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문의 역사
브라이언 이니스 지음, 김윤성 옮김 / 들녘 / 2004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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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0년대 중반 로만 폴란스키가 감독하고 벤 킹슬리, 스튜어트 윌슨, 시고니 위버가 주연한 '진실'이란 영화가 있었다. 원제가 Death And The Maiden인 이 영화는 아르헨티나의 '더러운 전쟁'이 배경인 영화였다. 고문의 휴유증을 안고 15년을 살아온  여인 파올리나(시고니 위버)는 어느 비오는 날 남편(스튜어트 윌슨)의 차가 펑크 나는 바람에 이웃에 사는 의사 미란다(벤 킹슬리)의 차를 얻어타고 집에 온다. 어둠 속에서 닥터 미란다의 목소리를 듣는 순간 파올리나는 그 목소리의 주인공이 15년전 자신의 눈을 가리고 슈베르트의 '죽음과 소녀'라는 현악곡을 틀어놓고 고문을 자행한 사람이라는 것을 알게 된다. 아르헨티나 출신의 작가 아리엘 도르프만Ariel Dorfman의 동명의 희곡을 각색한 이 영화는 고문이란 인간의 삶을 어떻게 피폐하게 하는지를 잘 보여주는 영화였다.

고문의 역사는 자기 합리화의 역사였다. 고문하는 자들은 항상 '그 사람이 무엇인가 잘못해서 이곳에 잡혀왔다'는 자기 암시 속에서 고문을 자행하였다. 저자는 이런 고문관들의 심리를 시험한 미국 예일 대학교의 스텐리 밀그램Stanley Milgram의 실험을 앞장에서 언급하고 있다. 밀그램은 실험 지원자들을 고문실(실험실) 옆방으로 모이게 한 다음 각각의 스위치가 15볼트에서 450볼트까지 전압을 보내는 것이라고 설명하였다. 그리고 마지막 네번째 스위치는  정말로 위험한 것이란 쪽지까지 붙어있게 하였다. 그리고 실험자가 틀린 답을 말할 때마다 각각 높은 단계의 스위치를 누르라고 하였다. 물론 실험자에게 연결된 전기 스위치는 조작된 것이었고, 실험자는 연극을 하게 되어 있었다. 그런데 놀랍게도 40명의 지원자 대부분은 실험 감독자의 명령을 따라 고문을 가하였고, 그  가운데 26명은 위험하다는 경고 쪽지가 붙은 최고 단계의 스위치를 눌렀다. 심지어 몇몇 지원자는 실험자가 기절한 연기를 하자 약간의 심리적 동요를 일으켰지만 실험 감독관의 명령에 복종하였다. 또 소수의 지원자는 150볼트가 넘자 실험자가 금속판에 손을 놓기를 거부하자 강제로 올려 놓기까지 하였다. 이 실험에서 분명하게 거부의 의사를 밝힌 사람은 단 1명이었다고 한다.

이 실험은 고문을 가하는 사람의 개인적 양심은 아무런 의미가 없다는 것을 극명하게 증명하였다. 오히려 조직 속에서 개인은 '내가 사람들에게 얼마나 끔찍한 짓을 하고 있는가'라는 의문을 제기하는 대신 '주어진 임무를 수행하기 위해 내가 저 끔직한 것을 봐야만 하다니, 내 어깨에 얼마나 무거운 짐이 얹혀져 있는가'라고 자기 합리화를 하였다는 것이다. 즉 고문자는 인간성을 말살하는 존재가 아니라 수호자로 자신을 암시함으로서 고문을 거침없이 자행하였던 것이다.

사실 오늘날 우리 사회에서도 고문의 가해자와 피해자가 상존하고 있다. 피해자들은 그 아픈 기억을 굳이 재생하려 하지 않는다. 그 고통이 너무나 끔찍하기에 그것을 다시 생각하는 것조차도 고통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가해자들은 어떠한가? 그들은 앞에서 언급한 실험의 예에서 처럼 자신은 조직의 희생자이고 어쩔 수 없었으며, 혹은 체제의 수호자로서 자신의 할 일을 했을 뿐이라고 담담하게 말한다.

이 고문의 역사는 이 이론에 대한 냉정한 기록이라고 할 수 있다. 시대별로 자행된 고문과 그 시대를 풍미했던 사상, 그리고 그것을 수호하고 반대했던 사람들의 이야기를 통해서 고문의 목적이 무엇이며, 고문이 의도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알게 될 것이다. 이 책을 읽으며 셰익스피어의 '리처드 3세'에 나오는 대사가 문득 생각이 났다.

흉포한 야수에게도 연민이 있는데 그것도 없는 나는 야수도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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