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비 딕 - 하 열린책들 세계문학 215
허먼 멜빌 지음, 강수정 옮김 / 열린책들 / 2013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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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비딕은 분량 만큼이나 오해의 소지가 있는 작품이다. 사람들은 고래잡이의 이야기가...라는 선입견을 가지고 소설 전체를 바라보는 것을 거부할 수도 있다. 그만큼 이 소설은 부분이 전체를 갉아먹은 대표적인 책이라 할 수 있다.

멜빌의 시대에 고래는 풍부한 자원이었다. 하지만 지금 고래는 멸종위기에서 벗어나려 애를 쓰고 있는 중이다. 고래는 아메리카 대륙의 들소처럼 잡아도 잡아도 고갈되지 않는 자원처럼 느껴졌던 시절이었다. 그래서일까 고래에 대한 경외감은 없다. 오직 고래에 대한 정복욕만이 있을 뿐이다. 정복은 확장이다. 아메리카 대륙의 들소를 바라보는 인디언과 백인의 시각이 다른 것처럼 고래를 향한 아메리카의 벌거벗은 모습을 볼 수 있다. 인디언에게 삶의 자원인 들소가 백인들에게는 모피 한 장으로 계산된다. 고래 역시 마찬가지이다. 바다의 제왕이었던 고래는 해체되어 윤활유나 등불의 기름으로 변환될 뿐이다. 이 순진한 바다의 제왕에게 면죄부를 줄 수 없다. 오직 희생의 원인만을 제공해야 할 뿐이다. 결국 백색의 공포로 과장된 이 동물은 인간을 위해 희생되어야만 하는 필연성을 강조한다. 아메리카 미국에게 바다는 대륙과 마찬가지의 세계였다. 윌리엄 와일러 감독의 대서부란 영화를 보면 해양 사나이 그레고리 펙이 서부에 도착하여 광할한 서부를 마차로 달릴 때 마부가 물어본다. 이렇게 크고 광할한 곳을 본 적이 있냐고. 마부의 자부심은 신사가 봤다고 했을 때 이해할 수 없는 표정을 짓는다. 마부는 묻는다. 어디냐고. 신사는 대답한다. 바다라고.  아메리카 대륙에 상륙한 백인들이 서쪽으로 나아가면서 열차로 상징되는 과학을 강조하였다. 이 과학 앞에 인디언과 들소는 방해물이었다. 그래서 백인들은 과학으로 대륙의 전설인 인디언과 들소를 도륙하려고 작정하였다. 이 결과 백인이 들어오기 전 6천만 마리가 넘던 대륙의 들소는 1천 마리 정도로 줄어들게 되었다. 들소의 학살로 이를 주식으로 삼던 인디언들은 저항 다운 저항도 해보지 못하고 덤으로 역사에서 사라졌다. 고래 역시 대서양에서 태평양으로 확장해 나가던 아메리카에게 꼭 필요한 대상이었다. 기계를 돌리고 거리를 밝히는 문명을 위해 바다의 전설은 사라져야만 했다. 다만 이 광할한 바다에는 인디언이 없었기에 이를 대체할 증오의 표적이 있어야만 했다. 그것은 흰색으로 대표되는 공포와 두려움이었다. 거대한 흰색의 공포를 정복해야만 하는 필연은 과학과 문명 앞에서 다시 각색되어야만 했다.

산업사회가 성숙되어 가면서 기계를 움직이기 위해 필요한 윤활유는 고래기름과 야자유를 거쳐 석유로 이어지게 되고 유럽의 식민주의는 완성되어 간다. 자본주의의 완성에서 희생자는 고래가 아니다. 고래는 문명의 성장을 위해 필요한 도구일 뿐이다. 이 도구를 얻기 위해 바다로 나아가는 이스마엘로 대표되는 모험가들이 희생자가 되는 것이다. 모험가는 역설적으로 바다의 역습에서 식민지 세계의 원주민이 만들어 놓은 관을 구명보트 삼아 살아남고 다시 바다로 나아갈  수 있는것이다. 불행하게도 순환의 끝은 마지막이 아니라 처음이다. 이 탐욕의 확장은 고래에서 끝나지 않는다. 고래-황마-커피-코코아-면화-석유.... 모든것의 끝은 언제나 "나의 이름은 이스마엘(방랑자)이다"로 끝나며 시작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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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틀 드러머 걸 판타스틱 픽션 골드 Gold 4
존 르 카레 지음, 조영학 옮김 / 알에이치코리아(RHK) / 2014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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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치는 작은 소녀는 슬픈 이야기이다. 가해자와 피해자는 동일한 고통을 공유하고 있다. 땅이 없이 유랑하던 유대인들은 나치의 탄압을 받으며 팔레스타인에 들어왔고, 이들은 팔레스타인에 정주해 있던 사람들에게 자신들이 당한 고통을 그대로 전수한다. 즉 가해의 전도가 일어난 것이다. 이 가해의 전도로 부터 팔레스타인의 고통은 시작되는 것이다. 

유대인과 팔레스타인 사람들은 처음부터 적대적이었을까? 이 두 집단은 이 좁은 땅에서 영원히 공존할 수 없는 것일까? 땅이 없던 민족과 국가가 없던 민족이 땅을 차지하기 위해 국가를 만들기 위해 싸우면서 두 민족은 화해할 수 없게 되었다. 화해할 수 없는 두 집단은 서로를 죽이며 정당성을 인증받으려 하였다. 두 집단이 폭력에 의존할 수록 그들의 윤리성을 심각한 타격을 받았다. 윤리성이 부서진 자리에 남겨진 것은 무엇일까? 그것은 타락이었다. 
정당한 대의를 위한 폭력에 응징은 또 다른 정의라고 확신하는 두 집단은 서로 공존했던 과거를 기억하지 않는다. 팔레스타인의 풍요로운 올리브와 무화과 그리고 오렌지와 시원한 우물을 공유했던 시절을 애써 부정한다. 그들이 요구하는 것은 그 공존의 과거를 부정하고 지금 자신들이 주장하는 새로운 현재를 강요하는 것이다. 
현재의 강요를 위한 수단은 폭력이다. 이 폭력은 서로에게 정당화될 수 없다. 그럼에도 두 집단은 그 부당한 폭력을 정당화한다. 이 폭력 사이에 한 인간이 끼여들게 되면서 비극은 시작된다. 두 집단은 끊임없이 자신들의 폭력이 정당함을 중간자에게 강요하고 주입한다. 중간자는 두 집단 사이에서 갈등도 혼돈도 경험하지 못한다. 오히려 두 집단의 프로파간더의 부도덕함을 깨닫게 된다. 두 집단의 부도덕함이 극점에 이르렀을 때 중간자는 자신이 북을 치고 있음을 느끼게 된다. 싸우는 자의 사기를 돋우기 위해 북을 치는 소녀. 과연 그 북소리는 이쪽을 위한 것이었을까 저쪽을 위한 것이었을까. 
먼 옛날 이 비극이 싹튼 땅에서 한 인간이 아들을 데리고 여행을 떠날 준비를 하고 있었다. 그의 이름은 아브라함이었다. 하느님은 그를 시험하기 위해 '너의 사랑하는 아들, 너의 외아들 이삭을 데리고 모리아 땅으로 가서 내가 너에게 지시하는 한 산 거기에서 그를 번제로 드리라'는 명을 받았다....."어린애의 젖을 떼어야만 할때, 어머니는 자기의 유방을 검게 물들인다. 어린애에게 젖을 먹여서는 안 될 때, 어린애가 유방에 미련을 갖게 한다는 것은 잔인한 짓이다. 유방을 검게 물들여 놓으면 어린애는 그 유방이 달라졌다고 믿는다. 그러나 어머니는 여전히 어머니이고, 어머니의 눈길은 여전히 인자하고 부드럽다. 자식의 젖을 떼기 위하여 이런 무서운 수단을 쓸 필요가 없는 자는 복이 있을지어다." 쇠얀 키에르케고어의 공포와 전율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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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의 용광로 - 유럽을 만든 이슬람 문명, 570~1215 신의 용광로 1
데이비드 리버링 루이스 지음, 이종인 옮김 / 책과함께 / 2010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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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의 용광로는 중세 이베리아 반도의 이야기이다. 이베리아 반도가 아랍의 침공으로 아랍화하면서 전개되는 7백년 간의 역사를 서술한 책이다. 사실 이베리아 반도에 대한 중세의 역사는 그리 많이 알려져 있지 않다. 솔직히 무지하다고 보는 편이 타당할 것이다. 우리는 현재의 스페인이 아주 오래 전부터 존재했고, 존재하고, 존재할 것이라고 단순하게 생각한다. 이런 우리의 생각을 이 책은 많은 부분에서 수정하고 있다.  

이 책에서 크게 다루는 두 가지 사건은 푸아티에 전투와 론세스바예스의 이야기이다. 하나는 아랍이 피레네 산맥을 넘어 유럽으로 진출하려다 저지당한 사건이고, 다른 하나는 유럽이 피레네를 넘어 이베리아로 진출하려다 패배한 사건이다. 이 두 사건이 이 책의 큰 흐름을 구성하고 있다. 영국의 역사가인 에드워드 기번은 로마제국흥망사에서 푸아티에 전투를 유럽을 구한 엄청난 사건으로 묘사하고 있다. 기번은 만약 유럽이 아랍의 침공에 맞서 푸아티에에서 패배하였다면 유럽의 현재는 코란과 뮤에진의 기도알리는 소리로 뒤덮였을 것이라고 가정한다. 이런 가정은 렌 데이턴이 히틀러가 영국 침공에 성공하였다면 어떠하였을까하는 가정에서 쓴 추리소설과 흡사한 것이라 할 수 있다. 그리고 다른 하나는 칼 마르텔의 이베리아 침공에서 벌어진 비극을 극대화한 로랑의 노래에 나오는 론세스바예스 사건이다. 칼 마르텔이 푸아티에 승리 후에 이베리아 반도로 침공한 이 사건은 패배의 기록이었다. 그럼데도 유럽 사가들은 이 사건을 비극적 위대한 패배로 기록하였다. 사실 이 사건은 무모함과 무질서의 결과로 이루어진 패배였지만 이를 유럽인들은 극적인 사건으로 왜곡함으로서 현재의 유럽을 규정하는 사건으로 만들었다.  

유럽인들은 푸아티에 전투를 유럽을 구한 전투로 묘사하고 론세스바예스의 패배를 장엄한 비극으로 설명한다. 여기에는 타협이 존재하지 않는다. 오직 무찌르고 살륙하고 승리하는 유럽만이 존재한다. 론세스바예스의 패배는 제국주의 시대의 카르툼의 고든인 것이다. 야만에 대적하는 문명의 숭고한 일시적 패배.  

저자는 이 두 사건을 제시한 다음 용광로라는 주제로 접근한다. 과연 아랍과 유럽은 푸아티에의 승리과 론세스바예스의 승리를 어떻게 활용하였는가? 저자는 아주 간단하게 답하고 있다. 유럽은 극대화 했고, 아랍은 무시했다고.  

유럽이 푸아티에의 전투를 극대화하면서 인종의 용광로인 유럽대륙을 기독교화 하는데 어떻게 했는지 묘사하고 있다. 무자비한 살륙과 복종만을 강요하였다고 저자는 말한다. 반면 론세스바예스의 승리로 유럽의 진출을 저지한 아랍은 이베리아 반도에서 어떤 정책을 시행하였을까. 그것은 콘비벤시아convivencia-협동-였다. 이 책을 읽다보면 유럽보단 아랍이 자신들의 도가니에 모든 것을 융합시켰다는 것을 느낀다. 오히려 유럽은 이 시기에 프랑크의 칼 마르텔이 중부유럽의 이교도를 개종하던 야만적인 방법을 그대로 답습하여 미래의 제국주의를 탄생시켰다는 점이다.  

사실 아랍과 유럽의 대결에서 아랍의 콘비벤시아는 여러곳에서 드러난다. 살라딘의 예루살렘 점령후에 보여준 관용적인 태도는 십자군이 예루살렘을 점령하였을 때 보여준 모습과 극명하게 대비된다. 사실 아랍의 콘비벤시아가 이베리아 반도에 정착하고 제대로 뿌리를 내렸다면 현재의 유럽은 피레네와 라인강 사이에 존재하는 미미한 모습이 되었을지도 모른다.  

이 책은 번역자가 말했듯이 다수의 지지를 받는 학설이 아니라 소수가 주장하는 새로운 학설이다. 그럼에도 그 호소력은 현재의 기독교와 이슬람의 갈등이 최고로 고조된 이 순간 큰 호소력을 갖고 있다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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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01-30 22:44   URL
비밀 댓글입니다.
 
흑단 - 카푸시친스키의 아프리카 르포 에세이
리샤르드 카푸시친스키 지음, 최성은 옮김 / 크림슨 / 2010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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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프리카의 비극은 그 다양함과 복잡함을 서구의 제국주의자들이 50여개의 단순한 국경선을 통해 획일화 시킨 데서 비롯된다. 그렇다고 아프리카 대륙이 강력한 정치력이 있어 유럽이나 미국처럼 하나의 가치를 공유하는 체제-이를테면 아프리카합중국USA-를 지향하기를 기대하는 것도 무리이다. 솔직히 아프리카의 역사는 사하라 이북의 북아프리카를 제외하고는 문자를 가져본 적이 없djT다. 그러기에 그들의 역사는 구전의 역사이며 기억의 역사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서구인들의 관점이 개입되었을 때 아프리카는 무지한 세계이며 검은 땅이고 교화의 대상이 된다. 이는 문자가 정신을 압도한 유일한 예외라할 수 있다.  

흑단의 시작은 가나에서부터 시작된다. 가나는 아프리카에서 가장 먼저 독립한 국가이다.(그 이전 거대한 대륙의 독립국은 에티오피아, 리베리아, 남아프리카공화국뿐이었다. 나머지 땅은 영국, 프랑스, 포르투갈, 독일, 벨기에, 이탈리아의 소유였다.) 가나의 국기에는 아프리카를 상징하는 검은 별이 그려져 있다. 그 검은 별은 독립의 영웅 응크루마의 원대한 꿈이면서 아프리카의 희망이었다. 하지만 그 꿈은 사그러졌고, 별은 희망이 아니라 절망으로 전락하였다. 그리고 마지막은 아프리카의 가장 마지막 독립국인 에리트리아에서 끝난다. 저자는 여명의 새벽에 바오밥나무에 기대어 아프리카의 히미함을 바라본다. 바오밥 나무의 전설을 아는지... 하늘의 신이 그 나무를 거꾸로 심었다는 전설이 그것이다. 그래서 바오밥 나무의 윗부분은 뿌리처럼 보인다. 그래서일까, 이 책은 가나에서 시작해 에리트리아서 끝나는데 마치도 바오밥 나무처럼 구성된 것처럼 보인다. 마지막 장면 에리트리아의 그 히미한 여명은 아프리카의 시작을 알리는 가나의 그 강렬함과 희망 그리고 열정과 비교가 된다. 저자는 아프리카의 시작과 희망, 좌절을 그리고 변질되는 문명을 서구인의 입장이 아니라 그들의 친구의 눈으로 세심하게 그려간다. 비아프라, 콩고에서 드러나는 서구제국주의의 원죄와 리베리아에서  흑인 아프리카의 좌절이 생생하게 전달된다.  

아프리카는 원래 무지한 것이 아니라 서구의 논리에 의해 왜곡되었을 뿐이다. 저자는 이 왜곡의 모습을 정확하게 알리고자 노력한다. 하지만 그 왜곡을 벗어나기 위해 아프리카 자신도 알고, 배우고, 전진해야함은 분명한 사실이다. 모든 아프리카의 좌절이 서구 제국주의라고 규정한다면 아프리카는 원래 고유의 모습이 없다는 것을 자인하는 골이 되고 말테니까, 즉 서구의 고정관념인 암흑의 대륙이라는 그 낙인에서 벗어날 수 없다는 점이다. 원래 아프리카는 그곳에 태초부터 있었다. 다만 우리가 생각하는 방식과 다르게 존재하고 있었을 뿐이다. 그 존재방식을 우리들이 이해하려 하지 않았기 때문에 아프리카는 무지하게 생각될 뿐이다. 하지만 그곳은 결코 그렇지 않다는 점이다. 아프리카는 서구제국주의에 의해 뼈와 살과 피를 절도당했음에도 불구하고 그 본질은 결코 포기되어진 적이 없다. 그 본질은 지금도 그 대륙에 흑단처럼 존재하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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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리네 디트리히, 세레나 허...!!!...???

검은 벨벳커튼이 드리워진 어두운 무대, 담배연기 자욱한 무대, 조명이 검은 벨벳커튼을 비추면 실크햇에 연미복, 그리고 원피스 수영복을 입은 가수가 검은 벨벳커튼을 가르고 나온다. 그리고 저음의 허스키한 목소리로 '릴리 마를렌'을 부른다.  

밝은 무대, 조잡한 커튼, 그 빨강색이란... 조명도 없다. 다만 사회자가 말할 뿐이다. '전직 에로 배우 세레나 허...'빨간 커튼이 갈라지고-성적인 의미일까-베티붑처럼 차린 타이트한 가수가 나온다. 그리고 저음의 목소리로 '어린 송아지가..'를 부른다.  

디트리히는 자신이 윈치 않아도 하나의 '섹스'로 다가왔다. 그것은 갈망이었고, 환상이었다. 세레나 허는 자신이 원한다해도 결코 '섹스'의 이미지는 갖지 못할 것이다. 세레나 허의 신음 소리는 섹스라는 단어 대신 즐거움의 웃음이 된다. 하지만 디트리히의 단어 하나 하나는 자신이 원하지 않아도 '섹스'가 된다.   

마리네 디트리히와 세레나 허를 가르는 경계점은 무엇일까? 여기서 또 하나의 절대적인 문구가 읊어진다. '두려움!!!!'.  

릴리 마를렌은 다양한 형식으로 불리워졌다. 애닮은 곡조, 군가의 행진곡, 폴카, 왈츠... 등등등. 이렇게 다양하게 릴리 마를렌이 불려진 이유는 무엇일까. 그것은 두려움이 다양했다는 증거가 아닐까. 두려움은 다양함을 하나로 통합시킨다. 그것은 하나의 목소리. 하나의 상징으로 통합된다. 그리고 그 다양함을 하나로 왜곡 혹은 착각하게 만든다. 그만큼 두려움은 하나의 상징을 원하는지도 모른다. 그 갈망은 무엇이었을까? 전쟁의 와중에서 병사들이 원했던 것은 무엇일까? 정말로 그들이 원했던 것은 '섹스'였을까? 그래서 마를렌 디트리히의 목소리를 그리워한 것일까? 그것밖에 없을까?  

우리에게도 이와 비슷한 경험이 있다. '김세원의 밤의 플렛트 폼'이란 방송을 들어본 적이 있는지... 늦은 밤 김세원씨의 목소리는 우리 군바리들에게는 하나의 '수줍은 섹스'였다. 무엇 때문에... 여성의 목소리 하나가 그렇게 강한 힘을 발휘할 수 있다고... 아니 그것보다 더 큰 위력을 발휘할 수 있다는 점이 문제인 것이다.  

세레나 허의 목소리는 디트리히와 유사하지만 듣는 사람을 파괴시킬 힘을 갖지 못하고 있다. 그것은 철저히 자신을 개그화함으로서 '섹스' 혹은 '어머니'의 상상을 차단하고 있기 때문이다. 반면에 디트리히는 '섹스'라는 이미지를 극대화하여 그 자체를 무화시키다. 그리고 그곳에서 '어머니' 혹은 남성의 영원한 우상인 '구원의 여인'을 구현하고 있다. 디트리히는 자신이 원치않았지만 릴리 마를렌을 통해서 하나의 아이돌로 해석된 것이다. 디트리히는 마돈나이고, 창녀이며 어머니이고 여동생이며 애인인 것이다. 그러나 세레나 허는 우리의 확대해석을 원천적으로 차단하고 있다. 세레나 허는 자신을 비우지 않고 특정한 상상으로 왜곡해서 보여지기를 원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리는 세레나 허를 보면서 왜곡의 잔상을 읽고 그것 때문에 웃는 것이다. 하지만 디트리히는 그것을 용납하지 않는다. 철저하게 자신을 무화함으로서 해석의 여지를 남기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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