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진남북조사
노간 지음 / 예문춘추관 / 1995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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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지를 재미있게 읽고 그 뒤의 역사를 알고 싶다면 꼭 읽어야할 책이라고 할 수 있다. 위진남북조사는 한나라와 당나라의 사이에 존재하는 역사로 중국이 국제적인 문화라고 자랑하는 당의 바탕이 된 시기라고 할 수 있다. 중국사에서 이 시대 이후 한족 단일의 역사는 종언을 고하고 한족과 호족의 연합에 의해 제국이 건설된다. 실제로 이후의 당, 원, 청은 호족과 한족의 연합국가였고, 송과 명은 한족의 국가였음에도 불구하고 지역적 협소성과 폐쇄성에서 벗어나지 못했다는 사실은 이들의 국가가 불완전한 통일체였음을 말해주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이렇듯 중국사에서  중요한 분수령의 시기임에도 불구하고 이 시대를 개관한 책이 이 책 밖에 없다는 사실은 우리 역사학의 편식증을 증명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이 책은 시기적으로 중국의 중세시대를 기술하고 있다. 그것도 중국 중세시대의 도입부분이라 할 수 있다. 이 책을 읽다보면 중국인들이 주장하는 한족 중심의 사관이 얼마나 기만적인 것인지를 알 수 있다. 이들이 주장하는 중화주의는 주변부의 역사를 왜곡하고 기만함으로서 자신들만의 역사로 개조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중국 역사상 한족이 제국의 중심이 되었던 적은 한, 송, 명의 시대였다. 그런데 우연의 일치라고나 할까 이 시대는 중국 역사상 성장의 동력이 멈추고 제국적 영역이 축소되는 시기와 일치하고 있다. 이런 역사적 사실을 볼 때 중국이 자국중심의 화이관을 주장하는 것이 얼마나 허구인지를 잘 알 수 있다.  

중국은 역사 이래로 우리의 이웃에 엄연히 존재하고 있는 국가이다. 우리의 역사는 중국이란 나라의 통일과 분열에 의해 팽창과 축소가 반복되었다. 우리는 이웃의 중국의 변화를 잘 읽어냄으로서 중국이란 카드를 잘 활용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이 책을 읽으며 중국이 어떻게 자신들의 땅에 침입하여 정주한 이민족을 무력화시키고 그들의 젊은 피를 자신들의 문명에 이식하여 거대한 중화제국을 건설했는지를 알 수 있을 것이다. 우리가 정말로 두려워해야 할 것은 중국의 팽창력이 아니라 흡수력이라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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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찌미술 미진신서 31
정미희 / 미진사 / 1989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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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은 미술사에서 잊혀진 시기를 다루고 있는 아주 흥미있는 책이라 할 수 있다. 바로 나치시대의 예술을 다루고 있기 때문이다. 비록 이 책은 지금 절판이 됬지만 나치와 야만을 동일시하는 우리에게 이들도 자신들의 이념을 전파하기 위한 나름대로의 예술정책이 있었음을 보여주고 있다. 바로 이런 사소한 이유 때문에 이 책은 초판이 나온지 15년이 넘었지만 매우 소중한 책이라 할 수 있다. 이  책의 초판이 나왔을 당시의 상황은 오랜 기간 동안 독재에 시달렸던 민중들이  민주화에 대한 기대를 분출시키던 시기였다. 그러면서도 언제 어떻게 상황이 반전될 지 모른다는 불안감 때문에 민주주의에 대한 사고의 유예를 두어야만 했던 시기이기도 했다. 실제로 나치와 파시즘이란 단어 가운데 파시즘은 군사독재의 또 다른 이름이었기 때문에 우회적으로 나치의 예술을  다룬다는 것은 다른 의도로 해석될 수 도 있는 소지가 많았다.


이 책은 나치의 예술관과 정책에 대한 전반적인 관점을 담고 있다. 독재권력이 정권을 유지하기 위해 어떻게 우상화를 진행시켜야 하며, 예술은 어떤 방식으로 이를 뒷받침했는가를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다. 그리고 자신들의 사고와 신념에 부합하지 않는 예술을 어떻게 탄압하고 말살했는가도 기술되어 있다. 이들의 방식이 책을 다시 읽어보는 지금에도 크게 다르지 않게 사용되고 있다는 점은 나치의 공과를 떠나서 이들이 선전을 하나의 정책으로 선택했다는 것은 아주 시대에 맞는 적절한 선택이었다. 실제로 나치는 이 지구상에서 선정성이란 정부기관을 만들어 자신들의 정책을 국가적으로 흥보했던 첫번째 국가였다.  그 전야제가 베를린 올림픽이란 사실은 잘 알려져 있다.

요즘 남과 북의 관계는 군사분계선이란 무력 대치선이 엄연히 존재함에도 낙관적인 방향으로 흘러가고 있다. 이러한 시기에 이 책을 읽어보며 북쪽의 선전정책도 한번 생각해 보는 것도 좋을 것이라고 생각된다. 그들의 예술세계는 바로 그들이 추구하는 정신세계와 일맥상통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들의 예술정책을 이해할 때 그들의 사고방식도 이해하게 되는 것이다. 이러한 선과정이 없이 통일이 된다면 우리는 북쪽의 예술을 어떤 눈으로 바라볼 것인가? 단순히 그 시대의 굴절된 사고방식으로 바라볼 것인가, 아니면 하나의 당당한 예술로 대접할 것인가. 이질적인 체제가 서로를 바라볼 때 그 시각은 과연 어떠할 것인가?

그러나 분명한 것은 패전 후 나치 미술처럼 어느 한쪽의 예술작품과 사고방식은 창고속으로 들어가 모든 사람들의 뇌리에서 사라지게 될 것이다. 이들 창고의 예술품들은 그 시대에 대한 기억이 자극될 때마다 하나의 증거물로 선택되어 승리한 체제의 우월감을 과시하는 방식으로 전시될 것이다. 나찌미술을 다시 읽으며 이러한 생각이 떠오른 것은 하늘이 무너지는 것을 걱정하는 것과 같은 사고방식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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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만의 역사
스벤 린드크비스트 지음, 김남섭 옮김 / 한겨레출판 / 2003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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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전 영국에서 출판된 위인전기 시리즈의 한국판에서 보이스카웃의 창시자인 베이든 파월의 전기를 읽을 기회가 있었다. 온화하게 생긴 이 사람은 겉모습과는 달리 아프리카에서 영국의 이익을 위해 온 힘을 다해 싸운 군인출신이었다. 특히 보어 전쟁의 상징인 마페킹 전투에서 보어인들에게 포위 당했음에도 불구하고 구원군이 올 때까지 끝까지 저항하여 영국이 이 지역에 대한 강한 집착을 상징적으로 보여준 사람이었다. 전쟁의 영웅으로 모든 영예를 얻은 이 사람이 왜 아이들을 모아서 보이스카웃을 만들었을까?

그 대답이 야만의 역사에 적혀있었다. 보이스카웃은 어린이들의 심신을 단련하는 것이 제1의 목적이 아니었다. 그것은 겉으로 드러난 것일뿐이고 숨어있는 진짜 의도는 영국을 위한-또는 백인을 위한-건실하고 냉혹한 제국주의자를 양성하려는 시도였던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 예비 제국주의자들은 어떠한 조건과 환경에서도 자신이 처한 상황을 파악하고 이겨나가야만 했던 것이다. 이런 것을 총체적으로 가르친 곳이 보이스카웃이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여기에서는 애초부터 걸스카웃이란 무늬는 존재할 수 없었던 것이다. (미국에서는 동물이야기로 유명한 어니스트 시튼이 이 과업을 대행했다.)

나는 제국주의에 관계되는 일련의 책들을 읽으며 놀라움을 금치 못하는 것이 하나있다. 그것은 서국 제국주의국가-영국.미국.프랑스-들의 집요함이다. 이들은 자신들이 정해놓은 하나의 목표를 획득하기 위해 장기적으로 꾸준하게 일관된 정책을 밀고 나간다는 점이다. 이들은 정책을 수행함에 있어 발생하는 작은 실패를 교훈삼아 좀더 큰 승리를 이끌어 낸다는 점에서 타의 추종을 불허하고 있다.

미국은 인디언을 좁은 보호구역으로 몰아내어 격리하는 계기를 카스터 장군의 제7기병대가 인디언에 의해 전멸당함으로서 얻을 수 있었다. 마찬가지로 아프리카에서 영국의 승리는 카르툼에서 고든장군이 마흐디의 반란군에게 장열하게 죽음으로서 가능했던 것이다. 이렇게 제국주의자들은 작은 패배를 국가적인 프로파간다로 이용하여 분열된 힘을 응축시켰던 것이다. 제국주의자들은 자신들의 작은 패배를 큰 승리를 향한 발판으로 이용할 줄 알았던 것이다. 그러나 애석하게도 아프리카인들은 자신들의 승리를 어떻게 이용해야 할지를 알지 못했다. 그것은 능력의 차이가 아니라 시스템의 차이였던 것이다.

야만의 제국은 아시아나 아프리카인의 입장에서 본다면 아주 슬픈 역사의 기록이지만 한편으로는 서구의 백인들이 자신들의 이익을 극대화하기 까지 우리들은 무엇을 했는가를 반성하게 하는 책이기도 하다. 지옥의 묵시록에서 커츠대령은 면도날 위를 기어가는 달팽이에 대해 이야기를 한다. 많은 사람들은 달팽이가 날카로운 면도날에 두 쪽이 났을 것라는 상상을 할 것이다.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달팽이는 두 쪽이 나지 않는다. 달팽이는 면도날 양면에 자신의 근육을 단단히 붙이고 앞으로 전진한다. 마치 이것은 고난이라는 원죄를 짊어지고 수많은 세월을 살아온 제3세계 국가를 상징하는 것과도 같다. 면도날 위의 달팽이는 패배가 아니라 서구 제국주의의 야만성에 대한 도덕적 승리의 상징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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잔인한 이스라엘
랄프 쇤만 지음, 이광조 옮김 / 미세기 / 2003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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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서의 민족 이스라엘은 우리에게 하나의 환상이었다. 60년대 사막을 옥토로 가꾸고, 거대한 아랍의 공격
을 막아낸 이스라엘의 모습은 북과 대치하고 있던 우리에게 하나의 이상적인 국가상이었다. 이 결과 우리들은 이스라엘=선, 아랍=악이란 등식을 자연스럽게 여기게 되었다. 그러나 진짜 이러한 등식이 성립될 수 있는가? 고등학교 시절 정치경제시간에 선생님은 이스라엘을 '경찰국가'로 분류하였다. 이 의미는 일당 혹은 일인 독재국가보다는 조금 낮고, 민주국가보다는 못하다는 의미였다.

 
그러나 나는 이것을 절충주의적인 것으로 받아들였다. 그 뒤 시간이 흐르고 라말라,예닌과 같은 단어가 뉴스에 아주 잠깐 비추고 지나간뒤 이스라엘의 참모습에 의심을 갖게 되었다. 그리고 이 책을 보게 되었을 때 이스라엘의 본 모습을 확신하게 되었다. 이스라엘은 역사 속의 피해자일지 모르지만 이제는 가해자의 반열에 한 자리를 차지하게 된 것이다. 축하합니다. 이스라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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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를 운디드니에 묻어주오 - 미국 인디언 멸망사
디 브라운 지음, 최준석 옮김 / 나무심는사람(이레) / 2002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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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인들에게 인디언의 이미지는 레드스킨이란 풋볼팀과 미 육군 2사단마크로 인식될 수 있을 것이다. 그 외에 이들이 인디언을 생각할 단서가 있을까? 오히려 인디언이 자신들의 땅에 있었다는 사실을 없애고 싶어할 지도 모른다. 인디언에 대한 미국인들의 사고는 죠셉 콘라드의 암흑의 핵심에 나오는 커츠의 한 마디 '야수는 절멸되어야 한다'로 압축될 수 있을 것이다.

야수는 교화될 수 없는 동물을 말한다. 인디언은 정말 자신들의 기준에 맞춰 교화될 수 없었을까? 아니면 비옥한 땅이 탐나서 의식적으로 교화하지 않은 것은 아닐까? 이러한 두 가지 사고 역시 인디언을 모독하는 발언일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이 책이 주는 의미는 <늑대와의 춤>에서와 같은 낭만성, <솔저블루>에서와 같은 소극적 갈등,인디언의 눈물의 대장정을 단편적으로 묘사한 <샤이안>과 같은 백인중심의 미국 영화에 익숙한 우리들에게 이 책은 불편함보다는 생경함으로 다가올지도 모른다. 하지만 불편해도 읽어봐야만 한다. 알기 위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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