작은 麗蒙연합군의 일본침공부터 시작되었다. 이 침공은 일본 역사에서 처음으로 당하는 재앙이었다. 그리고 실재로 일본 본토에 침공군이 실질적으로 상륙한 첫번째 사건이었다. 이 사건으로 일본은 한국을 보는 시각이 달라지게 된다. 즉 한국은 이후 자신들이 마음대로 침략하는 대상이 아니라 언제든지 자신들을 위협할 수 있는 잠재적인 적으로 상정한 것이다. 이후 일본의 지배자들은 한국이라는 나라를 자신들의 방어를 위해 반드시 자신들의 땅으로 만들어야만 하는 나라로 인식하였다. 이것은 일본의 방어적인 입장에서 본 것이다. 즉 조선중기까지 역사는 대륙을 중심으로 전개되었다. 이것은 대륙의 세력이 일본을 침입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한반도를 거쳐야 한다는 것이었다. 즉 한반도가 다른 세력의 영향권에 들어서는 안된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조선 중기 이후 세계사는 해양중심으로 변하게 되는데 일본은 자신들의 영토팽창을 위해 한반도는 반드시 자신들의 영향권에 포함되어야만 하는 전략적 목표로 바뀌게 되었다. 이런 야심이 임진왜란을 통해 실험되었고, 명치유신 이후 본격적으로 실행되게 된다.

즉 일본의 목표는 한반도의 실질적인 지배 혹은 영향권 아래 두어야 한다는 것을 명백히 하고 있는 셈이다. 이런 상황하에서 지한파와 혐한파의 구분이 필요할까? 우리가 일본의 여론을 지한파와 혐한파로 구분하는 것은 고통없이 죽을래, 고통스럽게 죽을래라고 묻는 악당의 질문에 순진하게 선택하는 것이 될 뿐이다. 일본은 지금도 우리들을 조롱하고 있다. 그들은 이렇게 말한다. "맞고 내놓을래, 그냥 내놓을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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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쇼의 하이쿠 기행 1 - 오쿠로 가는 작은 길 바쇼의 하이쿠 기행 1
마쓰오 바쇼 지음, 김정례 옮김 / 바다출판사 / 2008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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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장 일본적인 것이 무엇일까? 삼사구체의 시조가 우리의 가락과 심성에서 솟아난 것이라면 일본의 俳句(하이쿠)는 가장 일본적인 것이라 할 수 있다. 시조가 한국적인 이유는 그것이 바로 한국적인 감성의 표출이란 점이다. 우리의 가락과 가장 잘 어울리는 시조의 운율은 바로 한국민족의 감성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런 시조적 감성은 아주 놀랍게도 한국에 들어온 가톨릭에서도 그래로 받아들이고 있다. 즉 가톨릭에서 초상-煉禱(연도)라고한다-이 났을 때 읊는 기도의 가락이라든가, 성직자들이 의무적으로 바치는 성무일도의 찬미가의 경우에는 완벽한 시조가락으로 편집되어 있다. 그리고 가톨릭에서 돌아가신 최민순 신부님이 번역한 시편의 경우 나의 주관적인 판단으로 한국에서 번역된 시편으로 우리의 가락을 가장 잘 살린 것으로 생각된다. 이렇게 시조의 가락이 우리의 감성과 어울어져 있듯이 일본의 俳句 역시 그러하다는 점이다.

중국의 시가 다양한 형식(辭,絶句,律詩)으로 발전해 나갔다면, 한국은 가락과 음율을 강조하는 시조로 발전하였다. 반면에 일본은 음율도 있지만 형식(5,7,5의 음수율)을 강조하는 俳句로 발전하였다. 즉 한국과 일본은 중국의 시풍에 영향을 받았지만 감성과 형식으로 분화되었다는 것은 재미있는 점이라 하겠다. 어쩌면 민족성의 한 결과인지도 모른다. 

일본의 俳句의 형식미를 보면 글자수는 17자 밖에 되지 않는다. 그러면서도 일본인들은 이 짧은 문장 속에 세계를 우주를 집어 넣으려 한다. 물론 반대도 가능하다. 즉 아주 조그만 형식 속에 소우주와 대우주를 집어넣으려는 일본인들의 발상은 오래 전에 이어령 교수가 저술한 "축소지향의 일본인"이란 책의 주제이기도 하였다. 일본인들의 이런 심성은 俳句가 발전하는 바탕이 되었다. 이런 토양은 시조가 인생의 심오함 보다는 교훈과 인간의 감성, 풍자에 중점을 둔 주관적이면서 감정적인 것과는 아주 대비되는 것이라 하겠다. 반면에 俳句는 너무나 짧은 형식 때문에 군더더기를 붙일 수 없기에 압축적인 형식을 고수할 수밖에 없었다. 이런 압축성은 해석의 다양성을 불러올 수밖에 없다. 중국이나 일본의 시는 한자를 사용한다. 즉 한자를 사용한다는 것은 압축적인 의미와 함께 조형적인 가능성도 볼 수 있다는 점이다. 그러기에 한시의 경우 시뿐만 아니라 글씨까지도 함께 감상할 수 있는 토대가 이루어져 있다. 반면 시조는 한문이 아니라 한글로 표현된다는 점이다. 여기에는 어떤 형식미가 아니라 자신의 언어가 바로 표현된다는 즉각성이 내포되어 있다. 그러기에 시조에서는 압축적인 의미와 회화성보다는 감성에 호소하는 힘이 강하다는 것이다.

하지만 俳句는 이런 점을 의도적으로 억제한다. 그래서 俳句는 일본적 어감으로 보아도 절단되는 느낌이 강하게 드러난다고 한다. 이것은 시조가 이어지는 듯한 느낌이 드는 것과 정반대의 현상이라 하겠다. 이어지는 것은 감정이 느슨해지는 것이라 한다면 단절은 흐름이 복잡하게 변화하는 것이라 하겠다. 이것은 서도와 검도의 차이와 같은 것이라 하겠다. 검도에는 기의 끊고 맺는 것이 강조된다. 반면 글을 쓸 때는 물흐르듯이 쓴다는 표현처럼 처음부터 끝까지 일관성을 가지고 이어져야 한다. 하지만 검도는 혹은 칼싸움은 순간 순간 기의 끊고 맺음과 순발력이 필요하다는 점이다. 상대의 응수에 따라 변화의 폭이 다양하다는 점이다. 바로 이런 검도의 혹은 무가의 문화가 俳句의 문화와 잘 어울렸을 수도 있다는 점이다. 그래서일까... 무가들이 심취한 禪의 수행자들인 禪僧들이  俳句의 고수가 많았다는 것은 의미심상한 것이라 하겠다.

이러한 일본적인 심성이 俳句의 특성이 되면서 일본적인 시의 형식으로 자리잡게 된다. 이렇게 되면서 俳句의 주제도 다양하게 발전하게 되었지만 형식적 엄격함과 단절성은 고수되었다. 일본 俳句의 명인인 松尾芭蕉(마쓰오 바쇼)는 자연과 주변의 모습을 형식과 단절 속에 집어 넣어 俳句의 대중화에 크게 기여하였다. 사실 이런 의미를 부여하기는 싫지만 芭蕉의 시를 읽다보면 김광균의 시가 언뜻 언뜻 떠오르기도 한다. 압축된 문장 속에 얼마든지 여백으로 해석할 수 있는 무수한 공간이 마치도 포스트모더니즘의 초기적 형태처럼 보이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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