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제불능의 인간들을 위한 기도

 

서둘러라 시간이여,

멈칫거리지 말고 그들을 저 어처구니없는 현장으로 이끌라.

그렇지 않고는 그들은 믿지 않으리라.

그들은 보아야 한다, 얼마나 자신이 몰이해했는지를.

달리 가르칠 방법이 없다,

그들도 얼마든지 이해할 수 있다는 것을.

서둘러라, 그들을 온전히 썩게 하라,

그래서 그들을 저 참혹한 무의 나락으로 이끌라.

그렇지 않고는 그들은 네 말을 믿지 않으리라,

그들이 썩어 있음을 지적하는 네 말을.

이 어리석은 자들은 결코 뉘우치지 않으리라,

직접 충격을 받아보기 전에는.

이들은 결코 뉘우치지 못하리라,

직접 두 눈으로 자신의 부패함을 보기 전에는!

                                                      -횔더린-

우리안의 히틀러, 막스 피카르트, 우물이 있는 집, p1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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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안의 히틀러
막스 피카르트 지음, 김희상 옮김 / 우물이있는집 / 2005년 8월
평점 :
절판


 

히틀러의 추종자와 우리들 사이에는  어떤 유사성이 있을까?


만약 누가 이런 질문을 한다면 많은 사람들은 자신이 히틀러의 추종자와 절대로 유사하지 않다고 답변할지 모른다. 그리고 약간은 그런 성향이 있을지도 모르겠다고 할 것이고, 아주 극소수는 침묵으로 일관할지도 모른다. 왜냐하면 자신이 그런 성향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들키고 싶지 않으니까.


사실 히틀러만큼 현대사의 인물 가운데 부정적인 이미지를 가지고 있는 사람도 드물다. 강제수용소를 만들고, 인종청소를 계획하고 실행했으며, 집단학살을 명령한 사람으로서 히틀러는 언제나 거론된다. 하지만 역사 속에서 히틀러보다 더 잔악한 행위를 한 사람들도 많다는 점이다. 그럼에도 왜 우리는 히틀러에게 모든 것을 덮씌워야만 직성이 풀리는 것일까? 히틀러가 두렵기 때문은 아닐까?


히틀러가 두려운 이유는 추종자가 있기 때문이다. 애초부터 히틀러는 존재하기 위해서 추종자가 있어야만 했다. 그 추종자들의 모습을 이 책은 고발하고 있는 것이다. 즉 히틀러를 통해서 대리 만족을 체험한 인간들을 고발하고 있는 것이다.


이 책의 저자인 피카르트는 히틀러 시대를 '맥락이 없음Zusammenhangslosigkeit'이라는 읽기도 어려운 독일어 단어로 표현하고 있다. 이 말은 엄밀하게 정의하자면 앞과 뒤가 연결되지 않는 다는 의미이다. 국가의 이익이 집단의 이익으로 변질되고, 집단의 애국심이 개인에 대한 충성심으로 변질되는 제3제국의 모습을 상상한다면 이 '맥락이 없음'이란 단어가 어떻게 사용되고 있는지를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대중들은 이런 '맥락이 없음'이라는 사실에 왜 쉽게 현혹되는가. 그것은 기억을 상실하고 순간에 사로잡혀 있기 때문이라고 분석하고 있다. 상호 통교를 해야만하는 언어는 체제의 구호로 전락하고 개인의 한마디가 아무런 검증없이 진리로 대체되면서 집단은 쉽게 '맥락이 없는'사회를 용인하게 되는 것이라고 보았다. 독재자는 이런 상황을 자신에게 유리한 새로운 질서를 창출하는 호기로 이용을 하는데 그 새로운 질서는 상징체계가 아닌 기호가 지배하는 사회가 되어 버린다. 저자는 나치의 갈고리십자가-하이켄크로이츠-를 다음과 같이 묘사한다. "하이켄크로이츠는 상징의 정반대이다. 그건 명령이다. 쇳조각으로 굳어진 지도자의 고함이다"라고 보았다. 피카르트의 시각으로 보자면 예수의 상징인 십자가는 '구원'이지만, 나치의 상징은 갈고리십자가는 '공허함'으로 보았던 것이다. 상징이 의미를 상실했다면 그것은 어쩌면 '짠 맛을 상실한 소금'과 같은 것이 아니었을까.

저자는 우리 안의 히틀러를 경계하는 것은 '내면의 일관성'을 유지하는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 이렇게 함으로서 외적 조건을 새롭게 창출할 수 있다고 보고 있다.

저자의 이런 주장은 책의 뒷부분에서 피카소의 추상미술과 장 폴 사르트르의 실존철학을 비판하는 데서 확연하게 드러난다. 물론 이 책이 1946년에 출판된 것을 감안하더라도 당시 지식인들이 본 추상미술과 실존철학의 이해도를 알 수 있다. 당시 지식인들에게 이 미술과 철학은 경박해 보였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 미술과 철학은 내적 일관성을 유지하면서 하나의 외적 조건을 창출하여 현대 예술과 철학의 주류로 자리를 잡았다는 점이다.

이것은 삶을 길게 보면서 끈기를 가지고 바라본다면 진정한 역사의 연속성 속에 자신을 위치시킬 수 있다고 말하는 것과 같다. 이 연속성은 과거를 사랑할 때 과거는 현재를 만나며 미래를 향해 문을 열어 주는 것이다. 즉 역사의 일관성 속에 우리를 위치시킬 때 히틀러와 같은 괴물을 우리 자신 속에서 몰아낼 수 있는 것이다.

자신 속에 히틀러가 있는지 어떻게 알 수 있을까? 저자는 이해관계가 첨예하게 대립하는 공동체를 예로 든다. 서로가 서로를 이용하려고만 하는 사회, 결국 이런 상황 속에서 인간관계는 짜증과 환멸로 바뀌고, 상대를 향해 증오의 감정을 드러내며 소리를 지르는 '나'를 발견하게 된다면 그것이 바로 '내 안의 히틀러' 혹은 '우리 안의 히틀러'라는 것이다.

이 책을 읽으면서 내내 머리 속에 맴도는 생각은 '정말로 우리는 히틀러를 극복했을까?'하는 생각이었다. 어쩌면 우리 사회는 또 다른 히틀러를 기다리는 증오의 사회로 변해가는 것은 아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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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팀전 2006-09-22 22:4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서로가 서로를 이용하려고만 하는 사회, 결국 이런 상황 속에서 인간관계는 짜증과 환멸로 바뀌고, 상대를 향해 증오의 감정을 드러내며 소리를 지르는 '나'를 발견하게 된다면 그것이 바로 '내 안의 히틀러' 혹은 '우리 안의 히틀러'라는 것이다.//
우리 사회가 그렇네요.점점 정글화되어 가는... 사회적 갈등과 그에 대한 대처가 히스테릭한 수준에 이르고 있으니 결국 야수적 폭력성이 배양되기 좋은 조건을 갖추고 있네요... 추천합니다.
 

 

中世의 飮食



 6세기부터 적어도 10세기까지 유럽 경제는 곡물 재배와 자연 자체로부터 자원을 추출하는 방식이 혼합된 특징을 갖고 있었다... 음식은 시장보다는 현장에서 찾아야 했고, 어업은 바다에서보다는 늪지나 강, 호수에서 더 큰 규모로 이루어졌다... 이 시대는 사람들이 다양한 음식에 의존할 수 있었던 때이다... 그렇지만 이와 같은 공동의 문화 속에서도 화해할 수 없는 분열이 유지되었으며 작지 않은 사회적 차이가 불거졌다.

                                                                 -맛시모 몬타나리의 “유럽의 음식문화” 가운데서-




  중세만큼 삶이 공평하면서도 불합리한 시대는 없었을 것이다. 귀족과 농민은 중세의 조악한 삶을 공유했지만 그 혜택에 있어서는 서로 달랐다. 중세의 모든 사람들은 삶의 리듬이라는 관점에서는 평등했다. 태어나서 자라고 죽는다는 것은 귀족이나 농민이나 별 다른 것이 없었다. 농민들은 허리가 휘어지도록 일을 하다 평균 45세 정도가 되면 삶을 마감하였다. 귀족 역시 평균 수명에 있어서는 농민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이들 역시 끊임없는 전투 속에서 살았기 때문이었다. 오히려 귀족들의 평균 수명이 농민들 보다 적을 수도 있었다.

  하지만 이런 공평함 속에서 중세는 귀족과 농민의 삶을 갈라놓는 제약이 무수하게 존재하였다. 이 가운데서도 가장 적나라하게 드러나는 것이 옷차림과 식탁이었다. 특히 식탁의 경우 귀족과 농민의 차이는 엄청났다.

  인구의 90%가 농민이었던 중세는 근본적으로 농업사회였다. 중세의 농민들은 장원이라는 특수한 제도 아래서 농민, 소작농, 혹은 농노로 살아갔다. 특별한 이유 없이 신분이 변동하는 일은 없었다. 부모가 농민이면 자식도 농민이었고, 부모가 대장장이면 자식도 대장장이가 되어야만 했다. 신분의 세습은 중세를 요지부동의 계급적 질서 속에 묶어 놓는 역할을 하였다. 이렇게 농업사회였던 중세가 만성적인 식량부족에 직면해 있었다는 사실은 믿기 힘든 일일지 모른다. 하지만 중세는 아메리카 대륙에서 감자를 수입해 대대적으로 재배하기 전까지 농민들은 언제나 허기진 상태로 지내야만 했다. 감자가 밀, 보리, 귀리의 대용식품으로 혹은 보조식품으로 자리를 잡으면서 중세 유럽인들은 비로소 굶주림의 공포에서 벗어났던 것이다.

  중세 유럽 소수의 농민들은 대맥大麥-보리-으로 만든 거칠고 검은 빵을 먹었다. 그렇지 못한 다수의 농민들은  가축의 먹이로 재배한 귀리를 죽으로 쑤어 먹어야만 했다. 반면에 귀족들은 소맥小麥-참밀-으로 만든 부드럽고 하얀 빵을 먹었다. 그러나 귀족이 먹는 빵이나 농민이 먹는 빵은 기술적인 요인으로 인해 딱딱한 점에서는 공평했다. 그렇기에 빵을 먹을 때 딱딱한 빵을 부드럽게 넘어가게 하는 음료가 필수적이었다. 귀족들은 포도주나 과일주로 농민들은 걸쭉한 맥주로 이를 대신하였다.

  중세의 사람들이 빵 다음으로 많이 먹었던 음식은 콩 종류로 만든 것이었다. 특히 누에콩이나 완두콩을 많이 애용하였다. 콩은 중세 사람들에게 일석이조의 식품이었다. 부족한 단백질을 보충해 주는 동시에 토양의 지질을 회복시켜주는 식물이었기 때문이었다. 여기에 귀족들은 사냥한 신선한 고기를 곁들였고, 농민들의 경우에는 가을철에 도살한 염장 돼지고기를 곁들였다.

  이런 음식의 차이에도 불구하고 조리법은 거의 공평한 수준이었다. 귀족이나 농민이나 채소는 걸쭉할 때까지 끓여 여기에 여러 가지 재료를 집어넣어 되직하게 하여 진한 스프를 만들어 먹었다. 그리고 고기를 먹는 경우에는 오직 삶아서 먹었다. 하지만 고기도 신선한 것이 드물었다. 그래서 고기 요리에 향신료를 집어넣었는데 이런 특권은 귀족들만이 누릴 수 있는 사치였다. 이렇기에 귀족들의 고기 요리는 고기 본래의 맛을 느낀 다기 보다는 다량의 향신료의 맛을 즐기는 형국이었다. 하지만 농민들은 이런 사치를 꿈꿀 수조차 없었다. 농민들은 조악한 음식이라도 양적으로 풍족하기만을 바라였기 때문이었다. 이런 몰개성적인 요리로 인해 귀족들은 농민들과 차별을 두기 위해 요리상에 다채로운 장식을 하였다. 장식을 위해서 사용된 새는 꿩이 무난하였지만 어떤 때는 백조나 공작을 사용하기도 하였다.

  농민들은 이런 음식의 불공평을 이야기를 통해 해소하였다. 즉 환상의 음식 세계에 몰입하였던 것이다. 그래서 이 당시에 나온 우화시나 우화 속에 묘사되는 음식의 종류는 거의 환상적이기 까지 하다. 우리는 중세의 이런 흔적을 근세 유럽에서까지 발견할 수 있다. 그 대표적인 것이 ‘헨델과 그레첼’의 이야기에 나오는 과자집이다. 이런 음식에 관한 우화가 종국에는 중세인들이 꿈꾸는 유토피아의 세계 속에 흡수되는데 이것은 종교적 유토피아의 세계가 세속의 유토피아 세계로 변질되는 중요한 원인이 된다는 점이다.

  중세의 이런 공평한(?) 음식문화에 반발이라도 하듯 각 지역에서는 그 지역만의 특징을 지닌 치즈가 생산된다. 중세시대에 노르망디 치즈나 브리Brie 치즈나 파르마 치즈와 같은 것이 유명세를 타기 시작하였다. 이런 치즈문화는 “만성적 지방결핍脂肪缺乏”의 사회였던 중세에 어떤 대리 만족을 주는 것이었는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중세인들은 어떤 요리방식을 이용하였을까? 중세인들은 굽기, 끓이기, 튀기기, 뭉근한 불로 오래 끓이기와 같은 방식을 사용한 것으로 보인다. 이런 중세인들의 요리법 가운데 18세기까지 유지된 것이 있는데 그것은 고기를 로우스트로 굽기 전에 오래 동안 푹 끓이거나 삶는 방식이었다. 중세 사람들이 이렇게 한 것은 냉동법이 미숙하던 당시에 고기 표면에 생길 수 있는 미생물의 증식을 미연에 방지하기 위한 것이었다. 이런 위생적인 방식은 부수적으로 고기의 맛을 부드럽게 하였고, 진한 국물을 얻을 수 있었다. 

  중세의 기록이나 그림을 보면 식탁에 통째로 요리되어 올리는 짐승 요리가 자주 등장한다. 이것은 일상적인 것이 아니라 귀족들이 손님을 초대하였을 경우 등장하는 특별요리였다. 귀족들이 이렇게 특별식을 먹는 동안 농민들은 잡탕식 스프를 즐겨 먹었다. 가난한 사람들에게는 검은 빵 조차도 사치스런 음식이었다. 이들은 주변에서 쉽게 구할 수 있는 온갖 재료를 함께 섞어 재료가 흐물흐물할 때까지 끓여 먹었다. 농민들이 이렇게 음식을 조리한 것은 부실한 영양 상태로 인해 치아의 상태가 좋지 못한 이유도 있었다.

  영주는 언제나 농민들이 생산한 것 가운데 최상의 것만을 요구했기 때문이다. 이 결과 농민들은 일생동안 딱딱하고 조악하고 질이 낮은 음식을 먹어야만 했다. 그래서 농민들의 치아는 쉽게 마모되었고 만성적인 영양실조에 처해 있었다. 이런 조건에서 현대의 기준으로 볼 때 감기 정도의 질병도 곧잘 폐렴으로 전이되어 목숨을 잃기 십상이었다. 그래서 중세의 농민들은 풍족할 때 많이 먹어두는 것이 상책이었다. 당시 지식층이었던 수도자들은 이런 농민들이 무척 게걸스러웠다는 식으로 표현하고 있다. 이들의 지적은 반은 정당한 것이었지만 반은 부당한 편견의 시각이었다. 왜냐하면 기근이 닥치거나 수확량이 부족할 경우 농민들은 초근목피草根木皮로 삶을 연명하고 주변에 보이는 모든 것-참새, 고양이 등-을 무차별적으로 잡아먹었다. 농민들의 이런 열악한 상태는 전염병이 돌면 가장 먼저 희생양이 되는 한 원인이었다. 이런 농민들의 사정은 고고학적 발굴에 의해서도 증명되고 있다는 점이다. 집단 매장지에서 발굴된 8세기 농민들의 유골의 대부분은 거친 곡물로 인해 이빨이 심하게 마모되어 있었고, 구루병의 흔적이 있었으며, 뼈의 상태로 보아 상당히 젊은 나이에 사망하였다는 사실이 드러났다. 

  중세의 농민들은 현재 우리들이 일상적으로 섭취하는 커피, 차, 코코아, 담배, 토마토, 감자, 강낭콩, 옥수수와 같은 것은 알지도 못하였다. 이런 음식들은 유럽이 팽창하면서 아시아와 아프리카 그리고 아메리카로 확장하면서 들어온 것이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쌀과 같은 논 작물은 거의 재배되지 않았다. 대신 위도에 따라 다양한 밀/보리 작물이 재배되었다. 이렇게 재배된 작물은 앞에서 언급했듯이 귀족들은 밀을 농민들은 보리를 주식으로 삼았다.

  중세의 농민들이 필요한 지방과 단백질은 식물과 동물을 통해서 얻었다. 식물성 기름으로 농민들이 중요시했던 것은 유채씨 기름과 아마씨 기름 그리고 올리브기름이었다. 올리브기름의 경우에는 지중해 지역을 중심으로 사용되었고 아마와 유채의 기름은 북부지역에서 이용되었다. 그리고 동물성 기름은 돼지비계나 돼지 굳기름을 사용하였다. 생선은 가공의 어려움으로 인해 생활 공동체와 가까운 민물이나 양어장에서 기른 민물생선을 많이 먹었다. 바다 생선으로는 대구와 청어를 주로 먹었다. 이 두 생선은 염장이나 건조로 오래 보관할 수 있게 가공하여 중세 내내 농민들의 식탁에 올랐다. 그리고 렌즈 콩, 누에콩, 완두콩, 땅콩, 밤, 버섯 등으로 농민들은 부족한 지방과 단백질을 보충하였다. 이것 외에도 중세의 농민들은 계란과 우유를 가공한 치즈를 자신들의 식탁에 올려 부족한 영양분을 보충할 수 있었다.

  유럽은 땅의 척박함으로 인해 중세의 농민들은 과일을 다양하게 섭취할 수 없었다. 당시 유럽에서 생산되는 과일은 사과가 유일한 것이었다. 귀족들을 위해 과수원에서 특별히 재배되는 과일로는 배, 호두, 복숭아 등이 있었는데, 이것들은 거의 귀족들이 소비하였다. 대신 농민들은 산이나 들에서 나는 야생 과일-딸기, 모과, 산딸기 등-을 애용하였다. 이에 비해 채소는 풍족한 편이었다. 파, 당근, 근대, 순무, 치커리, 배추, 상추, 크레송, 아스파라거스, 파셀리, 양파, 운향, 쑥, 미나리, 샐비어, 두견초 같은 것을 이용하여 요리를 하였다.

  중세인들이 가장 많이 애용하던 음료는 물론 물이었다. 당시 중세인들은 나름대로 물에 등급을 매겨 음용하였다. 중세인들이 가장 좋은 물로 인식하였던 것은 광천수였다. 그다음으로는 빗물, 강물, 샘물, 우물물, 호수물의 순서로 등급을 매겨 놓았다. 중세인들 역시 고여있는 물보다는 흐르는 물이 대기에 노출된 물보다는 지하에 감추어진 물이 인체에 좋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고, 고인물도 끓여서 보관하면 쉽게 변질되지 않는다는 사실도 알고 있었다. 끓인 물은 장시간 보관할 수 있지만 살아있는 물보다 맛이 떨어진다는 사실도 중세인들은 알고 있었다.

  유럽의 좋지 않은 음료수 사정으로 인해 중세인들은 알코올성 음료도 애용하였다. 가장 흔하게 애용하던 알콜올성 음료는 포도주였다. 포도주는 중세 유럽 전 지역에서 애용되었지만 오랜 기간 동안 보관할 수 없다는 단점이 있었다. 하지만 그리스도교 세계인 중세에 포도주는 그리스도의 성혈이라는 상징성을 가진 영적인 음료로 가장 중요하게 취급되었다. 그리고 고대부터 애용되어 왔던 맥주가 있다. 맥주는 곡물을 발효시켜 만든 발효주로 음료라기보다는 새참의 성격이 강한 음료였다. 이런 맥주가 15세기 들어와 독일 지역에서 호프를 사용하여 술을 빚기 시작함으로서 순수한 음료로 다시 태어나게 되었다.

  이런 중세의 음식에서도 질의 문제는 일부 귀족들에게 해당하는 것이었고, 대다수의 농민들에게는 조악한 식사일망정 양껏 먹어 보는 것이 소원이었다. 중세 유럽인들은 우리들이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단순하고 조악한 음식을 섭취하였다. 한 예로 사냥감이 풍부하였던 중세 스웨덴의 귀족들도 식탁의 2/3 혹은 3/4를 곡류로 채웠다는 사실이다. 이런 예로 미뤄볼 때 농민들의 식탁은 더 열악했다는 것을 추측할 수 있다. 중세 유럽에서 곡물의 생산성은 곡식 한 알 당 4.3배의 수확을 얻은 것으로 보인다.

  종교적으로 단일한 세계였던 중세의 음식은 지역별로 상당히 차이를 보였다. 북유럽-독일과 잉글랜드-의 경우 육류 중심의 음식소비 성향을 보이지만 남유럽-프랑스와 이탈리아-의 경우 과일이나 채소와 같은 식물성 위주의 식단이 주류였다. 그리고 음식을 조리할 때도 북유럽에서는 동물성 기름인 버터를 주로 사용한 반면 남유럽에서는 식물성인 올리브기름을 사용하였다. 음료도 맥주와 포도주 시음권이 확연히 구분되었다. 포도주가 남유럽 중심의 라틴지역이라면 맥주는 북부의 게르만 지역에서 널리 애음되었다.

  중세 유럽의 이러한 음식 성향은 르네상스 이전까지 바뀌지 않았다. 그 이유는 중세 유럽이 아직은 중동과 동아시아에 비해 후진국이었고 자신의 힘을 여타지역으로 확장해 나갈 수 있는 여력이 아직 없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유럽은 인구의 증가와 지질의 하락으로 인한 생산성의 하락과 같은 경제적인 이유로 인해 내적 동요가 일어나고 있었다. 이런 중세 유럽이 자신의 팽창을 처음 보여준 것이 십자군 사건이었다. 십자군을 통해 유럽은 그때까지 열세에 있었던 이슬람과의 관계를 일거에 동등한 위치로까지 격상시켜버렸던 것이다. 이 결과 유럽은 그동안 이슬람권에 의해 통제되었던 동방과의 무역에서 어느 정도 주도권을 쥘 수 있었고, 이런 것을 통해 중세 유럽의 각 분야에 다양한 바람이 불어올 수 있었다.

  중동과 동방으로부터 다양한 요리의 재료와 기술 그리고 향신료 등이 유럽으로 밀려들면서 유럽인들은 자신들의 입맛을 조금씩 근대화 시킬 수 있었다.  

  하지만 중세 유럽인들은 이런 문화적 혜택을 받기 이전에도 동시대의 이슬람과 극동 지역 사람들과 비교할 때 육류의 소비량이 높았다는 점이다. 그런데 고기는 곡식과 비교할 때 동등한 가치를 창출하기 위해 무려 5배 이상의 곡물소비가 필요하다는 점이다. 이런 이유인지는 몰라도 중세 유럽의 농민들은 만성적인 기아에 시달리고 있었다. 유럽이 만성적인 기아를 벗어나는 계기가 된 것은 14세기 페스트의 대 습격이 끝난 뒤부터라는 점이다. 급격한 인구의 감소와 경작지의 증가-땅이 늘어난 것이 아니라 인구감소로 인한 일인당 경작면적의 증가- 그리고 유럽의 팽창정책으로 인한 부의 유입은 육류생산으로 인한 곡식소비의 낭비에서 오는 농업적 불균형을 어느 정도 감당할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중세 유럽에서 키웠던 가금류 가운데서 가장 널리 이용한 것은 돼지였다. 돼지는 주로 방목을 통해 사육되었다. 숲 속에 놓아기른 돼지는 가을이 되면 도살되어 겨울용 식량으로 비축되었다. 하지만 귀족들에게 겨울은 사냥의 계절이었다. 이를 위해 중세의 귀족들은 장원의 한 부분을 자신의 전용 사냥터로 남겨두었다. 사냥터는 여러 가지 목적으로 사용되었다. 가장 중요한 것은 육류를 보충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이를 해결하기 위한 과정에서 부수적으로 사냥기술을 익혔는데 이것은 기사들이 전장에 나가 유용하게 써먹을 수 있는 기술이 되었다. 귀족들의 사냥터는 이렇게 식량과 훈련이라는 목적을 충족시키기 위해서만 존재했던 것이다. 유휴지나 다름없는 사냥터는 농민들에게 언제나 유혹으로 다가왔다. 농민들은 귀족들의 사냥터에서 불법적으로 꼴을 베거나 사냥을 하였는데 이런 행위가 적발되면 그 자리에서 처형되었다. 이런 가혹함으로 인해 당시 농민들은 귀족들의 사냥터를 증오하였다. 사냥터의 짐승들도 이런 사정을 알고 있는지 당시 기록에 보면 사냥터의 짐승들은 농민들이 가까이와도 도망가지 않을 정도였다고 한다. 굶주림이 극심해지면 농민들은 영주의 사냥터에서 산토끼와 같은 조그만 짐승을 몰래 사냥하여 부족한 식량을 대신하였다. 하지만 이런 방식이 일상적인 것은 아니었다. 왜냐하면 영주의 사냥터나 양어장에서 짐승이나 물고기를 잡으려면 자신의 목숨을 담보해야 했기 때문이다.

  이 사냥터의 문제는 중세 귀족과 농민들의 육류 섭취에도 큰 영향을 끼쳤다. 귀족들은 사냥하여 잡은 신선한 고기를 먹었다. 귀족들은 농한기를 이용하여 사냥터에서 자신들의 취미를 연마하였기 때문이다. 반면 농민들은 언제나 염장한 고기만을 먹어야만 했다. 이 결과 육류의 소비에 있어서도 귀족과 농민의 구분이 확연히 드러나게 되었다. 귀족들은 살아있는 신선한 고기를 먹는 반면 농민들은 절인 고기를 소비하였던 것이다. 이런 현상은 어류의 경우에도 그대로 적용되었다. 귀족들은 자신들의 저수지나 양어장에서 기른 민물고기를 먹은 반면 농민들은 염장하거나 말린 대구나 청어와 같은 바다 생선을 먹어야 했다.

  이렇게 중세의 귀족과 농민들은 동등한 환경 속에서 살아가면서도 결코 똑같지 않았다. 귀족과 농민들의 삶은 계급사회 속에서 결코 융합되지 않았다. 이들의 삶은 염장고기와 신선한 고기만큼 구분되는 것이었다. 누구나 고기를 먹을 수 있었지만 한쪽은 신선한 고기를 다른 한쪽은 퀴퀴한 냄새가 나는 고기를 먹어야만 했다. 음식에서만큼 중세의 차이를 확연하게 구분해 주는 것이 어디 있을까?

  

  

   

1) 현대의 오트밀oatmeal이다. 귀리에는 최고 양질의 단백질과 라이신이 함유되어 있다. 귀리를 빵으로 만들었을 때 불포화지방산이 80%정도로 높아져 현대인들에게는 다이어트 식품으로 각광받고 있다.  

2) 콩과 식물들은 뿌리에 혹박테리아가 기생하는데 이것은 대기 중의 질소를 이용하여 식물에 유용한 영양물을 만든다. 이를 질소고정이라 한다.

3) 귀족들의 경우에도 사냥이 힘든 겨울에는 염장고기를 먹어야만 했다. 이 염장고기는 오래 저장해 두었기 때문에 요리를 해도 역한 냄새가 제거되지 않았다. 그래서 이를 상쇄하기 위해 다량의 향신료를 사용하였다. 당시 귀족들이 사용하는 향신료의 량은 지금 우리들의 상상을 초월할 정도였다.

 4)맛시모 몬타나리, 유럽의 음식문화, 새물결, pp150이하 참조.

 5) 한스 트랙슬러, 황홀한 사기극, 이룸. 이 책의 진실성에 관한 선택은 중세의 삶에 대한 진실성을 가리는 것만큼 어렵다. 다만 확실히 이야기할 수 있는 것은 한 부분을 이해하는 실마리가 될 수 있다는 것이다.

 6) 김복래, 프랑스인들의 식관습과 문화에 대한 역사적 기행, 외대사학 6권 1호, pp31-54참조.

 7) 이른바 포타쥐pottage라고 부르는 스튜이다. 이 음식은 농민들의 텃밭에서 기르던 콩 종류와 양파를 넣고 끓인 것으로 중세 농민들이 손쉽게 먹을 수 있는 음식이었다. 이것을 농민들은 주식으로 상용하였다.

 8) 중세 농민들은 고양이를 지붕 밑의 토끼라고 불렀다.

 9) 여기에 대해서는 고고학 탐정 유럽편을 참조할 것.

 10) 잉어, 숭어, 연어, 장어 종류를 많이 먹었다.

 11) 대략 하루 염분 섭취량은 5그램 정도이다. 그런데 중세인들은 대략 10그램 정도를 사용하였는데 이는 현대의 한국인이 소비하는 염분 섭취량과 비슷한 수준이다.

 12) 이 맥주를 에일ale이라고 부른다.

 13) 귀족들의 사치스런 음식의 예는 "서양 중세의 삶과 생활" 42쪽을 참조할 것. 여기에는 24가지의 요리가 후식과 함께 여섯 번에 걸쳐 나오는 요리 목록이 나와 있다.

 14) 반 바쓰Van Bath의 연구에 따르면 중세 유럽에서 1헥타르 당 대략 640리터의 밀을 생산하였을 것으로 보고 있다. 중세 프랑스는 대략 천만 헥타르의 농경지가 있던 것으로 추정되는데 여기서 생산된 곡물은 대략 64억 리터로 5천1백만 톤 정도가 된다. 이 생산량은 18세기 프랑스의 밀 생산량 1백억 리터에 거의 근접한 것으로 볼 수 있지만 여기서 간과한 것은 중세 유럽은 3포식 농업을 행하고 있었다는 사실이다. 그러므로 중세 프랑스의 밀 총생산량은 크게 잡더라도 3천 4백만 톤 정도가 되는데 이는 18세기 프랑스의 40퍼센트 수준에 불과하다. 그런데 이 가운데 파종용으로 남겨두는 1/4의 곡식을 제외하면 년 밀 총생산량은 8백만 톤에 불과하다. 이를 당시의 프랑스 인구로 나눠보면 일인당 6백 그램의 밀이 돌아가는 정도이다.

 15) 페스트 이후의 중세 유럽을 보려면 다음의 책을 참조할 것. 아노 카덴, 전염병의 문화사, 사이언스북, 4-5장 참조. 필립 지글러, 흑사병, 한길히스토리아.

 16) “로빈 후드”나 “아이반호”와 같은 소설에 등장하는 중세 잉글랜드 귀족의 영지에 대한 묘사는 당시의 상황과 비교해 볼 때 아주 순화되어 묘사되어 있다는 점이다. 그럼에도 그 낭만의 이면에는 당시 농민들의 숨길 수 없는 고통이 적나라하게 드러나 있다.

 17) 이런 중세에 특이한 집단이 있는데 그것은 상인계급이다. 이들은 수는 적었지만 동방과의 무역으로 얻은 부를 자신들의 삶의 질을 향상시키는데 사용하였다. 그래서 중세 상인들은 귀족들과 거의 유사한 생활을 하였다. 하지만 귀족과 다른 점이 있다면 그것을 드러내놓고 여유롭게 즐길 수 없었다는 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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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09-18 12:59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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잉카인들의 세계관은 아주 단순했다. 선한 자는 태양의 세계로 갈 것이고, 그렇지 못한 자는 지하 세계로 가는 것이었다.

그렇다면 잉카인들에게 선한 인간이란 어떤 사람이었을까? 그들은 당연히 아무런 흠집도 없는 아이들이 선한 인간이라고 보았다. 그래서 잉카인들은 선한 아이들의 행복을 위해 이들을 태양의 나라로 빨리 보내주려 하였다. 이 결과 잉카인들은 아이들을 태양의 신전에서 제물로 받쳤다.

흠없는 아이의 피를 받은 태양의 신은 그 댓가로 자신의 빛을  이 지상에 비춰준다고 잉카인들은 믿었다. 이 재물은 한번으로 끝나는 일회성의 잔치가 아니었다. 이것은 매일 매일 반복되는 피의 제사였다. 그것은 어찌보면 거룩한 범죄였던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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밀란 쿤데라의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1988년 초판본-은 1968년 체코슬로바키아-당시에는 체코와 슬로바키아가 한 나라였다-사태를 심도깊게 다루고 있다. 슬로바키아인이었던 서기장 두브체크가 '인간의 얼굴을 한 사회주의'를 주장함으로서 서구 지성인들은 공산주의도 변화의 여지가 있다고 생각하였다. 하지만 소련은 바르샤바 동맹군을 동원하여 '프라하의 봄'을 싹부터 잘라버렸던 것이다. 그리고 정확히 23년만에 러시아의 공산주의가 붕괴하면서 동유럽의 공산국가는 무너지고 말았다.

1968년 당시 체코슬로바키아의 인민-당시에는 시민이 아니었다-들은 두브체크를 지지하며 용감히 저항하였다. 그리고 바르샤바 동맹군이 침공하자 도로의 표지판을 바꾸고 도시의 거리 표지판을 없애버렸다. 그것은 침공군이 혼란에 빠지게 하려는 의도였다. 그 의도는 처음에는 잘 들어맞았다. 소련과 동맹군들은 지도와는 전혀 다른 장소가 나타나기에 혼란에 빠졌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뿐 침공군은 자신들의 편의에 따라 거리의 이름을 바꿔 버렸다. 결국 체코슬로바키아는 저항이라는 댓가를 위해 이름을 잃어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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