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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다 - 피귀르 미틱 총서 7
올리비에 아벨 외 지음, 박아르마 옮김 / 자음과모음(이룸) / 2003년 11월
평점 :
품절
유다라는 인물은 배신자라는 대명사로 각인 되었다. 유다의 이야기를 전하는 복음서-마르코, 마태오, 루가, 요한-의 전형화된 침묵으로 인해 유다의 배신에 대한 동기와 성격에 자유로운 영역을 남겨두었다. 성 아우구스티누스는 <고백록>에서 "성서는 각자가 저마다의 이유에서 옳다고 생각하는 모든 것이 반향을 일으킬 수 있도록 읽어야 한다. 다른 이유들을 배제하기 위해 명백한 단 한 가지 의미만을 찾기 보다는 말이다... 또한 서로 반대하기 위해서 기록된 것 이상을 넘어서는 안된다는 생각을 버려야 한다" 이 책은 바로 이 명제에 대한 이야기라 할 수 있다.
우리들이 전형적으로 이해하는 유다에 대하여 이 책은 다른 시각을 전달하고 있다. 그런데 놀랍게도 그 다른 시각의 출발점이 복음서라는 사실이다. 각각의 저자들은 복음서에 드러난 유다에 대한 단편적인 기록을 통해서 유다가 어떻게 전형화되었는가를 밝혀내고 있다. 유다가 정형화되는 것은 '성서 말씀을 이루기 위해' 혹은 '그대로 이루어 졌다'라는 구조를 통해서라고 보고있다. 즉 구약은 신약의 완성을 증언하는 것이란 것을 증명하기 위해 유다의 관점이 완벽하게 제거되었다는 것이다. 물론 이런 주장의 다른 쪽에는 구약의 모든 예언이 신약의 그리스도의 죽음을 통해 완벽하게 이루어졌고, 그 결과 인간의 구원이 이루어졌다는 주장이 있다는 점 또한 잊어서는 안된다.
사실 유다가 악마의 화신으로 변하게 된 것은 '배신자'이면서 '신을 죽인 책임' 때문이란 공인된 사고 때문이었다. 하지만 이런 말은 유다가 없었다면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 또한 없지 않았겠느냐는 생각을 드러나게 하기도 한다. 여기서 유다가 없었다면 다른 유다가 있었을 것이란 진부한 사고는 생략하기로 하자. 어차피 신이 죽고 부활하기 위해서는 유다라는 상징적인 인물이 반드시 필요했다는 점이다. 그런 의미에서 유다라는 한 개인은 어쩌면 공동의 속죄양과 같은 인물이 아니었을까?
유다는 이 세상에 태어난 것이 '배반'을 위해서라면 그의 인생은 정말로 잔혹한 것이 아닐까? 정말로 유다가 '배반'만을 위해 이 세상에 태어났다면 유다는 물론이고 다른 제자들 역시 자신의 스승인 예수가 결코 죽게 되는 것을 몰랐다고 할 때만 설득력이 있게 된다. 하지만 예수는 복음서 곳곳에서 자신의 죽음과 사흘만에 부활할 것이란 메시지를 반복적으로 말하고 있다는 점이다. 결국 유다의 배신은 오래 전부터 정해져 있던 필연적인 배신의 역할-성서 말씀을 이루기 위해 또는 그대로 이루어졌다-을 충실히 수행한 것 뿐이다.
유다는 어찌보면 '지명된 배신자'라고 할 수 있다. 그럼에도 우리들은 유다라는 개인적인 명사를 유대인, 유대교라는 민족적인 대표명사로 치환하여 이해한다. 즉 그리스도의 죽음에 대한 책임을 유다라는 개인에서 민족과 종교로 떠넘기고 있다는 점이다. 그러나 예수는 분명히 유다에게 '네가 할 일을 어서 하여라'라고 말한다는 점이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은 유다에게는 배신자의 누명보다는 분명한 알리바이가 있다고 생각하는지도 모른다.
하이얌 메코비Hyam Maccoby는 <가리옷 유다와 유대인의 악에 관한 신화>에서 "신화가, 단 한 사람의 배신 때문에 희생자가 죽었음을 입증하기 위해, 환상적인 여러 이야기를 되풀이하여 말할수록 그 신화는 공동체의 무죄를 입증하기 위해 이야기를 꾸미고 있는 것이라고 더욱더 의심하게 된다"고 말하고 있다. 즉 하이얌은 그리스도교 세계에서 유다에 대한 과장이 심하면 심할수록 그것은 의심스런 것이란 것을 이야기하는 것이다. 반면 엘리스 데이비드슨은 유다의 배신과 죽음에 관해서 스칸디나비아의 로키 신화를 이용하여 설명하는데 여기서 그는 라드바니radbani-조언에 의한 살인자-와 한드바니handbani-손에 의한 살인자-라는 개념을 이용하여 설명하고 있다. 즉 스칸디나비아 신화에서 오딘의 아들 발드르는 모든 신들에게 자신에게 화살을 쏘라고 하였다. 발드르는 무기들도 나무도 자신을 죽이지 못할 것이라고 서약을 받았기 때문에 그런 말을 할 수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로키는 발드르가 서약할 당시 갓 피어난 겨우살이 새싹이 있었는데 너무 어려 맹세를 요구하지 못한 것을 알고 그것으로 화살을 만들어 발드르의 형제인 호르드에게 던지라고 하였던 것이다. 결국 발드르는 형제인 호르드가 던진 겨우살이 새싹으로 만든 화살에 맞아 죽게된다.
그러면서 데이비드손은 이 상황을 예수와 그 주변으로 확대하여 조망한다. 그가 조망하는 인물은 유대민족이나 대제사장이 아니다. 오히려 예수를 판결한 빌라도에게 향한다. 즉 당시 이방인이 유다지역을 방문했다면 한 사람이 십자가에 의해 처형되었을 때 누구의 책임이냐고 묻는다면 그는 당연히 당시 총독이었던 빌라도가 예수의 죽음에 최종적인 책임이 있다고 보았을 것이란 점을 이야기한다. 그런 의미에서 예수에 대한 handbani는 빌라도라는 것이다. 하지만 이 상황이 빌라도에게까지 거슬러 올라가게 된 원인은 어디에 있는가? 거기에는 유다의 배반으로부터 시작된다는 점을 분명히 한다. 유다의 배반과 대사장이 보낸 사람들에게 체포되어 빌라도에게 넘겨진 예수의 죽음의 시작은 유다라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유다는 radbani가 되는 것이다.
성 아우구스티누스는 유다의 배신을 "felix culpa-복된 죄악"로 설명한다. 즉 유다의 배신으로 인해 인류에게 구원의 은총이 넘치게 되었다는 것이다. 즉 유다는 예수를 배신함으로서 역설적으로 그를 드러나게 하는 것이다. 결국 성 아우구스티누스의 말은 자크 아순이 말한 것처럼 유다가 없다면 예수도, 십자가도, 부활도 없는 것이 되는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유다의 배신은 복된 죄악일 수 밖에 없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