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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쇼의 하이쿠 기행 1 - 오쿠로 가는 작은 길 ㅣ 바쇼의 하이쿠 기행 1
마쓰오 바쇼 지음, 김정례 옮김 / 바다출판사 / 2008년 3월
평점 :
품절
가장 일본적인 것이 무엇일까? 삼사구체의 시조가 우리의 가락과 심성에서 솟아난 것이라면 일본의 俳句(하이쿠)는 가장 일본적인 것이라 할 수 있다. 시조가 한국적인 이유는 그것이 바로 한국적인 감성의 표출이란 점이다. 우리의 가락과 가장 잘 어울리는 시조의 운율은 바로 한국민족의 감성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런 시조적 감성은 아주 놀랍게도 한국에 들어온 가톨릭에서도 그래로 받아들이고 있다. 즉 가톨릭에서 초상-煉禱(연도)라고한다-이 났을 때 읊는 기도의 가락이라든가, 성직자들이 의무적으로 바치는 성무일도의 찬미가의 경우에는 완벽한 시조가락으로 편집되어 있다. 그리고 가톨릭에서 돌아가신 최민순 신부님이 번역한 시편의 경우 나의 주관적인 판단으로 한국에서 번역된 시편으로 우리의 가락을 가장 잘 살린 것으로 생각된다. 이렇게 시조의 가락이 우리의 감성과 어울어져 있듯이 일본의 俳句 역시 그러하다는 점이다.
중국의 시가 다양한 형식(辭,絶句,律詩)으로 발전해 나갔다면, 한국은 가락과 음율을 강조하는 시조로 발전하였다. 반면에 일본은 음율도 있지만 형식(5,7,5의 음수율)을 강조하는 俳句로 발전하였다. 즉 한국과 일본은 중국의 시풍에 영향을 받았지만 감성과 형식으로 분화되었다는 것은 재미있는 점이라 하겠다. 어쩌면 민족성의 한 결과인지도 모른다.
일본의 俳句의 형식미를 보면 글자수는 17자 밖에 되지 않는다. 그러면서도 일본인들은 이 짧은 문장 속에 세계를 우주를 집어 넣으려 한다. 물론 반대도 가능하다. 즉 아주 조그만 형식 속에 소우주와 대우주를 집어넣으려는 일본인들의 발상은 오래 전에 이어령 교수가 저술한 "축소지향의 일본인"이란 책의 주제이기도 하였다. 일본인들의 이런 심성은 俳句가 발전하는 바탕이 되었다. 이런 토양은 시조가 인생의 심오함 보다는 교훈과 인간의 감성, 풍자에 중점을 둔 주관적이면서 감정적인 것과는 아주 대비되는 것이라 하겠다. 반면에 俳句는 너무나 짧은 형식 때문에 군더더기를 붙일 수 없기에 압축적인 형식을 고수할 수밖에 없었다. 이런 압축성은 해석의 다양성을 불러올 수밖에 없다. 중국이나 일본의 시는 한자를 사용한다. 즉 한자를 사용한다는 것은 압축적인 의미와 함께 조형적인 가능성도 볼 수 있다는 점이다. 그러기에 한시의 경우 시뿐만 아니라 글씨까지도 함께 감상할 수 있는 토대가 이루어져 있다. 반면 시조는 한문이 아니라 한글로 표현된다는 점이다. 여기에는 어떤 형식미가 아니라 자신의 언어가 바로 표현된다는 즉각성이 내포되어 있다. 그러기에 시조에서는 압축적인 의미와 회화성보다는 감성에 호소하는 힘이 강하다는 것이다.
하지만 俳句는 이런 점을 의도적으로 억제한다. 그래서 俳句는 일본적 어감으로 보아도 절단되는 느낌이 강하게 드러난다고 한다. 이것은 시조가 이어지는 듯한 느낌이 드는 것과 정반대의 현상이라 하겠다. 이어지는 것은 감정이 느슨해지는 것이라 한다면 단절은 흐름이 복잡하게 변화하는 것이라 하겠다. 이것은 서도와 검도의 차이와 같은 것이라 하겠다. 검도에는 기의 끊고 맺는 것이 강조된다. 반면 글을 쓸 때는 물흐르듯이 쓴다는 표현처럼 처음부터 끝까지 일관성을 가지고 이어져야 한다. 하지만 검도는 혹은 칼싸움은 순간 순간 기의 끊고 맺음과 순발력이 필요하다는 점이다. 상대의 응수에 따라 변화의 폭이 다양하다는 점이다. 바로 이런 검도의 혹은 무가의 문화가 俳句의 문화와 잘 어울렸을 수도 있다는 점이다. 그래서일까... 무가들이 심취한 禪의 수행자들인 禪僧들이 俳句의 고수가 많았다는 것은 의미심상한 것이라 하겠다.
이러한 일본적인 심성이 俳句의 특성이 되면서 일본적인 시의 형식으로 자리잡게 된다. 이렇게 되면서 俳句의 주제도 다양하게 발전하게 되었지만 형식적 엄격함과 단절성은 고수되었다. 일본 俳句의 명인인 松尾芭蕉(마쓰오 바쇼)는 자연과 주변의 모습을 형식과 단절 속에 집어 넣어 俳句의 대중화에 크게 기여하였다. 사실 이런 의미를 부여하기는 싫지만 芭蕉의 시를 읽다보면 김광균의 시가 언뜻 언뜻 떠오르기도 한다. 압축된 문장 속에 얼마든지 여백으로 해석할 수 있는 무수한 공간이 마치도 포스트모더니즘의 초기적 형태처럼 보이니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