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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철 - 일본제국의 싱크탱크
고바야시 히데오 지음, 임성모 옮김 / 산처럼 / 2004년 3월
평점 :
품절
국가를 경영하는데는 하나의 시스템이 필요하고 이것을 배우는데는 많은 시간이 필요하다. 배움의 과정이 바로 근대화인 것이다. 서구적 기준으로 선진국과 후진국을 구별하는 가장 중요한 요소는 시스템이다. 시스템이란 경제적, 사회적, 문화적인 인프라를 망라하는 것이다. 그러기에 후진국가들은 선진국의 이러한 시스템을 배우기 위해 자신들의 상황에 적합한 하나의 모델을 찾게된다. 대한민국의 지도자들은 일제 강점기라는 시대를 거치면서 하나의 시스템에 익숙해지게 되는데 그것은 바로 일본 제국주의의 시스템인 것이다. 특히 5.16으로 대표되는 지도계층은 태생적으로 선택한 시스템이 크게는 일본, 작게는 만철에 국가 경영체계의 기본을 삼고 있는 것이다.
일본이 만주를 지배하기 위해 심혈을 기울여 재벌과 합작하여 만든 기관이 만철, 정확하게 말하면 남만주 철도주식회사인 것이다. 이 거대한 재벌기관은 근대화과정의 일본이 미래의 자신들의 모델을 삼기 위해 시험적으로 운영한 현실에 입각한 비주얼 시스템이었다. 여기에는 근대 일본의 모든 국가적 역량이 스며들어 있다. 남만주 철도 주식회사란 거대한 국가 아닌 국가에는 일본의 정치,경제,문화,사회의 모든 것이 집약되어 있다. 일본은 산업혁명의 상징인 철도를 통해 막 배태한 일본식 제국주의적 군산복합체란 시스템이 어떻게 작동되는가를 만주라는 거대한 땅에서 시험하고 있는 것이다.
여기서 문제가 되는 것은 환경은 미래를 결정한다는 후천적인 학습이론이다. 일본은 만주를 경영하기 위해 자신들이 구미 제국주의자들에게 배운 모든 방법을 실험하는 하나의 실습장으로 만들었다. 이 책에 등장하는 수 많은 젊은 일본 인텔리들의 이름은 전후 우리의 근대화에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는 사람들이다. 마찬가지로 일본의 만주 경영에 식민지 치하의 조선의 젊은이 들이 일본 경영자들의 하수인으로 실습을 받았다는 것이다. 이 사실은 부정적인 의미가 큼에도 불구하고 당시 조선의 젊은이들이 받을 수 있었던 가장 고급적인 교육이었다는점이 비극인 것이다.
이 결과 대한민국은 해방 후 일본에 의해 교육받은 지도층에 의해 국가의 미래가 설계되었다. 이것은 국가가 재벌과 손을 잡고 발전을 주도하는 형태로 나타났는데 이는 만철에서 시종일관 유지되었던 시스템이었다. 왜 대한민국의 위정자들은 일본식 모델을 채택해야만 했는가는 당시의 상황과 연결되어 설명될 수 밖에는 없다. 70년대 중반까지 대한민국은 북쪽의 조선민주주의 인민공화국에 비해 모든 것이 열세인 국가였다. 제3세계는 남한이 아니라 북한을 개발의 모델로 삼을 정도였다. 이러한 국력의 열세를 만회하기 위해서 위정자들은 자신들이 익숙하게 배워왔던 일본식 시스템을 자연스럽게 선택하였던 것이다.
이런 점에서 만철의 경영방식은 우리의 근대사를 이해하는데에도 적지않은 도움이 될 수 밖에 없다. 만철의 경우 의욕적이고 젊은 인재들이 이상을 가지고 시작하였을 때는 하나의 모델이 될 수 있었지만 시스템이 활력을 상실하면 부패되고 만다는 약점이 우리의 현대사에도 지속적으로 반복되고 있기 때문이다. 지금도 그 시스템은 작동하고 있지만 초기의 활력을 상실한지 이미 오래되었다고 볼 수 있다. 이 결과 성과를 위한 전시행정이 반복되고 있는 것이다.
만철이란 책은 아주 부피도 작은 책이지만 여기에는 우리의 과거와 현재가 담겨져 있는 책이다. 다만 미래는 이 책이 아니라 우리의 의지에 달려있다고 볼 수 있다. 나는 초중고등학교 시절 조회시간에 기회가 닿을 때 마다 교장선생님이 일본의 이러한 점을 우리는 배워야 한다고 하는 훈화를 들으며 자란 세대이다. 그러나 그러한 훈화가 100% 타당한 것은 아니었다. 이 책을 읽으며 나의 판단이 옳았음을 다시 한번 확인하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