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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인 조르바
니코스 카잔차키스 지음, 이윤기 옮김 / 열린책들 / 2000년 4월
평점 :
구판절판
텔레비젼에서 외화를 더빙할 때 안소니 퀸의 목소리를 전담한 분은 지금은 거의 활동을 하지 않는 탈렌트 겸 성우인 이치우씨였다. 이치우씨의 걸쭉하면서도 그윽한 낮은 저음은 안소니 퀸의 목소리와 거의 구별할 수 없을 정도로 유사해서 실제와 거의 구별할 수 없었다. 그리스인 조르바의 겉표지가 안소니 퀸인것은 이러한 분위기와 유사한 것이 아닐까?
멕시코인이면서도 그리스인으로 각인된 안소니 퀸. 이런 사소한 것이 그리스인 조르바를 낭만적으로 보이게 만드는 원동력은 아닌지.
조르바의 세계는 종교의 세계이다. 하지만 그 종교의 세계는 무릎꿇고 기도하는 세계가 아니라 똑바로서서 신을 바라보는 세계이다. 이것이 바로 조르바의 크레타이며 자유의 그리스이다. 그리스인들은 <신의 종족과 인간의 종족은 동일하며, 대지의 어머니로부터 우리들 두 종족은 숨을 쉬었다>고 본다. 하지만 이런 평등의 정신이 자리잡은 한편에 그리스인들은 신과 인간이 다른 차이점 역시 잘 알고 있었다. <우리는 무력하지만 신들은 청동의 하늘이란 안전한 주거에서 영원히 존재한다>고 하였다. 이런 연유로 그리스인들은 페르시아인들이 왕에게 무릎을 꿇고 절을 하는 것을 이해하지 못하였다. 당당한 인간으로서 신을 바라보는 것이 신을 공경하는 것이며 인간의 존엄성을 지키는 것이라고 생각하였다. 인간이 자유롭지 못할 때 신 앞에서 결코 떳떳할 수 없다는 것, 이것이 그리스인들이 생각하는 종교였고, 신념이었다. 이런 그리스인의 종교적 심성을 배제한 피상적인 이해 속에서 조르바는 안소니 퀸처럼 실체를 갖지 못한 상상 속의 인물로 전락할 것이다. 그러나 그리스 정교의 세계를 이해한다면 조르바는 그리스 인이며 또한 보편적인 세계인으로 우리에게 다가올 것이다. 그리스 정교가 그리스 인의 정신세계에 막대한 영향을 끼치기 시작한 것은 비잔틴 시대를 거치면서 오스만 제국의 지배를 받는 과정에서 민족의 정체성과 연결되면서 부터이다. 아니 오히려 자유로운 그리스인의 종교관이 정교 속으로 스며들어간 것이리다. 이때부터 그리스인에게 정교회는 종교가 아니라 생활 그 자체가 된 것이다. 조르바에서도 많이 나오는 <나 톤 아나파프시 오 테오스: 하느님께서 죽은자에게 평안을 주시기를>나 <독사 토 테오스: 하느님의 뜻대로>와 같은 어법은 종교가 일상생활과 얼마나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는 가를 보여주는 것이다. 신과 하나가 된 조르바의 모습, 그 모습에서 인간의 자유로움과 신의 절대성을 느끼게 된다는 사실이 아이러니하기만 하다.
조르바의 세계는 끊임없이 흐르는 물과 같은 세계이다. 여기서는 멈춤이 없다. 유유히 흐르는 강과 같은 인간이 있을 뿐이다. 그 강은 거대한 장애물에 막힌다 할지라도 전혀 조급해하지 않고 차고 차 넘쳐 마침내 대해에 이르는 그러한 강인 것이다. 조르바의 자유정신의 본질은 진리에 맡닿아 있는 것이다.
하기오스 테오스, 하기오스 이르키로스, 하기오스 조르바.
**서구 세계를 양분하는 그리스 정교와 가톨릭을 비교할 때 가장 드러나는 외적인 특징은 성호를 긋는 방향이다.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하는 기도와 함께 가톨릭은 머리, 가슴, 왼쪽, 오른쪽으로 성호를 긋는 반면 그리스 정교는 머리, 가슴, 오른쪽, 왼쪽의 순서로 성호를 긋는다. 이것은 두 종교가 신을 어떻게 이해하고 있는가를 알 수 있는 매우 중요한 단서이다. 성서를 보면 성자인 그리스도는 성부 오른편에 앉아 계신다고 적혀있다. 바로 이것을 어떻게 이해하느냐가 두 종교를 가르는 경계선이 되는 것이다. 가톨릭은 인간 자체가 하느님 앞에선 겸손된 인간의 모습을 강조하므로서 신 앞에서 인간을 강조한다. 그러므로 신 앞에 서있을 때 성자는 자신의 왼쪽에 위치하게되어 머리, 가슴, 왼쪽, 오른쪽의 순서로 성호를 긋는다. 그러나 그리스 정교회에서는 앞에서 겸손한 모습이 아니라 하느님의 전능함을 강조하기에 성부의 입장에서 본 성자의 위치를 강조하기에 성부의 오른쪽에 성자가 위치함으로 머리, 가슴, 오른쪽, 왼쪽으로 성호를 긋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