히에로니무스 보스 - 중세 말의 환상과 엽기 시공아트 22
월터 S.기브슨 지음, 김숙 옮김 / 시공아트 / 2001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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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에로니무스 보슈Hieronymus bosch의 그림은 현대의 기준으로 보아도 무척 참신한 느낌을 준다. 그의 현대풍의 그림은 중세 말의 신비주의와 결합되어 환상과 엽기의 세계로 우리를 인도한다. 베르나르 베르베르가 <타나토노트>에서 설명하고 있는 저쪽의 세계를 묘사한 것 같은 <은총받은 자의 상승>과 같은 그림은 그림의 깊이가 얼마나 심원할 수 있는가를 보여주고있다.  그의 그림 속에 나타난 혼돈과 기괴함은 중세 후기의 혼란스러움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중세 후기는 무엇인지 모르게 충만한 가운데 불안함이 뒤섞여 있는 분위기였다. 교회는 더 이상 농민들의 안식처가 되지 못했으며, 도시인들에게도 매력적인 것이 아니었다. 형식화된 종교에서 위안을 찾을 수 없었던 농민들은 이를 대신할 것으로 이단운동에 빠지기도 하였다. 교회는 정통성의 입장에서 농민들의 이단운동을 철저하게 탄압하였지만 좀처럼 수그러들지 않았다. 바로 이런 시대를 살아간 히에로니무스 보슈의 그림 세계는 두려움, 희망, 혼돈이 함께 존재하는 세계이다. 그가 살아가면서 본 것은 무엇이었을까.  히에로니무스 보슈는 1516년에 죽었는데 그 이듬해 마르틴 루터가 면죄부 효력에 관한 95개조를 발표하여 종교개혁에 불을 당긴 것은 매우 시사하는 바가 크다.

히에로니무스 보슈의 본명은 <히에로니무스 반 악켄 보슈>인데 이 이름으로 그의 삶을 어느 정도 유추해 볼 수 있다.  악켄은 그의 출생지인 지금의 아헨에서 따온 것이고 보슈 역시 그가 살다가 사망한 헤르토겐보슈란 도시에서 따온 것이라고 한다. 그는 중세 말기의 혼란 속에서 그림을 그렸기 때문에 <고뇌와 희망, 의혹과 신앙이 연결된 전작품을 하나의 증언>으로 후세에 남기겠다는 신념으로 그림을 그렸다고 한다. 그렇기 때문에 그의 그림 세계는 하나의 주제로 연결되어 있는 것이다. 초기의 작품에서는 인간의 어리석음에 초점을 맞추고 있는데, 이는 중기의 죄악과 내세론이 결합되어 환상의 세계를 표현하여 날카로운 윤리관을 보여주는 전조라 할 수 있다. 그리고 말기에는 인물의 명상적 표현이나 과장을 통해 중기의 환상적인 세계를 탈피하여 좀더 인간적인 성숙함을 보인다.

그의 이러한 세계를 책 한권을 통해 일목요연하게 살펴볼 수 있다는 사실은 이 책의 장점이라고 할 수 있다. 한가지 아쉬움이 있다면 플랑드르 화파의 화려한 색의 세계를 몇 작품을 제외하고는 흑백으로 감상해야 한다는 점이다. 물론 컬러냐 흑백이냐의 차이는 책의 가격으로 직결되는 문제지만 그래도 중세 미술을 감상하는데는 그 화려한 색의 세계를 직접 눈으로 보아야만 제대로 이해할 수 있기 때문이다. 참고로 중세의 삼원색은 빨.노.파가 아니다. 중세는 빨강.검정.흰색.노랑이 주조를 이루고 있음을 알아야 한다. 세상을 표현하는 것은 글이나 말이 아니라 색으로도 가능하다는 사실, 정말 아름답지 않은가! 

**플랑드르 지방은 프랑스 북서부에서 벨기에 서부에 이르는 지방. 벨기에의 동.서프랑드르지방과 네덜란드의 젤란트주, 프랑스의 노르주와 파드칼레주의 일부가 여기에 포함된다. 이 지역은 독립된 정치적 지역으로 근세까지 존재하였으나 나폴레옹 1세에 의해 해체되어 벨기에, 프랑스, 네덜란드로 분할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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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세의 미와 예술
움베르토 에코 지음, 손효주 옮김 / 열린책들 / 1998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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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호학자인 에코는 <장미의 이름>이란 소설을 쓰고 난 뒤 하나의 숙제를 떠안게 되었다. 어떻게 독자들의 수준을 만족시키느냐인데 그것은 그리 쉽지 않아 보인다. 독자들은 그의 글쓰기를 비교하는데 하나의 기준이 있는데 그것은 장미의 이름보다 재미있느냐, 재미없느냐이다. 물론 이 책은 장미의 이름보다 재미는 없다. 솔직히 장미의 이름 이후 나온 그의 소설은 그리 재미있지는 않다. 특히 바우돌리노 같은 책은 유럽에서는 널리 알려진 <기사 멘드빌의 이야기>를 새로이 각색한 것에 지나지 않으니까...

이 책은 중세시대의 아름다움과 예술을 다루고 있는 책이다. 중세 시대에 추구했던 아름다움은 무엇이며 이를 추구하기 위한 미학의 이론은 무엇인지를 우리에게 전달하고 있다. 중세는 신학의 시대이면서 그 시녀였던 스콜라철학과 형이상학이 난무하던 시대였다. 중세 아름다움의 기준은 신이었다. 신은 진실하고, 선하며, 아름다운 것이었다. 眞.善.美는 중세 예술이 추구하던 이상이었다. 모든 예술은 신을 향한 진.선.미가 있어야만 했다. 그렇지 않을 때 그것은 아름다운 것이 아니라 추한 것이었다. 이것은 신을 향하는 것이 아름다움이라면 신을 거부하는 것은 추함인 것이다.

중세에는 왜 그토록 미를 추구하면서 엄정함을 동시에 추구했을까? 우리는 중세 시대에 건축된 고딕성당의 웅장함이 비례의 미를 추구했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그러면서도 왜 그렇게 비례를 추구했는지는 모른다. 비례란 조화를 의미한다. 조화는 중세의 특수한 신분질서-귀족,성직자,농민-를 유지하는 하나의 상징이었다. 각자 자신의 신분에 맞는 삶을 추구하면서 하나의 구조물을 이룬다는 조화의 법칙. 성직자는 기도하고, 농민은 일하며, 귀족은 이 두 계급을 보호한다는 조화의 법칙은 고딕성당이란 거대한 구조물에 영구불변의 법칙으로 세겨져 있는 것이다. 그러나 비례는 중세인들이 언제나 늘상 보아오던 양적인 아름다움이었다.  이는 내적인 아름다움을 설명해 주지는 못하였다. 그러므로 이를 설명하기 위해서는 빛과 색채의 아름다움을 설명해야만 했던 것이다. 이것은 양적인 아름다움에서 질적인 아름다움으로의 이동인 것이다.

이는 중세의 신비주의와도 통하는 것이다. 중세의 신비주의자들인 아빌라의 데레사, 빙겐의 힐데가르트와 같은 신비가들에게 빛과 색채는 그리스도의 또 다른 체험이었다. 이 체험은 엘 그레코에 의해 시각화되지만 그것은 후의 일이다. 빛은 은총이었다. 빛은 우리가 거부한다해도 언제나 우리의 머리 위에 빛나고 있다. 우리는 선택할 수 있다. 빛을 받아들이느냐, 피하느냐의 문제는 우리의 자유의지인 것이다. 빛을 받아들인다면 신의 아름다움과 진리와 선의 품으로 나아갈 수 있지만, 이를 거부한다면 어둠의 나락으로 빠져들 수 밖에 없는 것이다. 빛과 색채의 문제의 우리 자신의 내적 체험의 문제인 것이다.

르네상스기의 인문학자들은 아름다움을 신에게서 찾지 않았다. 그들은 아름다움의 원형을 그리스의 조각을 통해 표출된 인간의 육체에서 찾아내었다. 여기에는 내적 신비감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 왜 중세가 르네상스가 시작되면서 종말을 고하는지는 이렇게 예술론을 통해서도 설명될 수 있는 것이다. 이 책은 어렵지만 한번 숙독할만한 가치는 있는 책이다. 이를 위해서 중세 철학사를 읽어본다면 훨씬 더 이해하기 쉬울 것이다. 지금도 우리의 머리 위에는 빛이 쏟아지고 있다. 어떻게 할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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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커트밑의 극장
우에노 찌즈꼬 / 논장 / 1991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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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1년 이 책이 처음 나왔을 때 출판계에서는 <논장, 너 마저...>라는 소리가 들려왔다. 이 탄식은 논장이란 출판사는 80년대 운동권 학생들에게 사상적 자양분을 공급하는 출판사 가운데 하나였기 때문이었다. 그런 출판사가 치마 밑을 다룬 책을 출판한다는 것은 보통 용기 있는 결단이 아니었을 것이다. 그러나 이 책은 도판의 야함을 어느 정도 이해한다면 훌륭한 성에 대한 개론서를 만날 수 있다.


특히 여기서는 도판으로 사용하는 것이 미국 의 유명한 속옷회사의 카탈로그를 사용하고 있다. 이것은 이중적인 의미로 사용된다. 하나는 제품의 이미지 이면서 다른 측면에서 그것은 소프트 포르노잡지의 역할을 하는 것이다.  그러면서 저자는 섹스가 어떻게 상품으로 교묘히 포장되는가를 우리에게 암시하고 있다. 이 과정을 추적하는데는 많은 인내심이 필요하지만 그 자체만으로도 하나의 재미를 느낄 수 있다.


80년대 중반 <샘이 깊은 물>이란 잡지에서 에두아르트 푹스의 <풍속의 역사>를 발췌소개하면서 불어닥친 성을 사회사적 측면에서 이해하고자하는 접근방식이 열풍을 분적이 있다. 이 책도 물론 그 열풍의 마지막 타자였지만 잡지의 시대가 마감되고 비디오 시대가 활짝 개화하려는 시기에 나온 그 점이 못내 아쉬운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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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카소의 달콤한 복수
에프라임 키숀 지음, 반성완 옮김 / 디자인하우스 / 1996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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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 에프라임 키존은 우리에게 낮이 설지만 독일어권에서는 굉장히 인기가 좋은 대중적인 작가이다. 그의 이러한 대중적인 인기에 힘입어 한국에서도 79년에 한진출판사에서 <모세야, 석유가 안나오느냐>가 출판되었고, 이듬해에는 한겨레 출판사에서 <맙소사 우리가족>이란 제목으로 그의 풍자 작품집이 출간되었다. 그리고 잊혀진 작가가되는 듯 했는데 96년에 이 작가에 대한 바람이 불었는지 장문산과 디자인 하우스에서 책이 출판되었다. 장문산은 이전에 나온 책에 새로운 작품 몇 개를 집어넣어 번역한 것이었고, 디자인 하우스의 이 책 역시 제목 때문에 앞의 소설과 같은 범주의 책으로 생각하였다. 하지만  몇 페이지를 읽다보니 이 책은 풍자이야기가 아니라 풍자 비평집임을 알았다. 진작에 이 작가가 대단히 넓은 범위에서 활동을 하고 있다는 사실은 알았지만 현대사의 굵직한 미술작품들을 대상으로 호불호를 떠나 난도질하는 솜씨는 가히 일품이었다.


이 책에서 가장 중점을 두고 있는 작가는 요셉 보이스이다. 저자는 그의 작품 하나 하나를 섬세한 메스질로  난도질하고 있는데 저자는 보이스의 작품을 스노비즘snobism과 연결시켜 우리의 예술감각에 일침을 가하고 있다. 저자는 이 책에서 얼치기예술(?)이 대중과 영합할 때 어떤 해악이 드러나는지를  이 책 곳곳에 삽입시켜 놓고, 그 대칭점에 샤갈, 루소, 뷔페, 모딜리아니, 델보, 피니, 와이어스, 푹스, 브라우어, 후터, 하우스너, 프록쉬와 같은 정통파의 거장에서부터 젊은 작가들을 배치해 놓고 대중과 어느 정도 거리를 두고  예술에 정진하는 모습이 얼마나 아름다운지를 역설적으로 설명하고 있다.

에프라임 키손은 가장 현대적인 예술행위인 <퍼포먼스>에 대하여 끊임없는 회의의 시선을 보내고 있다. 키손에게 있어 의식이 없는 행위예술은 대중을 기만하는 행위라고 보고있다. 그러면서 그의 시각에서 보는 행위예술가들의 모습을 거침없는 필체로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다. 물론 그의 이런 판단은 미술을 전문적으로 전공하는 사람들에게는 거북스러울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대다수의 예술에 문외한인 사람들에게 이 책은 예술적 행위와 상행위의 차이점을 분명하게 보여주고 있다는 점이다. 키손은 예술이 상업적 행위로 변질되면서 대중과 가까워진 것이 아니라 대중을 더욱더 혼란 속에 몰아넣었다고 주장하고 있다. 이런 혼란 속에서 사이비 예술은 정통예술의 가면을 쓰면서 더욱더 활개를 칠 수있다고 주장하는 그의 역설 아닌 역설은 의미심상한 것이라 할 수 있다.

이 책을 읽으며 <鏡虛 禪師 惺牛>의 일화가 떠올랐다. 그분의 어머니가 돌아가셨을 때 선사께서는 옷을 벗은 알몸으로 무덤에서 울었다고 한다. 그러자 사람들이 물은즉, 어머니에게 난 모습 그대로로 어머님을 보내드린다고 대답하였다고 한다. 그러자 모인 사람들은 모두 그 심오함에 고개를 끄덕였다고 한다. 모든 사람들은 경허 선사의 도의 깊이를 알고 있기에 그의 이러한 행위를 인정한 것이다. 깊이가 없는 퍼포먼스는 무엇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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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설신어 -상 살림중국문화총서 7
유의경 지음, 김장환 옮김 / 살림 / 1996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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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설신어를 처음 접한 것은 70년대 5권으로 된 월탄의 <삼국지>를 읽으면서였다. 조조와 양수가 조아의 비석 아래를 지날 때 비석 뒷면의 <황견유부 외손제구黃絹幼婦 外孫제臼>라고 씌여있는 것을 두 사람이 해석하는 장면이었다. 그 절묘한 측자파자의 세계는 한문의 세계에 갓 입문한 나를 무척 흥분시켰다. 월탄의 해설은 다음과 같았다. <황견은 색깔이 있는 실이니 실과 색을 합하면 絶이되고, 유부는 여자아이 어린 것을 말하니 妙가 되며 외손은 딸이 낳은 아들이니 好자가되고 제구는 매운것을 담는 절구이니 辭자가 된다. 그러므로 絶妙好辭란 뜻이다>.

이런 세설신어를 처음 만난것은 1984년 임동석 교수가 전체분량 1131항목 가운데 613항목을 번역한 책이었다. 그러나 이 책은 전체를 번역하지 않아 미흡한 점이 많았지만 당시 한국에서 원문을 제외하고는 구할 수 있는 최상의 세설신어 번역본이었다. 그러다 96년 이 책의 상권을 만나게 되었다. 그리고 97년에 중권을 마지막 하권은 2000년에 만나게 되었다. 무려 5년에 걸쳐 책을 기다려 봤는가? 독서자는 능히 그럴수 있는 법이다.

이 책은 중국의 중세에 해당하는 위.진남북조시대를 이해하는데 꼭 필요한 개설서라고 보면 된다. 그 당시 역사를 움직인 사대부들의 삶과 사고방식을 이 책을 통해서 알 수 있으며 당시의 풍습도 알 수가 있다. 세설신어를 읽으면서 박한제 교수가 중국의 역사를 한족과 오랑캐가 서로 융합하여 이루어진 <호.한체제>라는 사실을 새삼 느끼게 된다. 세설신어의 시대 중국은 활력이 넘치고 대외적으로 활기차게 약동하던 시기였다. 그 이면에는 한족의 문화와 오랑캐라고 야만시되던 유목민족의 생동감넘치는 피가 중국에 수혈되었기 때문이다. 중국 역사의 다양성을 경험하고 싶다면 꼭 이 책을 읽어 보시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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