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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제스 평전 - 현대 중국의 개척자
조너선 펜비 지음, 노만수 옮김 / 민음사 / 2014년 12월
평점 :
蔣介石, 장개석, 장카이섹, 장제스. 그의 이름 표기 만큼이나 복잡한 인물이었다. 소금장수의 유복자로 태어나 한 국가의 최고통수권자Generalissimo가 되고 결국 최후의 순간 모든 것을 잃어버린 인물. 그에 대한 평가는 과정이 아니라 결과로 집결된다. 그의 경쟁자 모택동 역시 과정이 아니라 결과로 평가되듯...
장개석의 성공과 실패는 중국이라는 거대한 대륙이 있었기에 가능하였다. 공간의 포기하는 대신 시간을 소유하고자 한 전략은 불가피한 선택이었다. 그는 시간은 자신의 편이라고 생각하였다. 1937년 상해 전투는 장개석의 이런 관점을 잘 보여준다. 일본군이 석 달 안에 중국을 점령할 수 있다고 호언하자 '그렇다면 석 달 만 싸워보자'고 담담하게 말하며 일본과 싸움을 시작하였다. 상해에서 국민당군의 집요한 저항은 일본을 놀라게 했다. 이에 일본은 남경을 점령하면서 중국의 저항의지를 꺽기위해 잔혹한 학살을 저질렀다. 그의 이런 여유로움과 집요한 저항은 무수한 중국의 청년들을 죽음으로 몰아넣었지만 결국 연합국의 일원으로 인정받고 승리자가 되게 하였다.
그가 공간보다 시간에 집착했던 이유는 전쟁 후에 발생할 중국의 분할 때문이었다. 연합국 -미국과 영국-은 중국도 독일과 베트남, 한국처럼 양분할 뜻도 있었다. 소련 역시 원자폭탄을 가지고 있던 유일한 강대국 미국과의 직접적인 대결을 회피하기 위해 양자강을 중심으로 중국이 남북으로 분단되는 것도 용인할 의지가 있었다. 장개석은 미국과 소련의 이런 의중을 알고 있었기에 줄기차게 저항하였다. 미국은 태평양 전쟁 동안 중국의 군 지휘권을 빼앗기 위해 노력했지만 장개석은 노련하게 이 제안을 거부하였다. 미국은 중국의 군사 지휘권을 장악하여 자신의 의도대로 중국을 조정하고자 하였다. 장개석은 미국의 원조는 받되 중국에서의 전쟁은 중국인이 수행한다는 대국적인 원칙은 포기하지 않았다. 이 결과 중국에서의 전쟁은 미국이 주도한 것이 아니라 8년 동안 도망 다니기 바빴다고 자조하던 중국이 주도권을 가지고 진행할 수 있었다. 물론 이 과정에서 중국 국민당군은 막대한 인적 물적 손실을 입었다. 하지만 중국인들은 일본군과 전쟁을 하면서 '하나는 본전이고 둘 이면 남는다'는 낙관적인 생각을 끝까지 버리지 않았다. 일본의 패망 후에 만주에 진주한 소련에 대한 태도 역시 장개석 다운 선택이었다. 소련의 만주 점령을 희석시키기 위해 모택동의 공산당과 평화협정을 시작하며 하나의 중국이라는 점을 분명히 하면서 미국과 소련이 중국을 공산주의와 자본주의로 양분하려는 기도를 좌절시켰다. 장개석은 소련의 의중을 알때까지 만주에서 공산당과 전투를 하려하지 않았다. 소련의 의중을 모르고 전쟁을 벌일 경우 만주를 점령한 소련이 그곳을 공산당에게 넘겨준다면 중국은 분할될 수 있다고 보았던 것이다. 그의 이런 혜안은 정확했고 장개석과 스탈린이 협정을 맺고 소련군이 만주에서 철수를 하자 그때서야 공산당과의 전쟁을 시작하였다. 그 정점이 공산당의 본거지인 연안을 점령한 것이었다. 모택동 역시 미국과 소련이 중국을 분할하려는 의지가 없다는 사실을 알게 되자 과감히 연안을 버리고 장개석과 정면 대결을 선택하였다. 장개석은 분할보다는 하나의 중국을 선택함으로서 자신은 대만으로 쫓겨가게 되었다.
그의 군사적 능력은 대단치 않았다. 그는 많은 사람들이 말하듯 능력보다는 충성심을 우선으로 한 용인술을 펼쳤다. 이는 능력만 있다면 실수도 적당히 용인한 모택동과 다른 점이었다. 장개석은 현실을 장악하려 했지만 모택동은 미래를 움켜쥐려 했다. 모택동의 입장에서 천하를 차지한 뒤에 무슨 짓을 하더라도 그것은 제왕의 의지이기 때문에 과정은 용인될 수 있는 것이었다. 하지만 장개석은 현실을 장악해야 미래를 가질 수 있다고 믿었다. 이런 점에서 장개석은 모택동에 뒤졌지만 모택동 역시 장개석이 그토록 집착했던 하나의 중국이란 화두에 반대하지 않았다. 오히려 장개석의 이런 심중을 최대한 이용하여 중국을 차지하였던 것이다.
장개석이 어느 정도 무능하고 부패한 것은 사실이었다. 하지만 그 단점의 뒤에는 결코 분할 될 수 없다는 중국이라는 화두가 존재하고 있었다는 점이다. 이는 현재의 중국도 인정하고 있다는 점이다. 결국 역사는 멀리 보는 자가 승리하는 것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