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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인 - 피귀르 미틱 총서 8
자크 아순 책임편집, 고광식 옮김 / 자음과모음(이룸) / 2004년 4월
평점 :
1915년 2월 15일 비엔나에서 지그문트 프로이트는 <우리(유대인)와 죽음>이란 강연을 하였다. 여기서 그는 '우리 모두는 유서깊은 살인자 혈통의 후예이다'라고 언급하였다. 여기서 '유서깊은 살인자'란 두말할 것도 없이 성서에 나오는 최초의 살인자 카인을 말한다. 그는 그리스도교의 원죄처럼 카인에게서 살인의 광기를 보았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유감스럽게도 이런 카인에 대해 우리들은 그리 많은 정보를 가지고 있지 못하다. 카인에 대해 하는 것이라고는 무죄한 동생 아벨을 죽였다는 정도이다. 그렇다면 왜 아벨을 죽여야만 했을까? 그에 대한 변론이 이 책의 주제를 이루고 있다.
구약성서 창세기 4장에 보면 카인이 아벨을 죽이고 하느님의 분노를 피해 에덴의 동쪽으로 도망가서 자식을 낳았다고 기록되어 있다. 구약성서는 아담과 이브로부터 시작한 인류의 이야기를 두 가지 버전으로 들려주고 있다. 하나는 에덴의 동쪽으로 도망간 카인의 족보이다. 이 족보를 통해서 보면 카인이 낳은 에녹은 건축의 시조가 되었고, 유발은 음악의 조상이 되었다. 그리고 두발카인은 대장장이의 시조가 야발은 유목민의 조상이 되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그리고 그 뒤에 아담이 130세가 되어 다시 낳은 셋의 이야기가 나온다. 하지만 여기에는 다른 기록은 없다. 셋에게서 에노스가 태어났는데 그는 믿는 사람들의 조상으로 기록되어 있다. 이렇게 보면 카인이 이 세상을 구성하고 있는 현 세계의 실질적인 조상인 셈이다.
그럼 카인이 어떻게 이렇게 건설자들의 조상이 되어 이 세계를 만들어 나갔을까? 그것은 카인의 존재방식에 대한 질문으로부터 시작된다. 카인과 아벨은 태어날 때 부터 다른 모습이었다. 이 둘은 세상을 구성하기 위해서 태어난 것이 아니라 최고의 암시와 영광의 비밀을 드러나게 하기 위해 존재하였던 것이다. 이들은 아담과 이브의 세대를 연결하는 구성의 고리가 될 수 없었다. 오히려 아담과 이브의 세대를 연결시키는 것은 아벨이 죽고 카인이 도망간 뒤에 아담과 이브가 낳은 셋에 의해 인류의 족보는 이어지고 있다(창세기 5장). 아담과 이브로부터 이어지는 족보에는 카인과 아담은 존재하지 않는다. 하지만 노아에 이르러 홍수 속에서 살아남은 것은 전적으로 도구의 힘이었다. 그것은 어디로부터 온 것일까? 바로 카인으로부터 온 것이라 할 수 있다.
카인이란 '획득' 혹은 '구매'를 의미한다. 반면 아벨은 '공허'를 뜻한다. 그래서 어떤 이들은 아벨에게서 결핍을 카인에게서 존재를 보고 있기도 하다. 이들 두 형제는 아주 다른 길을 걷는다. 카인은 농사를 지어 땅의 소출을 얻는 사람이 된 반면, 아벨은 목동이 되어 가축을 돌보는 사람이 되었다. 이것은 카인이 땅에 고착된 사람이된 반면 아벨은 하늘을 향한 사람이 되었음을 의미한다. 그런데 이 두 형제가 다툼을 벌이게 된 이유는 '기부'의 문제 때문이었다. 아벨은 하느님에게 '맏배의 기름기'를 기부한 반면 카인은 기부라는 것을 이해하지 못하였다. 즉 카인은 하느님이 인간에게 준 것을 되돌려주는것, 하느님이 인간에게 만들어 준 자리를 하느님에게도 만들어 주는 것을 거부한 것이다. 카인의 이런 생각은 하느님의 은총을 이용하여 자신만의 철과 피의 제국을 만든 것과 다름없는 것이다.
그런데 여기에 문제가 있다. 아벨의 기부는 하느님이 받아들였지만 그는 땅의 인간이 아니라 유목의 인간이었다. 유목이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초지를 따라 이리 저리 이동하는 것을 말한다. 즉 카인처럼 땅에 얽매여 현실의 시험에 노출되지 않는다. 즉 아벨은 하늘과 가까웠지만 그의 이상은 현실에서 실현될 수 없는 것이었다. 이것은 신과 아벨 사이에 카인과 인류가 존재한다는 것이기도 하다. 이것은 일견 모순되어 보이기도 한다. 하지만 부처가 스스로 무간지옥으로 내려간 것과 같은 것이라 하겠다. 자신이 있어야 하는 곳. 그곳은 에덴 동산이 아니라 카인이 살고 있는 우리들의 세계인 것이다. 이 세계를 개척하는 것은 아벨의 몫도 셋의 힘도 아니다. 오직 카인의 후예들의 몫인 것이다. 그래서 신은 카인에게 인류를 발전시킬 재능을 주었고 설립자가 되게 하였던 것이다.
그렇다면 카인의 어떤 점이 하느님을 움직였을까? 그것은 카인의 행위에 있는 것이다. 재물을 하느님 받지 않자 카인은 화를 낸다. 하느님은 카인에게 왜 화를 내냐고 묻고 자신을 잘 다스려야 한다고 충고까지 하고 있다. 아벨을 살해하고 하느님의 벌이 떨어지자 카인은 또 다시 항의한다. '그 형벌은 제가 짊어지기에 너무 큼니다'라고. 이에 하느님은 카인에게 어떤 표시를 주고 그를 해하려는 자는 누구나 일곱갑절로 앙갚음을 받게 되리라고 선언한다. 바로 여기서 카인과 하느님과의 관계는 끊어진다. 카인은 스스로 죄악감에서 자신을 해방시키고 있는 것이다. 이것은 아벨과 같은 인류를 원하는 하느님에게 도전한다. 이들 카인의 자손들은 카인의 살인 이후에도 끊임없이 하느님에게 도전한다. 이들의 마지막 반항은 바벨탑이었다. 즉 카인의 후예들은 예속적이기 보다는 스스로 신과 같이 되고자 하는 생각을 갖게 되었던 것이다. 이제 인간은 스스로 설립자의 위치에 서기 시작했던 것이다. 카인의 반항에서 비롯된 인간의 역사가 바벨탑 이후 인류 문명의 시작이 되었다는 것은 재미있는 것이라 하겠다.
카인의 행동이 인류 문명의 원동력이었다면 카인의 죄는 어떻게 될까?그 대답을 이 책은 20세기에서 제시하고 있다. 즉 일본의 전쟁범죄에 대한 무책임한 회피를 그 예로 들고 있다. 프로이트가 '우리는 모두 유서깊은 살인자의 후예'라고 한 말은 이중의 진실을 반영하고 있다. 우리가 살인자의 후예가 된 것은 오직 단 한번의 살인에 의해서였다. 마찬가지로 그리스도교에서 말하는 원죄 역시 한번의 죄에 의해 우리가 짊어진 것이다. 우리들이 살인자의 후예라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 살인을 반복적으로 저지를 필요는 없는 것이다. 다만 우리의 몸에 그 피가 흐르고 있다는 사실만을 고백하는 것만으로 현실의 살인을 벗어날 수 있는 것이다. 그리스도교에서는 원죄를 세례로 씻어낸다. 즉 카인의 죄를 인정함으로서 살인의 악순환에서 벗어날 수 있다는 것이다. 일본인들에게도 이런 자세가 필요한 것이다. 일본인들은 핵무기의 사용이 카인의 살인처럼 인류역사에 단 일회성으로 시도되었고, 그 결과 자신들이 범죄자의 후예가 되었다는 점을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 오히려 그들은 희생자로 탈바꿈하고 있다는 점이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왜 독일이 아니고 일본이었는가에 대한 답을 찾지 못하는 일본은 스스로 부조리한 상황에 직면하게 되었다. 그 대답은 잘못의 인정과 부인의 차이라고 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