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리네 디트리히, 세레나 허...!!!...???

검은 벨벳커튼이 드리워진 어두운 무대, 담배연기 자욱한 무대, 조명이 검은 벨벳커튼을 비추면 실크햇에 연미복, 그리고 원피스 수영복을 입은 가수가 검은 벨벳커튼을 가르고 나온다. 그리고 저음의 허스키한 목소리로 '릴리 마를렌'을 부른다.  

밝은 무대, 조잡한 커튼, 그 빨강색이란... 조명도 없다. 다만 사회자가 말할 뿐이다. '전직 에로 배우 세레나 허...'빨간 커튼이 갈라지고-성적인 의미일까-베티붑처럼 차린 타이트한 가수가 나온다. 그리고 저음의 목소리로 '어린 송아지가..'를 부른다.  

디트리히는 자신이 윈치 않아도 하나의 '섹스'로 다가왔다. 그것은 갈망이었고, 환상이었다. 세레나 허는 자신이 원한다해도 결코 '섹스'의 이미지는 갖지 못할 것이다. 세레나 허의 신음 소리는 섹스라는 단어 대신 즐거움의 웃음이 된다. 하지만 디트리히의 단어 하나 하나는 자신이 원하지 않아도 '섹스'가 된다.   

마리네 디트리히와 세레나 허를 가르는 경계점은 무엇일까? 여기서 또 하나의 절대적인 문구가 읊어진다. '두려움!!!!'.  

릴리 마를렌은 다양한 형식으로 불리워졌다. 애닮은 곡조, 군가의 행진곡, 폴카, 왈츠... 등등등. 이렇게 다양하게 릴리 마를렌이 불려진 이유는 무엇일까. 그것은 두려움이 다양했다는 증거가 아닐까. 두려움은 다양함을 하나로 통합시킨다. 그것은 하나의 목소리. 하나의 상징으로 통합된다. 그리고 그 다양함을 하나로 왜곡 혹은 착각하게 만든다. 그만큼 두려움은 하나의 상징을 원하는지도 모른다. 그 갈망은 무엇이었을까? 전쟁의 와중에서 병사들이 원했던 것은 무엇일까? 정말로 그들이 원했던 것은 '섹스'였을까? 그래서 마를렌 디트리히의 목소리를 그리워한 것일까? 그것밖에 없을까?  

우리에게도 이와 비슷한 경험이 있다. '김세원의 밤의 플렛트 폼'이란 방송을 들어본 적이 있는지... 늦은 밤 김세원씨의 목소리는 우리 군바리들에게는 하나의 '수줍은 섹스'였다. 무엇 때문에... 여성의 목소리 하나가 그렇게 강한 힘을 발휘할 수 있다고... 아니 그것보다 더 큰 위력을 발휘할 수 있다는 점이 문제인 것이다.  

세레나 허의 목소리는 디트리히와 유사하지만 듣는 사람을 파괴시킬 힘을 갖지 못하고 있다. 그것은 철저히 자신을 개그화함으로서 '섹스' 혹은 '어머니'의 상상을 차단하고 있기 때문이다. 반면에 디트리히는 '섹스'라는 이미지를 극대화하여 그 자체를 무화시키다. 그리고 그곳에서 '어머니' 혹은 남성의 영원한 우상인 '구원의 여인'을 구현하고 있다. 디트리히는 자신이 원치않았지만 릴리 마를렌을 통해서 하나의 아이돌로 해석된 것이다. 디트리히는 마돈나이고, 창녀이며 어머니이고 여동생이며 애인인 것이다. 그러나 세레나 허는 우리의 확대해석을 원천적으로 차단하고 있다. 세레나 허는 자신을 비우지 않고 특정한 상상으로 왜곡해서 보여지기를 원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리는 세레나 허를 보면서 왜곡의 잔상을 읽고 그것 때문에 웃는 것이다. 하지만 디트리히는 그것을 용납하지 않는다. 철저하게 자신을 무화함으로서 해석의 여지를 남기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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