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시로 본 중세유럽 (반양장)
에디트 엔넨 지음, 안상준 옮김 / 한울(한울아카데미) / 1997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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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0년 경 중세 유럽에서 15000명 이상이 거주하는 도시는 무어인들이 지배하는 이베리아반도의 세빌리야, 톨레도와 시칠리아의 팔레르모 정도였다.  이보다 더 큰 규모의 도시는 서유럽에는 없었고 다 아랍의 세계에 있었다. 1200년경이 되어서야 서유럽에는 도시가 서서히 드러나기 시작한다. 이때 베네치아가 대략 2만에서 5만 사이의 인구를 보유하고 있었다. 그리고 2만명 규모의 도시로는 이탈리아의 피렌체와 플랑드르 지방의 겐트, 잉글랜드의 런던, 프랑스의 파리, 이탈리아의 로마가 이름을 내밀기 시작하였다.  유럽에서 도시의 시대가 열리기 시작하는 것은 한참 후인 14세기 후반에 들어서면서 부터이다. 유럽은 중세시대 전반에 걸쳐 도시라고 부르기에는 너무도 초라한 도시만을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중세시대는 대영주 혹은 영주의 장원을 중심으로 모든 것이 이루어지는 자급자족의 체제였다. 도시의 발달이 미약한 관계로 사람들이 장원을 벗어나서는 경제적으로 어려움을 격어야만 했다. 실제로 중세시대에 있어서 가장 가혹한 처벌은 파문에 이은 공동체로부터의 추방이었다. 이는 한 개인이 공동체를 벗어나서는 사실상 소외될 수 밖에 없는 환경구조에 기인하는 것이었다. 중세 고립된 장원과 장원을 중세의 고립적인 장원과 장원을 연결해 주는 것은 정기적으로 열리는 교역이었다. 이른바 교역시들이 장원과 장원 사이의 빈 공간을 연결해 주는 고리 역할을 하였다. 교역시는 대부분 강과 강이 연결되는 지점에 설치되었다. 교통의 요지에 설치된 교역소는 얼마안가서 왕과 귀족들에게 상당한 이익을 가져다 주는 것으로 판명되었다. 이 결과 왕과 귀족들은 교역소에 일정한 건물을 세우고 교역시를 자신의 통제권 안에 두려고 노력하였다. 그리고 상인들이 더 많이 모여들어 자신들에게 더 많은 세금을 바치도록 하기 위해 교역시에 많은 특혜를 주기 시작하였다. 이 교역시들이 점차 확대되면서 하나의 도시로 발전하게 된다. 하지만 중세 중기까지 유럽의 도시발전이 미미한 것은 그만큼 아랍세계가 동방과의 무역을 독점하고 있었다는 반증이기도 하다. 유럽에서 도시가 폭발적으로 증가하기 시작하는 것은 십자군 운동이 끝나는 시점이라고 볼 수있다. 동방과의 전쟁을 통해 무역의 노하우를 배운 유럽은 동방을 거치지 않고 자체적으로 무역로를 개설하고자 하였다. 그 대안으로 제시된 것이 발트해에서 러시아를 거쳐 초원의 길로 연결되는 루트였다. 이 결과 동방과의 무역으로 지중해 연안 지역에서 발전되던 도시가 북유럽으로 확장되는 결과를 얻게된다.

도시가 확장되면서 농촌과 도시의 공간적인 심리적 거리가 점점 좁혀지기 시작했다. 이 말은 장원의 자급경제가 서서히 붕괴되기 시작함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장원은 더 이상 자급자족의 체제로 머물러 있을 수 없었다.  도시와 장원경제의 상호의존이 확대되면서 농촌에서 도시로의 인구집중이 시작되었다. 도시는 이전부터 원칙적으로 '일년하고 하루'만 더 머물면 어떤 사람에게도 시민권을 부여하였다. 이런 도시의 관대함은 많은 농노들이 도시로 탈출하게하는 원인이 되었다. 이 결과 장원경제는 급격하게 쇠퇴하기 시작하였다.  마침내 도시의 자유로운 공기가 중세의 시대를 서서히 마감시키고 있었다. 이제 도시를 중심으로한 새로운 부르조아 계급이 탄생하면서 근대로 유럽은 달려가기 시작하는 것이다.

이 책은 도시의 발전과 팽창이 어떻게 중세의 구조를  근대적인 것으로 바꾸어가는가를 추적하는 책이며, 중세 도시 기능을 알 수 있는 책이라고 할 수 있다. 중세 도시에 관한 책은 이외에도 앙리 피렌의 책이 나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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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사진사 - 까치시각예술 1
장클로드 르마니 지음, 정진국 옮김 / 까치 / 1993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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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의 위력은 얼마나 강력할까? 


작가들의 눈과 손에 의해 한 시대의 한 순간이 찍힘으로서 역사의 나이테에 하나의 눈금이 첨가되는 것이다 그 기록의 순간은 역사의 움직임을 완벽하게 냉동시키는 작업과 같다. 이 냉동된 역사를 수십년이 지난 뒤에 해동시켜 현실로 다가오게 하여도 사진의 현실감은 전혀 손상되지 않는다. 물론 재생이라는 의미가 정치적으로 해석될 때 왜곡의 소지는 있지만 말이다.


비례와 사실이 지배하는 사진은 순간의 고정점을 확대 재생산하는 장점을 지니고 있다. 사진의 고정점은 상상력의 시작이며 현실의 가장 끄트머리에 위치한다. 여기에 오성과 감정이 겹쳐지면서 상상의 산물이 역사의 힘을 갖게되는 수학적이며 논리의 세계로 변모하기도 한다. 그럼에도 사진은 점점 현대인들의 눈 에서 멀어지고 있다. 상상력과 감각이 결합된 형태로 다가오는 사진의 세계는 이탈리아의 감독 미켈란젤로 안토니오니의 '확대Blow-Up'과 유사한 세계라 할 수 있다. 지금은 뚱뚱해진 데이비드 헤밍스와 언제나 아름다운 바네사 레드그레이브스가 주연한 이 영화는 20세기의 걸리버 여행기를 연상시킨다.


1930년대 독일의 아우구스트 잔더는 '우리 시대의 초상'이란 사집집을 통해 그가 숨쉬고 살았던 30년대의 온갖 모습을 객관적인 눈으로 기록하였다. 잔더는 냉철하게 자신이 가질수 있는 주관적인 감정을 엄격하게 배제시킨 채  자신의 모델들을 '이미지'로 고정시켰다. 이 결과 그의 사진은 우리들의 눈에 친숙한 것과 친숙하지 않은 대상들까지도 새롭게 보이는 힘을 발휘하였다.  그의 사진 속에 나타난 여러 직업군의 인물상은 그가 얼마나 객관적으로 그 시대를 보려고 했는지 알려주는 증표인 것이다. 이와는 반대로 벤 샨, 도로시어 랭 워커, 에반스 아서 로스스타인, 러셀 리와 같은 일군의 작가들은 미국의 30년대를 의도적으로 냉철하게 바라봄으로서 대공황의 비참함을 확대하였다. 그들은 무려 27만장의 사진을 찍어 대공황이 휩쓸고 지나간 미국의 중서부지대를 보여줌으로서 루즈벨트의 '뉴딜'이 나오게 하는 힘을 발휘하기도 하였다.


사진이 정말 내 주변에 가까이 있다는 것을 처음 느낀 것은 대학시절 알프레드 스티글리츠의 사진 한 장이었다. 말이 마차를 끌면서 허연 입김을 내뿜고 있는 단순한 사진이었다. 그 사진은 서울역 앞 광장의 모습을 연상시켰다. 60년대만 하더라도 이 역 앞 광장은 마부와 지게꾼들이 차지하고 있었다. 특히 마부들의 겨울철 모습은 언제나 내게 호기심의 대상이었다. 커다란 드럼통을 반으로 잘라 장작불을 피우고 그 주위에 모여있던 마부들. 허리춤에는 짧달막한 말채찍을 감아 넣고 담배를 피우고 있는 모습.  그들의 입에서 나오는 담배연기인지 입김인지 모를 허연 김과  마대자루를 등에 덮고 푸 푸 거리는 조랑말의 등에서 피어오르더 아스라한 아지랑이. 이런 것들이 어우러져 서울역 앞 광장은 항상 무엇인가 살아 움직이는 것처럼 느껴졌던 그 광경이 떠올랐다. 그 추운 겨울철에 왜  서울역 광장만은 활기가 넘쳤는지. 그때 사진이란 사진관의 통속한 전시물이나 작가연하는 사람들이 말하는 예술의 어려움도 아니란 사실을 알 수 있었다. 그시간의 공간이 너무 넓었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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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세의 결혼 - 기사, 여성, 성직자
조르주 뒤비 지음, 최애리 옮김 / 새물결 / 1999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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즁세 유럽에서는 처와 동거녀란 단어를 엄격하게 구분하여 사용하였다. 이는 사회적 규범과 교회의 윤리규범이 상충하기 때문에 발생한 필연적인 결과였다. 교회의 성사Sacramentum에 의해 치뤄진 결혼만이 합법적인 것이며 그 결혼의 당사자인 남자와 여자는 정식 부부로 인정되었다. 반면 일반 사회에서는 많은 사람들이 교회의 절차를 거치지 않은채 사실혼의 관계로 살고 있었다. 이런 것은 교회의 입장에서 본다면 결혼이 아니었다. 하지만 교회도 이런 상황을 어떻게 할 수 없었다. 다만 교회는 귀족들의 축첩문제에 대해서만  '귀족이 동거녀를 버리고 합법적인 결혼을 하는 것은 중혼이 아니다'라는 애매모호한 해석을 내리며 핵심을 교묘히 피해가고 있다.

중세 유럽에서 동거녀 제도는 귀족들이 가문의 명예를 훼손시키지 않는 범위내에서 젊은이들의 성적방종을 규제하기 위해 사용되었던 방법이었다. 그런데 이 과정에서 아이가 생겼을 경우 여기서 태어난 아이들은 적자들 보다 유산을 청구할 권리가 제한되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즉 한 귀족이 동거녀와 관계를 청산하고 다른 여자와 합법적인 결혼을 했을 경우 태어난 아이들의 유산상속 우선순위는 합법적 결혼에서 태어난 아이들이 우선 순위를 차지하였다. 프랑스의 샤를마뉴도 네 명의 합법적인 아내-한 명은 소박맞고 다른 세 명은 일찍 죽었다-를 맞아들였음에도 불구하고 홀아비 시절에는 여섯 명의 여자들과 동거관계를 맺고 있었다. 하지만 이들 동거녀에게서 태어난 자식들은 806년 샤를마뉴의 왕국을 분배할 때 참여할 수 없었다. 하지만 당시에는 이런 관행으로 태어난 자식들을 비난하거나 불신하지는 않았다. 당시 대다수의 귀족들은 합법적인 결혼보다 동거에 의해 태어난 경우가 많았기 때문이었다.

이런 동거형식을 10-11세기 프랑스 북부에서는 '데인식 결혼'이라고 불렀다. 이는 바이킹의 침입에 의해 널리 확산되었기 때문이었다. 교회의 노력에도 이런 비공식적인 결혼관행이 쉽게 없어지지 않았던 것은 귀족들의 이익에 따른 것이었다. 젊은 귀족들이 여행이나 모험을 통해 타지역에서 자신의 마음에 드는 규수를 데려오면 가문의 연장자들은 일단 동거를 시켜놓고 이 여자가 자신의 가문에 얼마나 많은 이익을 줄것인지를 면밀히 관찰한 다음 여자측과 협상하는 것이 일반적인 관례였다. 여기서 여자가 남자의 가문에 이익을 줄 수있다고 판명되면 그 여자는 합법적인 처의 위치로 승격될 수 있었지만 그렇지 못하면 동거녀로 만족해야 했다. 그러므로 당시의 관습으로 볼 때 여자가 한 남자의 처가 된다는 것은 남자의 가문에 편입되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당시 중세 유럽에서 왜 이렇게 교회는 합법적인 결혼에 관심을 보였느냐는 것이다. 이것은 바로 세속의 권력과 敎權의 투쟁의 결과였다. 즉 세속의 법과 교회의 법 가운데 어느쪽을 상위에 두느냐에 따라 사회지배의 형태가 달라지기 때문이었다. 교회는 그리스도교적 관점에서 전통적으로 교회가 사회를 주도해 왔다는 점을 제시하며 교회법의 우위를 주장한 반면, 세속의 권력자들은 실제적인 권력의 행사라는 점을 들어 세속의 법이 우위에 있음을 강조했다. 결국 이들의 대립은 평행선을 그을 수 밖에 없었고, 결국 신성로마제국의 하인리히 4세와 그레고리우스 대교황의 대립으로 정점에 다다랐다. 그리고 교회가 승리하는 것처럼 보였지만 세속권력은 여전히 교회의 맞은편에 강력한 경쟁자로 존재하고 있었다. 이들의 권력을 향한 싸움의 결과는 어찌되었건 간에 중요한 것은  교회는 자신이 원하던 것을 얻었고, 세속권력 또한 자신들이 교회를 언제든지 요리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는 점이다. 이런 사실은 잉글랜드의 헨리 8세가 이혼을 거부당하자 로마와의 관계를 끊어버리고 자신만의 국교회를 만든 것만 봐도 당시의 세속권력이 교회의 법을 어떻게 생각했는지를 알 수 있을 것이다. 교회 또한 파문만이 능사가 아님을 잉글랜드가 로마에서 떨어져 나감으로서 확실하게 깨달을 수 있었다.  결국 유럽의 역사에서 세속권력은 <실정법>을 교회는 <양심법>을 선택할 수 밖에 없었다. 물론 그 사이의 경계에는 세속의 신민들과 하느님의 자녀들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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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탈된대지 - 범우사상신서 40 범우사상신서 40
애두아르도 갈레아노 지음 / 범우사 / 1988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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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아메리카의 전체 모습을 보면 '먹음직한 닭다리'가 연상된다. 남미 대륙은 이런 모습처럼 천혜의 자원이 뭍혀있는 자원의 보고이다. 그래서 일찍이 서구 제국은 이곳을 식민지로 경영하면서 맛있는 살을 발라 먹었다. 그들이 수백년간 발라 먹었음에도 불구하고 남미는 아직도 자원의 보고로 남아있다. 제국주의자들은 이 광활한 대지를 이 땅의 주인이었던 인디오의 피로 물들이며 자신들의 배를 채웠다. 그들의 피뭍은 손은 오셀로의 독백처럼  '온 대양을 핏빛으로 물들일 정도'였다. 그들은 이 피의 값으로 산업혁명의 기반을 마련하여 부의 편중을 더욱 심화시켰다. 지금 문제가 되고 있는 '남과 북의 격차'는 벌써 이때부터 벌어지기  시작하였던 것이다. 


제국주의자들은 남미 제국이 독립을 한 뒤에도 자신들의 욕심을 포기하지 않았다.  그들은 거대한 산업자본을 무기로 남미의 자원을 계속적으로 수탈했고, 군사정권을 물심양면으로 지원함으로서 자신들의 이익이 영속적으로 지속되기를 원했다. 합법적인 투표를 통해 정권을 잡았던 사회주의자 살바도르 아엔데의 비극은 자국의 이익을 위해서는 국제정치질서마져도 무시하는 제국주의자들의 모습을 볼 때 남아메리카의 서구제국에 대한 종속의 뿌리가 깊음을 알 수 있다. 이런 좌절의 토양이 해방신학을 낳게했으며 남미를 혁명의 시험장으로 만들게한 원인이었다.


남아메리카의 구조적 모순은 열강의 끊임없는 간섭에 기인한다. 다국적기업을 전면에 내세운 구미 열강들은 남미 각국의 지배 세력과 결탁하여 자신들의 배를 불리고 있다. 지배 세력은 자신들의 정권을 보장하는 조건으로 막대한 자원 채굴권을 헐값에 넘기고, 열강들은 이 원료를 자신들의 공장으로 가져가 상품을 만들어 다시 남미로 수촐하는 새로운 삼각무역을 하고 있는 것이다. 이 결과 남미에서는 자생적인 기업이 생겨날 수 없는 원인이 되었다.  


거머리는 숙주에 달라붙어 흡반을 고정시킨 다음 '히루딘'이란 물질을 분비하여 피가 응고되지 못하게 하면서 천천히 자신의 배가 불러올 때까지 피를 빨아댄다. 이 과정에서 피를 제공하는 숙주는 아무런 고통을 느끼지 못한다. 남아메리카의 고통 역시 이와 유사하며 영원히 지속될 것만 같다는 점에서 그러하다. 그러나 안타까운점은 그 고통이 좀처럼 개선될 수 없다는데 있다.  이것은 제도의 문제가 아니라 의식의 문제이기 때문이다. 민중들이 축구와 축제의 뒤편에 어떤 심리적 환각제가 숨겨져 있는지를 파악할 때 남아메리카의 역사는 새롭게 시작될 수 있을 것이다. 이런 점에서 아직 남아메리카의 절개된 혈관은 아물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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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안의 파시즘
임지현.권혁범 외 지음 / 삼인 / 2000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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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건 프리만이 조연을 맡은 '쇼생크 탈출'이란 영화의 후반부에 이런 대목이 나온다. 거의 인생의 황혼기에 가석방되어 잡화점 점원으로 취직한 뒤 생기없는 삶을 살아가는 '레드(모건 프리만 분)'가 '나는 허락이 없다면 화장실도 갈 수 없는 존재'라고 읊조리는 장면이 나온다. 규율화된 집단 속에서 일생을 보낸 사람의 넋두리라고 하기에는 너무 끔찍한 이야기라고 생각되는가? 천만에 군대 체험을 한 사람들이 제대한 후에도 얼마동안은 자신의 일거수 일투족을 부모나 친구에게 보고하고 있는 자신의 행위에 놀란적이 없는가? 있다면 당신은 파시즘이란 커다란 강에 세례를 받은 것이다.


파시즘은 제도가 아니라 초정치적 현상이라고 할 수 있다. 왜냐하면 파시즘은 독단과 맹종만을 강요할뿐 자신을 규제하는 어떤 이론이나 규범도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파시즘은 오직 폭력에 의거한 공포정치를 통치수단으로 삼고 있을 뿐이다. 파시즘은 이런 폭력적 성향 때문에 끊임없이 내부의 문제를 외부로 확산시키려 노력한다.  파시즘은 끊임없이 전통과 단절을 외치면서도 빈약한 권위를 보충하기 위해 속으로는 전통과 야합한다. 스페인의 독재자였던 프랑코는 자신이 정권을 잡은 순간 쫒겨난 왕의 손자를 자신의 후계자로 지명한 사실은 파시즘과 전통과의 유대관계가 어떤 속성을 갖고있는지 잘 보여주는 사례라고 할 수 있다. 파시즘은 기회주의적 성격을 가지고 있다. 노동자들에게는 자본주의자들의 착취에서 벗어나게 해주겠다고 공약하고, 중소기업가들과 만나서는 대기업을 공격한다. 농민들에게는 도시의 거대화와 타락을 이야기하며 모든 계층에게 자신이 진정한 친구라고 읊어댄다.


우리 안으 파시즘은 바로 이런 환경 속에서 키워진 마음속의 파시즘을 고발하고 있다. 지연, 혈연, 학연이라는 우리 사회의 절대 무너질 수 없는 체제는 바로 심적 파시즘의 원천이며 고향인 것이다. 이는 패거리 문화를 양산하고 이 문화는 거대한 획일주의로 나아가기 때문이다. 우리는 졸업식장에서 '앞에서 끌어주고, 뒤에서 밀며....'라는 노래를 부르며 한단계씩 진화한다. 그러나 그 진화는 집단주의와 획일화로의 퇴보라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드믈다. 그것은 파시즘이 하나의 일상이 되어 버렸기 때문이기도 하다.


파시즘 사회 속에서 여성의 역할은 미미하게 드러난다. 이 사실은 우리나라가 OECD 32개국 가운데 여성의 취업률이라든가 여성의 사회적 지위와 같은 부분에서 하위에 속해있음이 증명하고 있다. 나치독일이나 군국주의 일본의 파시즘 체제에서 여성은 아이를 낳고 양육하고 자식의 전사 통지서를 받고도 의연하게 대처하는 어머니의 역할만을 강요받았다. 여성이 온전한 인간이 아니라 반쪽의 지위에 머무는 사회, 그 사회도 역시 파시즘의 사회인 것이다.


허락을 받지 못하면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사회는 명령과 복종만이 존재하는 사회이다. 선배는 후배에게 상관은 졸병에게 남자는 여자에게 가진 자는 없는 자에게 명령하는 사회는 인간적 존엄성이 무시되는 사회이다. 명령을 내리는 자는 명령을 받는 자에게 인격적 모욕을 다반사로 내뱉으며 그것을 자신의 지위에 오를 사람에게 전수한다. 이는 남성의 문제만이 아니다. 여성들도 자신들의 폭력성을 시어머니가 며느리에게 전수하고, 아들을 일방적으로 감싸는 가정을 구성하면서 파시즘이 우리 사회의 가장 핵심적인 곳에까지 미치도록 협조한 조력자들이다.


우리 사회가 히드라의 머리와 같은 파시즘의 망령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해서는 제도의 개혁이 아니라 의식의 개혁이 우선되어야만 한다. 인간성이 변하지 않는 제도의 변화는 몸통은 그대로 있고 머리만이 새로 돋아난 히드라일 뿐이다.  히드라의 몸통을 눌러 놓기 위한 커다란 바위는 우리 의식의 몫이 되는 것이다. 왜냐하면  파시즘은 인간의 존엄성, 자유, 민주주의, 이성을 두려워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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