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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세기 유럽사
박은구 외 / 탐구당 / 1987년 5월
평점 :
품절
이 책은 특이하게도 14세기에 한정된 중세 유럽을 보여주고 있다. 14세기는 어떤 시대일까? 14세기는 잉글랜드의 에드워드 1세로부터 대립교황인 요한23세의 죽음으로 막을 내리는 시기이다. 이 시기는 백년전쟁, 흑사병, 농민반란과 오스만투르크의 유럽침공, 교회의 분열과 페트라르카와 위클리프가 살고 죽었던 시대였다.
이 시대는 위의 예에서 처럼 역경의 시대이면서 동시에 새로운 기운이 싹트는 시기였다. 귀족들은 농민들의 반란에 직면했고, 교회 역시 교황청의 분열로 야기된 지도력의 약화와 개혁주의자들의 끊임없는 도전에 고심하는 시기였다.
중세의 장원경제는 3세기 동안 상승곡선을 그으며 성장하였다. 장원의 자급자족경제는 12-3세기동안 인구증가를 가져왔다. 그리고 이에 병행하여 경작지개간에 전력을 기울이므로서 식량생산도 비약적으로 향상되었다. 하지만 경작지의 지력이 고갈되면서 식량생산이 감소될 기미를 보이자 중세인들은 원래의 경작지에 집약적인 노동력을 투입하고 농업기술을 향상시킴으로서 식량생산을 감소시키지 않고 증가시킬 수 있었다. 그러나 흑사병이 14세기 중엽 유럽을 강타하면서 인구가 감소하고 경작지가 방치되면서 3세기동안 이루어놓았던 농업기반이 붕괴될 지경에 이르렀다. 하지만 흑사병은 노동력의 감소와 이에 따른 노동력 품귀로 농노의 해방에 기여하는 효과도 가져왔다. 흑사병은 농업뿐 아니라 당시의 산업인 양모산업에도 큰 영향을 미쳤다. 이 산업에도 노동력의 감소로 인해 그동안 집약적으로 이루어지던 작업이 물레방아와 같는 동력을 이용하는 방향으로 선회하였던 것이다.
14세기는 앞으로 여러 세기 동안 영향을 미칠 집단이 형성된 시기이기도 하다. 이른바 하층민이라 불리우는 집단이 광범위하게 참여하는 반란의 독자적 압력집단으로 성장한 시기이기도 하다. 하층계급은 수적으로 우세하였지만 상층계급의 조직과 자원에 밀리고 자신들 하층민집단 내의 분열과 이념부재로 인해 실패하였다(이에 관해서는 오르테가 이 가세트의 '대중의 반란'을 참조할 것). 그리고 흑사병으로 인해 사회 전반에 걸쳐 "Memento Mori(죽음을 잊지말라)"로 대표되는 이념이 지배하였다. 이 결과 14세기 예술에서는 병적이고 비판적인 양식이 강조되었고, 종교에서도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 그리고 승리에서 죽음과 슬픔과 공포의 주제로 바뀌었다. 이 결과 종교 예술은 그리스도의 십자가 처형이 주된 관심사로 떠오르게 되었다.
14세기의 가장 중요한 사건은 교황권에 대한 도전이 거세어졌다는 것이다. 14세기 이전까지는 유럽 왕국은 민족적 의식이 히미하였다. 이 결과 종교적 신앙이 민족감정보다 우선하였다. 하지만 14세기에 들어와 잉글랜드와 프랑스간의 백년전쟁을 통해 민족감정이 앙양되면서 교회의 신앙심이 더 이상 통용될 수 없었다. 이 결과 당시 교황 보니파키우스 8세는 프랑스의 필립4세와의 불화속에서 그를 파문했지만 2세기전 그레고리우스7세가 하인리히4세를 파문하여 얻은 효과를 기대할 수 없었다. 그레고리우스 7세는 카놋사의 굴욕을 통해 교황권의 우위를 확인했지만 보니파키우스8세는 아냐니의 치욕을 당했을 뿐이었다. 이제 교황의 파문은 전시대에서처럼 큰 반향을 불러일으키지 못하였다. 프랑스 국민들은 교황의 파문에 맞서 자신들의 왕과 국가를 수호하였던 것이다. 그리고 주교들 마저도 이런 국민적 감성을 무시할 수 없었다는 점이다. 이후 교황권은 유럽 전체가 아니라 이탈리아 내에 한정된 권력으로 남게 되었다는 점이다.
이런 상황 속에서 14세기에 유럽에는 앞으로 세계사에 중요한 흔적을 남길 잉글랜드와 프랑스 그리고 도이칠란트가 서서히 자신의 모습을 드러내게 된다. 이들 세 국가는 전혀 다른 정치적 길을 걸어가지만 강력한 민족주의 국가로 통합하는데 성공하여 하나의 국가를 형성하는데 성공한다. 물론 도이칠란트의 경우 더 오랜 세월을 기다려야 하지만.
그리고 14세기는 이제 교회의 영향력이 학문과 철학에서 서서히 그리스-로마의 고전에 자리를 양보하기 시작하는 시기이기도 하다. 지식인들은 그리스-로마의 고전을 자국어로 번역하여 르네상스로 가는 길을 준비한다. 14세기는 고대 로마가 남겼던 유산을 종교적 척도를 통해 해석하던 시기에서 인문주의자들과 종교개혁가들에 의해 좀더 다양한 해석을 가능하게하는 여지를 남겨두었다는데 큰 의미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