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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세의 미와 예술
움베르토 에코 지음, 손효주 옮김 / 열린책들 / 1998년 6월
평점 :
절판
기호학자인 에코는 <장미의 이름>이란 소설을 쓰고 난 뒤 하나의 숙제를 떠안게 되었다. 어떻게 독자들의 수준을 만족시키느냐인데 그것은 그리 쉽지 않아 보인다. 독자들은 그의 글쓰기를 비교하는데 하나의 기준이 있는데 그것은 장미의 이름보다 재미있느냐, 재미없느냐이다. 물론 이 책은 장미의 이름보다 재미는 없다. 솔직히 장미의 이름 이후 나온 그의 소설은 그리 재미있지는 않다. 특히 바우돌리노 같은 책은 유럽에서는 널리 알려진 <기사 멘드빌의 이야기>를 새로이 각색한 것에 지나지 않으니까...
이 책은 중세시대의 아름다움과 예술을 다루고 있는 책이다. 중세 시대에 추구했던 아름다움은 무엇이며 이를 추구하기 위한 미학의 이론은 무엇인지를 우리에게 전달하고 있다. 중세는 신학의 시대이면서 그 시녀였던 스콜라철학과 형이상학이 난무하던 시대였다. 중세 아름다움의 기준은 신이었다. 신은 진실하고, 선하며, 아름다운 것이었다. 眞.善.美는 중세 예술이 추구하던 이상이었다. 모든 예술은 신을 향한 진.선.미가 있어야만 했다. 그렇지 않을 때 그것은 아름다운 것이 아니라 추한 것이었다. 이것은 신을 향하는 것이 아름다움이라면 신을 거부하는 것은 추함인 것이다.
중세에는 왜 그토록 미를 추구하면서 엄정함을 동시에 추구했을까? 우리는 중세 시대에 건축된 고딕성당의 웅장함이 비례의 미를 추구했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그러면서도 왜 그렇게 비례를 추구했는지는 모른다. 비례란 조화를 의미한다. 조화는 중세의 특수한 신분질서-귀족,성직자,농민-를 유지하는 하나의 상징이었다. 각자 자신의 신분에 맞는 삶을 추구하면서 하나의 구조물을 이룬다는 조화의 법칙. 성직자는 기도하고, 농민은 일하며, 귀족은 이 두 계급을 보호한다는 조화의 법칙은 고딕성당이란 거대한 구조물에 영구불변의 법칙으로 세겨져 있는 것이다. 그러나 비례는 중세인들이 언제나 늘상 보아오던 양적인 아름다움이었다. 이는 내적인 아름다움을 설명해 주지는 못하였다. 그러므로 이를 설명하기 위해서는 빛과 색채의 아름다움을 설명해야만 했던 것이다. 이것은 양적인 아름다움에서 질적인 아름다움으로의 이동인 것이다.
이는 중세의 신비주의와도 통하는 것이다. 중세의 신비주의자들인 아빌라의 데레사, 빙겐의 힐데가르트와 같은 신비가들에게 빛과 색채는 그리스도의 또 다른 체험이었다. 이 체험은 엘 그레코에 의해 시각화되지만 그것은 후의 일이다. 빛은 은총이었다. 빛은 우리가 거부한다해도 언제나 우리의 머리 위에 빛나고 있다. 우리는 선택할 수 있다. 빛을 받아들이느냐, 피하느냐의 문제는 우리의 자유의지인 것이다. 빛을 받아들인다면 신의 아름다움과 진리와 선의 품으로 나아갈 수 있지만, 이를 거부한다면 어둠의 나락으로 빠져들 수 밖에 없는 것이다. 빛과 색채의 문제의 우리 자신의 내적 체험의 문제인 것이다.
르네상스기의 인문학자들은 아름다움을 신에게서 찾지 않았다. 그들은 아름다움의 원형을 그리스의 조각을 통해 표출된 인간의 육체에서 찾아내었다. 여기에는 내적 신비감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 왜 중세가 르네상스가 시작되면서 종말을 고하는지는 이렇게 예술론을 통해서도 설명될 수 있는 것이다. 이 책은 어렵지만 한번 숙독할만한 가치는 있는 책이다. 이를 위해서 중세 철학사를 읽어본다면 훨씬 더 이해하기 쉬울 것이다. 지금도 우리의 머리 위에는 빛이 쏟아지고 있다. 어떻게 할 것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