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다 - 피귀르 미틱 총서 7
올리비에 아벨 외 지음, 박아르마 옮김 / 자음과모음(이룸) / 2003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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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다라는 인물은 배신자라는 대명사로 각인 되었다. 유다의 이야기를 전하는 복음서-마르코, 마태오, 루가, 요한-의 전형화된 침묵으로 인해 유다의 배신에 대한 동기와 성격에 자유로운 영역을 남겨두었다. 성 아우구스티누스는 <고백록>에서 "성서는 각자가 저마다의 이유에서 옳다고 생각하는 모든 것이 반향을 일으킬 수 있도록 읽어야 한다. 다른 이유들을 배제하기 위해 명백한 단 한 가지 의미만을 찾기 보다는 말이다... 또한 서로 반대하기 위해서 기록된 것 이상을 넘어서는 안된다는 생각을 버려야 한다"  이 책은 바로 이 명제에 대한 이야기라 할 수 있다.

우리들이 전형적으로 이해하는 유다에 대하여 이 책은 다른 시각을 전달하고 있다. 그런데 놀랍게도 그 다른 시각의 출발점이 복음서라는 사실이다. 각각의 저자들은 복음서에 드러난 유다에 대한 단편적인 기록을 통해서 유다가 어떻게 전형화되었는가를 밝혀내고 있다. 유다가 정형화되는 것은 '성서 말씀을 이루기 위해' 혹은 '그대로 이루어 졌다'라는 구조를 통해서라고 보고있다. 즉 구약은 신약의 완성을 증언하는 것이란 것을 증명하기 위해 유다의 관점이 완벽하게 제거되었다는 것이다. 물론 이런 주장의 다른 쪽에는 구약의 모든 예언이 신약의 그리스도의 죽음을 통해 완벽하게 이루어졌고, 그 결과 인간의 구원이 이루어졌다는 주장이 있다는 점 또한 잊어서는 안된다.

사실 유다가 악마의 화신으로 변하게 된 것은 '배신자'이면서 '신을 죽인 책임' 때문이란 공인된 사고 때문이었다. 하지만 이런 말은 유다가 없었다면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 또한 없지 않았겠느냐는 생각을 드러나게 하기도 한다. 여기서 유다가 없었다면 다른 유다가 있었을 것이란 진부한 사고는 생략하기로 하자. 어차피 신이 죽고 부활하기 위해서는 유다라는 상징적인 인물이 반드시 필요했다는 점이다. 그런 의미에서 유다라는 한 개인은 어쩌면 공동의 속죄양과 같은 인물이 아니었을까?

유다는 이 세상에 태어난 것이 '배반'을 위해서라면 그의 인생은 정말로 잔혹한 것이 아닐까? 정말로 유다가 '배반'만을 위해 이 세상에 태어났다면 유다는 물론이고 다른 제자들 역시 자신의 스승인 예수가 결코 죽게 되는 것을 몰랐다고 할 때만 설득력이 있게 된다. 하지만 예수는 복음서 곳곳에서 자신의 죽음과 사흘만에 부활할 것이란 메시지를 반복적으로 말하고 있다는 점이다. 결국 유다의 배신은 오래 전부터 정해져 있던 필연적인 배신의 역할-성서 말씀을 이루기 위해 또는 그대로 이루어졌다-을 충실히 수행한 것 뿐이다.

유다는 어찌보면 '지명된 배신자'라고 할 수 있다. 그럼에도 우리들은 유다라는 개인적인 명사를 유대인, 유대교라는 민족적인 대표명사로 치환하여 이해한다. 즉 그리스도의 죽음에 대한 책임을 유다라는 개인에서 민족과 종교로 떠넘기고 있다는 점이다. 그러나 예수는 분명히 유다에게 '네가 할 일을 어서 하여라'라고 말한다는 점이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은 유다에게는 배신자의 누명보다는 분명한 알리바이가 있다고 생각하는지도 모른다.

하이얌 메코비Hyam Maccoby는 <가리옷 유다와 유대인의 악에 관한 신화>에서 "신화가, 단 한 사람의 배신 때문에 희생자가 죽었음을 입증하기 위해, 환상적인 여러 이야기를 되풀이하여 말할수록 그 신화는 공동체의 무죄를 입증하기 위해 이야기를 꾸미고 있는 것이라고 더욱더 의심하게 된다"고 말하고 있다. 즉 하이얌은 그리스도교 세계에서 유다에 대한 과장이 심하면 심할수록 그것은 의심스런 것이란 것을 이야기하는 것이다. 반면 엘리스 데이비드슨은 유다의 배신과 죽음에 관해서 스칸디나비아의 로키 신화를 이용하여 설명하는데 여기서 그는 라드바니radbani-조언에 의한 살인자-와 한드바니handbani-손에 의한 살인자-라는 개념을 이용하여 설명하고 있다. 즉 스칸디나비아 신화에서 오딘의 아들 발드르는 모든 신들에게 자신에게 화살을 쏘라고 하였다. 발드르는 무기들도 나무도 자신을 죽이지 못할 것이라고 서약을 받았기 때문에 그런 말을 할 수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로키는 발드르가 서약할 당시 갓 피어난 겨우살이 새싹이 있었는데 너무 어려 맹세를 요구하지 못한 것을 알고 그것으로 화살을 만들어 발드르의 형제인 호르드에게 던지라고 하였던 것이다. 결국 발드르는 형제인 호르드가 던진 겨우살이 새싹으로 만든 화살에 맞아 죽게된다.

그러면서 데이비드손은 이 상황을 예수와 그 주변으로 확대하여 조망한다. 그가 조망하는 인물은 유대민족이나 대제사장이 아니다. 오히려 예수를 판결한 빌라도에게 향한다. 즉 당시 이방인이 유다지역을 방문했다면 한 사람이 십자가에 의해 처형되었을 때 누구의 책임이냐고 묻는다면 그는 당연히 당시 총독이었던 빌라도가 예수의 죽음에 최종적인 책임이 있다고 보았을 것이란 점을 이야기한다. 그런 의미에서 예수에 대한 handbani는 빌라도라는 것이다. 하지만 이 상황이 빌라도에게까지 거슬러 올라가게 된 원인은 어디에 있는가? 거기에는 유다의 배반으로부터 시작된다는 점을 분명히 한다. 유다의 배반과 대사장이 보낸 사람들에게 체포되어 빌라도에게 넘겨진 예수의 죽음의 시작은 유다라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유다는 radbani가 되는 것이다.

성 아우구스티누스는 유다의 배신을 "felix culpa-복된 죄악"로 설명한다. 즉 유다의 배신으로 인해 인류에게 구원의 은총이 넘치게 되었다는 것이다. 즉 유다는 예수를 배신함으로서 역설적으로 그를 드러나게 하는 것이다. 결국 성 아우구스티누스의 말은 자크 아순이 말한 것처럼 유다가 없다면 예수도, 십자가도, 부활도 없는 것이 되는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유다의 배신은 복된 죄악일 수 밖에 없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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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빈슨 - 피귀르 미틱 총서 2
리즈 앙드리 책임편집, 박아르마 옮김 / 자음과모음(이룸) / 2003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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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빈슨 크루소에게서 유추할 수 있는 것은 무엇일까. Crusoe는 어찌보면 Cruisado와 유사함을 보이고 있다. 크루이사도는 '십자군'이란 의미이다.  로빈슨은 야만에 대한 문명의 십자군이었을까? 18세기 유럽인들의 이데올로기가 로빈슨이란 인물을 통해 하나의 '신화'로 윤색되었다. 여기서 나타나는 식민주의는 19세기의 서구인들에게 하나의 영감을 불러있으켰다. 로빈슨은 섬이라는 한정된 공간을 통해 유럽의 이상 혹은 종교. 정치적인 바램을 창시한 입법자와 같은 의미로 이해되었다. 그렇기 때문에 로빈스 크루소의 이야기가 출판되자 이 책은 급속히 서구제국의 언어로 번역되었던 것이다.

섬에 고립되어 새로운 세계를 만들어가는 로빈슨의 모습은 서구인들이 하나의 모델로 생각하는 이미지라고 할 수 있다. 서구인들이 로빈슨에게 집착하는 이유는 그가 태어난 나라와 두 개의 물방울처럼 꼭 닮은 제2의 조국을 섬에 재현했기 때문이다. 이것은 서구인들이 로빈슨에게서 예언자 요나의 모습을 보았기 때문이다. 철저히 세속적인 로빈슨은 난파되어 섬에 도착한 직후 '소명'이라는 단어와 유사한 느낌을 받게된다. 그것은 요나가 고래 뱃속에서 철저하게 정화된 것처럼 로빈슨 역시 난파선에서 정화되었기 때문이다. 이를 통해 로빈슨은 요나와 같이 속죄의 과정을 밟으며 새롭게 태어난다. 하지만 자신이 새롭게 태어난 신성화된 혹은 사유화된 섬은 철저하게 유럽식으로 개조된다. 로빈슨은 섬을 외적으로 변화시킴으로 자신이 떠나온 사회와 최대한으로 가깝게 하려한다. 그러면서 로빈슨은 섬이란 새로운 환경에 자신을 맞춤으로서 자신이 변화하려 시도하기도 한다. 이런 무인도의 역설을 통해 로빈슨은 자신들의 관점에서 이해하는 인간화의 첫단계를 수행하는 것이다.

로빈슨이 수행하는 인간화의 가장 대표적인 것이 섬을 하나의 정원으로 꾸미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영국식 정원은 자연친화적이기보다는 철저하게 자연을 극복하는 것으로 꾸며진다. 로빈슨의 이야기에서 자신의 거주지 주변에 조성한 것은 청교도적 전통에 입각한 정원이란 점이다. 여기서 정원은 철저하게 에덴동산을 염두에 두고 있다는 점이다. 즉 로빈슨은 에덴동산의 개척자로서 자신을 자리매김하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그는 창조자와는 근본적으로 다른 점이 있다. 창조주는 자신이 만든 세계에 아담과 이브를 존재하게 하였다. 이 둘은 창조자의 모상이라는 점이다. 즉 이들 인간을 통해 창조주의 사업이 지상에서 지속되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로빈슨의 경우 그것은 불가능하다. 그렇기 때문에 그가 만난 방드르디-프라이데이-는 로빈슨의 모상이라기 보다는 그의 삶의 와중에 일어난 하나의 사건일 뿐이다. 그러기에 식인종인 원주민에게 방드르디-금요일-란 이름을 붙인 것은 그 날의 기념과 비슷한 것이다. 즉 방드르디는 존재가 아니라 기념으로 그의 옆에 있는 것이다.

이런 로빈슨의 신화는 미셀 투르니에 의해 새롭게 해석된다. 현대 세계는 더 이상 무인도가 존재하지 않는다고 한다. 그가 말하는 무인도는 고립과 고독이라는 개념으로 존재한다. 그 섬은 물질적인 것이 아니다. 그것은 보이지 않는 경계선으로 둘러쌓인 섬이다. 투르니에는 이런 현재의 섬으로 독일의 터키인, 미국의 멕시코인, 프랑스의 북아프리카인의 예를 든다. 이들은 독일, 미국, 프랑스에 살면서도 결코 독일인이 미국인이 프랑스인이 될 수 없다. 이들은 언제까지나 터키인이고 멕시칸이며 불법 이민자일 뿐이다. 이들이 바로 존재가 아니라 기념으로 존재하는 현대의 방드르디인 것이다.  그러기에 현대의 로빈슨은 어떤 물질적 장소에 가지 않더라도 언제고 생겨날 수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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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인 - 피귀르 미틱 총서 8
자크 아순 책임편집, 고광식 옮김 / 자음과모음(이룸) / 2004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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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5년 2월 15일 비엔나에서 지그문트 프로이트는 <우리(유대인)와 죽음>이란 강연을 하였다. 여기서 그는 '우리 모두는 유서깊은 살인자 혈통의 후예이다'라고 언급하였다. 여기서 '유서깊은 살인자'란 두말할 것도 없이 성서에 나오는 최초의 살인자 카인을 말한다. 그는 그리스도교의 원죄처럼 카인에게서 살인의 광기를 보았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유감스럽게도 이런 카인에 대해 우리들은 그리 많은 정보를 가지고 있지 못하다. 카인에 대해 하는 것이라고는 무죄한 동생 아벨을 죽였다는 정도이다. 그렇다면 왜 아벨을 죽여야만 했을까? 그에 대한 변론이 이 책의 주제를 이루고 있다.  

구약성서 창세기 4장에 보면 카인이 아벨을 죽이고 하느님의 분노를 피해 에덴의 동쪽으로 도망가서 자식을 낳았다고 기록되어 있다. 구약성서는 아담과 이브로부터 시작한 인류의 이야기를 두 가지 버전으로 들려주고 있다. 하나는 에덴의 동쪽으로 도망간 카인의 족보이다. 이 족보를 통해서 보면 카인이 낳은 에녹은 건축의 시조가 되었고, 유발은 음악의 조상이 되었다. 그리고 두발카인은 대장장이의 시조가 야발은 유목민의 조상이 되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그리고 그 뒤에 아담이 130세가 되어 다시 낳은 셋의 이야기가 나온다. 하지만 여기에는 다른 기록은 없다. 셋에게서 에노스가 태어났는데 그는 믿는 사람들의 조상으로 기록되어 있다. 이렇게 보면 카인이 이 세상을 구성하고 있는 현 세계의 실질적인 조상인 셈이다. 

그럼 카인이 어떻게 이렇게 건설자들의 조상이 되어 이 세계를 만들어 나갔을까? 그것은 카인의 존재방식에 대한 질문으로부터 시작된다. 카인과 아벨은 태어날 때 부터 다른 모습이었다. 이 둘은 세상을 구성하기 위해서 태어난 것이 아니라 최고의 암시와 영광의 비밀을 드러나게 하기 위해 존재하였던 것이다. 이들은 아담과 이브의 세대를 연결하는 구성의 고리가 될 수 없었다. 오히려 아담과 이브의 세대를 연결시키는 것은 아벨이 죽고 카인이 도망간 뒤에 아담과 이브가 낳은 셋에 의해 인류의 족보는 이어지고 있다(창세기 5장). 아담과 이브로부터 이어지는 족보에는  카인과 아담은 존재하지 않는다. 하지만 노아에 이르러 홍수 속에서 살아남은 것은 전적으로 도구의 힘이었다. 그것은 어디로부터 온 것일까? 바로 카인으로부터 온 것이라 할 수 있다.

카인이란 '획득' 혹은 '구매'를 의미한다. 반면 아벨은 '공허'를 뜻한다. 그래서 어떤 이들은 아벨에게서 결핍을 카인에게서 존재를 보고 있기도 하다. 이들 두 형제는 아주 다른 길을 걷는다. 카인은 농사를 지어 땅의 소출을 얻는 사람이 된 반면, 아벨은 목동이 되어 가축을 돌보는 사람이 되었다. 이것은 카인이 땅에 고착된 사람이된 반면 아벨은 하늘을 향한 사람이 되었음을 의미한다. 그런데 이 두 형제가 다툼을 벌이게 된 이유는 '기부'의 문제 때문이었다. 아벨은 하느님에게 '맏배의 기름기'를 기부한 반면 카인은 기부라는 것을 이해하지 못하였다. 즉 카인은 하느님이 인간에게 준 것을 되돌려주는것, 하느님이 인간에게 만들어 준 자리를 하느님에게도 만들어 주는 것을 거부한 것이다. 카인의 이런 생각은 하느님의 은총을 이용하여 자신만의 철과 피의 제국을 만든 것과 다름없는 것이다.

그런데 여기에 문제가 있다. 아벨의 기부는 하느님이 받아들였지만 그는 땅의 인간이 아니라 유목의 인간이었다. 유목이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초지를 따라 이리 저리 이동하는 것을 말한다. 즉 카인처럼 땅에 얽매여 현실의 시험에 노출되지 않는다. 즉 아벨은 하늘과 가까웠지만 그의 이상은 현실에서 실현될 수 없는 것이었다. 이것은 신과 아벨 사이에 카인과 인류가 존재한다는 것이기도 하다. 이것은 일견 모순되어 보이기도 한다. 하지만 부처가 스스로 무간지옥으로 내려간 것과 같은 것이라 하겠다. 자신이 있어야 하는 곳. 그곳은 에덴 동산이 아니라 카인이 살고 있는 우리들의 세계인 것이다. 이 세계를 개척하는 것은 아벨의 몫도 셋의 힘도 아니다. 오직 카인의 후예들의 몫인 것이다. 그래서 신은 카인에게 인류를 발전시킬 재능을 주었고 설립자가 되게 하였던 것이다.

그렇다면 카인의 어떤 점이 하느님을 움직였을까? 그것은 카인의 행위에 있는 것이다. 재물을 하느님 받지 않자 카인은 화를 낸다. 하느님은 카인에게 왜 화를 내냐고 묻고 자신을 잘 다스려야 한다고 충고까지 하고 있다.  아벨을 살해하고 하느님의 벌이 떨어지자 카인은 또 다시 항의한다. '그 형벌은 제가 짊어지기에 너무 큼니다'라고. 이에 하느님은 카인에게 어떤 표시를 주고 그를 해하려는 자는 누구나 일곱갑절로 앙갚음을 받게 되리라고 선언한다. 바로 여기서 카인과 하느님과의 관계는 끊어진다. 카인은 스스로 죄악감에서 자신을 해방시키고 있는 것이다. 이것은 아벨과 같은 인류를 원하는 하느님에게 도전한다. 이들 카인의 자손들은 카인의 살인 이후에도 끊임없이 하느님에게 도전한다. 이들의 마지막 반항은 바벨탑이었다. 즉 카인의 후예들은 예속적이기 보다는 스스로 신과 같이 되고자 하는 생각을 갖게 되었던 것이다. 이제 인간은 스스로 설립자의 위치에 서기 시작했던 것이다. 카인의 반항에서 비롯된 인간의 역사가 바벨탑 이후 인류 문명의 시작이 되었다는 것은 재미있는 것이라 하겠다.

카인의 행동이 인류 문명의 원동력이었다면 카인의 죄는 어떻게 될까?그 대답을 이 책은 20세기에서 제시하고 있다. 즉 일본의 전쟁범죄에 대한 무책임한 회피를 그 예로 들고 있다. 프로이트가 '우리는 모두 유서깊은 살인자의 후예'라고 한 말은 이중의 진실을 반영하고 있다.  우리가 살인자의 후예가 된 것은 오직 단 한번의 살인에 의해서였다. 마찬가지로 그리스도교에서 말하는 원죄 역시 한번의 죄에 의해 우리가 짊어진 것이다. 우리들이 살인자의 후예라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 살인을 반복적으로 저지를 필요는 없는 것이다. 다만 우리의 몸에 그 피가 흐르고 있다는 사실만을 고백하는 것만으로 현실의 살인을 벗어날 수 있는 것이다. 그리스도교에서는 원죄를 세례로 씻어낸다. 즉 카인의 죄를 인정함으로서 살인의 악순환에서 벗어날 수 있다는 것이다. 일본인들에게도 이런 자세가 필요한 것이다. 일본인들은 핵무기의 사용이 카인의 살인처럼 인류역사에 단 일회성으로 시도되었고, 그 결과 자신들이 범죄자의 후예가 되었다는 점을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 오히려 그들은 희생자로 탈바꿈하고 있다는 점이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왜 독일이 아니고 일본이었는가에 대한 답을 찾지 못하는 일본은 스스로 부조리한 상황에 직면하게 되었다. 그 대답은 잘못의 인정과 부인의 차이라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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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10-11 14:02   URL
비밀 댓글입니다.

dohyosae 2005-10-12 10:4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들에게 있어 카인은 살인자가 아니라 프로메테우스와 같은 건설자로 인식되기 때문이지요. 석공조합이나 목수와 같은 사람들은 만드는 사람이면서 신의 신비를 지상에 구현하는 사람이었지요. 즉 카인은 건설자의 시조이면서 비밀결사의 후원자이기도 한 것 같습니다.
 
그리스인들은 신화를 믿었는가? 신화 종교 상징 총서 10
폴 벤느 지음, 김운비 옮김 / 이학사 / 2002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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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은 참 독특한 책이다.  저자는 우리에게 '그리스인들 자신은 신화를 믿었을까?'하고 물어 본다. 그러면서 그는 시공을 넘나들며 시대를 관통한 언어만을 우리에게 보여준다. 즉 저자는 우리에게 익숙한 그리스의 역사, 정치, 경제의 이야기를 의도적으로 삭제하고 언어만을 보여준다. 그렇다고 그 언어를 통해 판단하라는 것도 아니다. 오히려 그 언어와 대화를 통해 긍정할 것이 있으면 긍정하고 부정할 것이 있으면 스스로 논거를 대보라는 식이다. 그렇다보니 이 책은 우리들에게 이것은 이것이다라고 굳이 말하지 않는다. 오히려 옛날에 이러했기 때문에 지금도 그 영향으로 이러할 것이다라는 것을 부정하고 있는 것이다. 다만 그 시대에 발언했던 말을 읽어보라는 것이다. 그래서 이 책을 읽다보면 우리의 근현대사를 관통하는 '우리들의 신화'를 생각하게 된다.

어린 시절 하나의 그림이 생각난다. 한국 태극기와 미국 성조기가 그려진 손이 악수를 하는 그림이 그려진 밀가루 부대. 이른바 PL480호(잉여농산물법 480호)가 그것이다. 우리나라가 이 480호의 원조를 벗어난 시기는 세계 은행의 차관 졸업국이 된 1995년이었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거의 없을 것이다. 이 사실은 지금의 세대들에게 하나의 신화로 보여질 것이다. 이것을 믿을 수 있을까? 이런류의  신화는 70년대(공산당이 싫어요), 80년대(탁 치니 억하면서 죽었다), 90년대(IMF 음모론), 00년대(386의 신화)를 거치면서 나타났다 사라졌고 혹은 지금도 지속되고 있다. 그래서 사람들은 진실게임을 통해 신화의 진실 혹은 허구를 밝혀내려 한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세계는 그 자체로 존재하고 있는 한 허구일 수 없다는 점이다. 허구성이란 사람들이 그것을 믿느냐 믿지 않느냐에 달려있는 것이다. 현실과 허구의 차이는 사물 자체에 내재하는 객관적인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 차이는 우리 안에 있으며 주관적으로 누가 거기서 허구를 보느냐 아니냐에 달려있다고 폴 벤느는 말하고 있다.

우리 사회는 00년대에 들어와 보수와 진보의 대립이 첨예하게 대립하고 있다. 이들의 대립은 과거를 보는 관점에 대한 대립이란 점이다. 즉 폴 벤느가 말한 것처럼 과거의 신화에 대한 진실과 허구를 밝혀내려는 것이란 점이다. 이 대립은 객관적이기 보다는 주관적이라는 데서 우리는 역사를 신화화하고 있는 것이 아닌지... 사실 허구는 진실의 대립항이 아니다. 오히려 진실의 부산물인 것이다. 또한 신화는 일종의 정보이지 하늘의 계시나 신비한 비밀이 아니라는 점이다. 신화란 정보를 통해 얻는 견문 이상의 아무것도 아니며, 그 견문이 적용되는 분야는 논쟁이나 경험적 작업에 해당하는 지식분야라는 점이다.

모든 지식은 이해관계적이라는 점이다. 왜냐하면 진실과 이해관계는 같은 것의 다른 두 표현에 지나지 않기 때문이다. 인간이 실천하는 행위는 자기가 행하는 것을 사고하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이해관계가 언제나 합리적인 것은 아니라는 점이다. 결국 신화는 믿고 안믿고의 관계를 떠나서 나와 너, 우리와 타인과의 관계 속에서 합의되는 것이 아닐까.

** 구판의 두 분 서평도 읽어보시면 더 많은 느낌을 받을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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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문의 역사
브라이언 이니스 지음, 김윤성 옮김 / 들녘 / 2004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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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0년대 중반 로만 폴란스키가 감독하고 벤 킹슬리, 스튜어트 윌슨, 시고니 위버가 주연한 '진실'이란 영화가 있었다. 원제가 Death And The Maiden인 이 영화는 아르헨티나의 '더러운 전쟁'이 배경인 영화였다. 고문의 휴유증을 안고 15년을 살아온  여인 파올리나(시고니 위버)는 어느 비오는 날 남편(스튜어트 윌슨)의 차가 펑크 나는 바람에 이웃에 사는 의사 미란다(벤 킹슬리)의 차를 얻어타고 집에 온다. 어둠 속에서 닥터 미란다의 목소리를 듣는 순간 파올리나는 그 목소리의 주인공이 15년전 자신의 눈을 가리고 슈베르트의 '죽음과 소녀'라는 현악곡을 틀어놓고 고문을 자행한 사람이라는 것을 알게 된다. 아르헨티나 출신의 작가 아리엘 도르프만Ariel Dorfman의 동명의 희곡을 각색한 이 영화는 고문이란 인간의 삶을 어떻게 피폐하게 하는지를 잘 보여주는 영화였다.

고문의 역사는 자기 합리화의 역사였다. 고문하는 자들은 항상 '그 사람이 무엇인가 잘못해서 이곳에 잡혀왔다'는 자기 암시 속에서 고문을 자행하였다. 저자는 이런 고문관들의 심리를 시험한 미국 예일 대학교의 스텐리 밀그램Stanley Milgram의 실험을 앞장에서 언급하고 있다. 밀그램은 실험 지원자들을 고문실(실험실) 옆방으로 모이게 한 다음 각각의 스위치가 15볼트에서 450볼트까지 전압을 보내는 것이라고 설명하였다. 그리고 마지막 네번째 스위치는  정말로 위험한 것이란 쪽지까지 붙어있게 하였다. 그리고 실험자가 틀린 답을 말할 때마다 각각 높은 단계의 스위치를 누르라고 하였다. 물론 실험자에게 연결된 전기 스위치는 조작된 것이었고, 실험자는 연극을 하게 되어 있었다. 그런데 놀랍게도 40명의 지원자 대부분은 실험 감독자의 명령을 따라 고문을 가하였고, 그  가운데 26명은 위험하다는 경고 쪽지가 붙은 최고 단계의 스위치를 눌렀다. 심지어 몇몇 지원자는 실험자가 기절한 연기를 하자 약간의 심리적 동요를 일으켰지만 실험 감독관의 명령에 복종하였다. 또 소수의 지원자는 150볼트가 넘자 실험자가 금속판에 손을 놓기를 거부하자 강제로 올려 놓기까지 하였다. 이 실험에서 분명하게 거부의 의사를 밝힌 사람은 단 1명이었다고 한다.

이 실험은 고문을 가하는 사람의 개인적 양심은 아무런 의미가 없다는 것을 극명하게 증명하였다. 오히려 조직 속에서 개인은 '내가 사람들에게 얼마나 끔찍한 짓을 하고 있는가'라는 의문을 제기하는 대신 '주어진 임무를 수행하기 위해 내가 저 끔직한 것을 봐야만 하다니, 내 어깨에 얼마나 무거운 짐이 얹혀져 있는가'라고 자기 합리화를 하였다는 것이다. 즉 고문자는 인간성을 말살하는 존재가 아니라 수호자로 자신을 암시함으로서 고문을 거침없이 자행하였던 것이다.

사실 오늘날 우리 사회에서도 고문의 가해자와 피해자가 상존하고 있다. 피해자들은 그 아픈 기억을 굳이 재생하려 하지 않는다. 그 고통이 너무나 끔찍하기에 그것을 다시 생각하는 것조차도 고통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가해자들은 어떠한가? 그들은 앞에서 언급한 실험의 예에서 처럼 자신은 조직의 희생자이고 어쩔 수 없었으며, 혹은 체제의 수호자로서 자신의 할 일을 했을 뿐이라고 담담하게 말한다.

이 고문의 역사는 이 이론에 대한 냉정한 기록이라고 할 수 있다. 시대별로 자행된 고문과 그 시대를 풍미했던 사상, 그리고 그것을 수호하고 반대했던 사람들의 이야기를 통해서 고문의 목적이 무엇이며, 고문이 의도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알게 될 것이다. 이 책을 읽으며 셰익스피어의 '리처드 3세'에 나오는 대사가 문득 생각이 났다.

흉포한 야수에게도 연민이 있는데 그것도 없는 나는 야수도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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