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도원의 탄생 - 유럽을 만든 은둔자들, 청년학술 57
크리스토퍼 브룩 지음, 이한우 옮김 / 청년사 / 2005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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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세 유럽을 형성하는데 가장 큰 역활을 한 것은 수도원이었다. 수도원은 믿음의 공동체이면서 문화의 보관소이며 신앙의 보금자리였다. 그리고 전교의 최전방이기도 했다. 이런 이유로 수도원은 하느님의 성채였으며 하느님이 지상에 존재하는 성스러운 장소였다. 마찬가지로 수도사들은 신앙인이면서 하느님의 투철한 전사이기도 하였다. 이런 수도원이 어떻게 유럽에 정착하였고 융성할 수 있었을까? 아니 그리스도교가 유럽 곳곳으로 전파될 수 있었던 것은 수도원이라는 존재가 없었다면 불가능했을지도 모른다. 유럽 수도원의 아버지는 누르시아의 성 베네딕트이다. 그는 초세기 은수자들의 독거형태의 생활을 집단적인 신심단체로 바꿨으며, 그 집단을 규제할 회헌을 제정함으로써 유럽의 수도원의 한 형태를 갖추게 하였다. 이후 그의 회헌은 수많은 수도원의 깃대종이 되었다. 중세 유럽의 수도원은 베네딕트의 회헌을 따르느냐 그렇지 않느냐로 구분될 정도였다. 중세시대 대표적인 네 수도단체-베테딕트회,아우구스티노 참사회,프란치스코회,도미니코회-는 각각의 특성이 있을지언정 베네딕트의 영향을 강하게 받았다. 베네딕트의 모범은 아마도 중국 불교에서 선종의 백장청규와 비교될 만하다. 백장청규는 선종이 무위도식하는 탁발이 아니라 자급자족하는 단체로 거듭나도록 하였다. 즉 일하지 않으면 먹지말라는 말처럼 선승들은 자신들의 노동을 통해 먹고 입고 수행을 해나가야만 했다. 이런 백장청규의 혜안은 당무종의 법난에서 다른 종파들이 큰 피해를 입었음에도 선종만은 큰 피해를 입지 않게 하였던 것이다. 마찬가지로 베네딕트는 초세기 은수자들처럼 세속을 피해 사막으로 나가 자신과 하느님을 만남만을 생각한 것이 아니었다. 그는 기도하고 일하라는 표어처럼 수도사들에게 노동과 기도를 통하여 하느님을 만나도록 이끌었던 것이다.

어느 종교단체든지 무형으로 시작하지만 세속적인 지지자들이 재물을 희사함으로써 무형이 거대한 유형의 재산으로 변하게 된다. 이런 변화는 필연적으로 창시자의 본 뜻을 왜곡하게 만든다. 이런 종교적 순환이 베네딕트가 세운 수도원에서도 일어났다는 점은 그리 놀랄만한 일은 아니다. 오히려 이런 왜곡 속에서 클루니 수도회와 시토회가 생겨나 베네딕트의 본 뜻을 시대에 맞게 적용하면서 수도원 문화를 더욱 풍부하게 하였다는 점이다. 베네딕트의 후계자들은 노동과 기도만으로 만족할 수 없었다. 그들에게 인간 예수 그리스도의 가난함이란 주제가 새롭게 떠올랐던 것이다. 이런 배경을 통해 탁발수도회인 프란치스코회와 도미니코회가 생겨났다는 점은 교회사적으로 아주 중요한 사건이라 할 수 있다. 그리스도의 가난을 따르려는 프란치스코회와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파하는 설교수도회인 도미니코회는 서로 이질적인 모습을 띠고 있으면서도 본질적인 면에서는 그리스도의 삶의 행적을 모방하였다는점이다. 이 두 수도회의 모습은 교회권력의 비대화로 인해 교회의 생동감이 떨어지기 시작하는 시점에서 나타났다는 점에서 나태한 교회의 모습에 새바람을 일으켰다. 그리고 이들 수도원은 여성들에게도 문호를 개방함으로서 여성의 지위향상에도 일정한 기여를 하였다. 물론 중세 후기로 가면서 여성들은 수도원 경영에서 배척되고 남성들이 주도권을 행사한다.

이렇게 중세의 수도원은 그리스도의 이샹을 구현하기 위해 노력하였다. 이들 수도원은 절대로 아담과 이브로 상징되는 낙원을 지상에 구현하려 하지 않았다. 오히려 천년왕국에 현혹된 이단들이 창세기의 낙원을 지상에 세우려다 교회로부터 억압을 받았다. 수도원은 이런 상상의 낙원보다는 사도행전에 나오는 나눔의 공동체를 목표로 설정하였다. 이런 수도원의 노력은 중세의 위계사회에서 이질적으로 보이기까지 하였다. 그럼에도 수도원은 중세 전 시기를 통해 다양한 신앙의 방법과 쇄신을 교회에 사회에 불어넣음으로서 중세 유럽을 더욱 풍요롭게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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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도를 이해하려면 그 넓은 땅덩어리와 신분제도를 이해해야 한다고 한다. 어머니의 가슴처럼 보이는 인도 亞大陸은 대륙이라기에는 약간 좁고, 하나의 국가라기에는 너무 넓어 지리학지들은 대륙에 버금간다하여 아대륙이라 이름 붙였다. 그래서일까? 동쪽의 뱅골만에 사이클론이 불어닥치는 그 순간에도 서쪽의 아라비아해에서는 뜨거운 열풍이 인도 아대륙을 습격한다. 태풍과 한발이 동시에 존재하는 대륙이 바로 인도인 것이다. 게다가 데칸고원을 중심으로 북쪽은 아리아계 인종이 남쪽은 드라비다계 인종이 자리를 잡고 있다. 이들 삶의 방식은 얼굴의 생김새 처럼 이질적이다.

이런 동시성과 다양성이 존재하는 대륙에 신분제도-카스트-가 존재한다. 이 신분제도는 땅덩어리의 다양성과 동시성을 고정시키는 쐐기 역할을 한다. 오래 전 고다마 싯달타가 이 사성제도를 부정하는 종교를 설파했지만 계급세력의 완강한 저항에 부딪혀 좌절하고 말았다. 인도의 불교는 12세기가 저물어갈 무렵 대륙에서 소멸되었다. 부처의 가르침을 변형한 불교가 12세기까지 뱅골과 비하르에 존속하였지만 이후 완전히 사라져 버렸던 것이다. 불교의 소멸은 종교의 생성,성장,소멸의 규칙에 따라 이루어졌다. 브라만교에 대한 개혁으로 시작된 불교는 그 참신성과 진보성에 의해 고무되었지만 결국 자신들이 배격했던 브라만교 의식에 굴복하고 말았다. 브라만교는 불교의 도전에 직면하자 자신들의 종교에서 소외되었던 여성과 수드라 계급에 대한 교리를 수정하였다. 이에 반해 자신들의 일시적 승리에 도취된 불교는 대중과 함께하는 일상의 삶에서 벗어나 자신들만의 세계로 침잠하였다. 이들은 대중의 언어인 팔리어를 버리고 귀족의 언어인 산스크리트어를 사용하면서 백성의 삶에서 빠르게 이탈되었던 것이다. 그리고 그들이 그토록 비난하였던 브라만의 악습에 물들어 결국은 인도에서 완전히 소멸되었다.

이렇게 불교는 인도에서 사라졌지만 인도 아대륙에 영원히 지워지지 않을 흔적을 남겼다. 그것은 물질 생활에서 비롯된 사회악을 완화시키고자한 부족사회의 특징인 원시공산주의로의 복귀를 주장한 것이 바로 그것이다. 이와 함께 불교는 소외계층에게 문호를 개방함으로써 브라만 사회의 계급주의로부터 탈출구를 마련해 주었다. 그리고 생명의 존엄성을 설파함으로서 인도 사회의 한 특징이 된 소 숭배 사상의 길을 열어 놓았던 것이다.

인도가 영국의 식민지 지배를 벗어나 1949년 새로운 공화국으로 출범한 뒤 국세조사를 실시하였을 때 불교도는 18만명에 불과하였다. 인도의 인구에 비하면 그 숫자는 거의 무시해도 될 미미한 것이었다. 이런 불교가 1960년대 초 325만명으로 늘어났는데 이는 당시 인구의 1퍼센트에 근접한 숫자였다. 이렇게 인도의 불교 신자 수가 급증한 데는 불가촉 천민 출신의 사회개혁가 암베드카르의 신불교운동에 힘입은 바가 크다.

불교가 인도에서 소멸된지 8백년이 흐른 뒤에 다시 돌아올 수 있었던 것은 이슬람교로 양분된 인도 사회에 대한 또 다른 도전이었다. 8백년전에 사라진 불교는 20세기에 다시 그 오래 전 자신들이 잊고 있던 고다마 싯탈타-부처-의 온전한 가르침을 다시 한번 상기하였던 것이다. 그리고 그 소중한 정신을 20세기에 인도의 사성제도 속에서 외쳤던 것이다. 이 불교의 평등사상은 불가촉 천민들에게 커다란 반향을 불러 일으켰다. 이들에게 신분의 굴레를 벗어날 수 있는 길은 인도를 떠나거나 이슬람으로 개종하는 길 밖에 없었다. 하지만 브라만과 이슬람은 인도를 분열시키는 것이었다. 그는 인도를 분열시키지 않으면서 자유.평등.우애에 뿌리를 둔 인도를 건설하려 하였다. 이 슬로건에 합당한 종교는 사성제를 주장하는 브라만교나 알라만의 유일성을 주장하는 이슬람이 아니라 바로 상생의 종교인 불교라고 보았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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앵글로 색슨족의 역사와 언어
박영배 지음 / 지식산업사 / 2001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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잉글랜드 복부의 요크라는 도시의 이름은 영어의 변천사를 유추할 수 있는 흥미로운 예라 할 수 있다. 이 단어는 원래 켈트어 Eburacon으로 朱木의 서식처란 뜻이었다. 로마가 브리튼을 통치하던 시기에 이 말은 라틴어인 Eboracum으로 약간 바뀌었다. 로마인이 브리튼에서 물러간 뒤 이 섬에 들어온 앵글로색슨인들은 그들에게 아무런 의미를 갖지 못하는 이 라틴어를 수퇘지 마을이라는 뜻을 지닌 Eoforwic으로 바꾸었다. 그 후 영국에 침입한 바이킹들의 귀에 이 말이 마치 Iorvik처럼 들렸으며 세월이 흐르면서 Iorvik은 Iork로 짧게 되었고 마침내 오늘날 쓰이는 York라는 지명이 된 것이다. <본서70쪽 참조>

이 책은 브리튼 섬을 둘러싸고 벌어지는 민족들의 이동과 언어의 변천사에 관한 것이다. 그리고 브리튼 섬에서 현재 우리가 영어라고 불리우는 언어가 어떻게 다른 언어와의 투쟁에서 승리하여 종주언어로 자리잡게 되었는가를 설명해 주는 책이기도 하다. 그러면서도 이 책은 단순히 언어적인 측면만을 부각시키지 않는다. 언어에 따른 문화사적인 면도 함께 다루고 있다. 그리고 우리들에게 아주 생소한 노르만 정복 이전의 브리튼 섬의 역사를 언어학적인 관점에서 알려준다. 앵글로색슨인들이 이 섬에 들어오기 전에 켈트인들이 살았고, 켈트인들은 이들보다 앞서 이주했던 픽트족과 스코트족을 북쪽으로 몰아내었다. 그리고 켈트족은 로마인들에게 정복당했고, 로마가 물러간 뒤에는 앵글로색슨인들의 침입을 받았다. 그리고 앵글로색슨인들 역시 데인족의 침략으로 자신들의 북쪽 지역을 넘겨주어야만 했다. 이렇게 복잡한 인종적 부침과정에서 이 섬의 언어는 켈트어에서 라틴어로 라틴어에서 게르만어로 게르만어에서 앵글로색슨어로 부침과 잠식의 역사가 지속되었다. 여기에 스칸디나비아어 역시 자신들의 흔적을 남겨 놓았다. 이런 과정에서 영어가 주언어로 정착하게 된 것은 이 섬에서 벌어진 무자비한 정복의 역사를 말해준다 하겠다. 켈트족은 픽트와 스코트족을 로마인과 앵글로색슨인들은 켈트족을 데인족은 앵글로색슨족을 무자비하게 몰아붙였다. 하지만 이런 정복의 과정에서 이 섬에서 주도권을 끝까지 유지했던 앵글로색슨족의 언어가 절대 다수의 언어로 정착하게 되었다. 이렇게 되기까지 앵글로색슨인은 알프레드라는 탁월한 지도자를 통해 자신들의 언어와 문화와 주도권을 유지할 수 있었던 것이다.

노르만족의 침입으로 앵글로색슨족이 정복 당했지만 그것은 소수이 정복자가 다수의 지배자의 섬속에 갖힌 상황이었다. 이 섬 속에서 정복자의 언어인 프랑스어는 2세기 동안 명맥을 유지했지만 대다수는 영어를 사용하였다. 즉 프랑스어는 궁중언어의 한계를 벗어나지 못하였다. 반면에 대중의 언어였던 영어는 하인과 유모 혹은 농민들을 통해 궁정과 지주의 안방으로 서서히 스며들었다. 그러면서 영어는 정복자의 언어를 하나 더 흡수하여 자신의 어휘를 풍부하게 하였다. 이렇게 정복의 과정에서 정복자의 영어가 아님에도 영어가 살아날 수 있었던 요인은 여러가지가 있지만 그 중에서 중요한 것은 라틴어와의 관계에서 승리하였다는 점이다. 중세시대 라틴어는 지식인의 언어였다. 하지만 이 고급언어는 도시의 언어였지 촌락의 언어는 아니었다. 이런 상황은 정복자들이 들어올 때마다 되풀이되었다. 이 결과 영어 이외의 수많은 언어들은 정복자들이 후퇴하면 함께 사라졌다. 하지만 영어는 여전히 농민들의 언어였던 것이다. 이런 생명력 덕분에 영어는 결국 브리튼 섬의 최종적인 승리자가 되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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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세기 유럽사
박은구 외 / 탐구당 / 1987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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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은 특이하게도 14세기에 한정된 중세 유럽을 보여주고 있다. 14세기는 어떤 시대일까? 14세기는 잉글랜드의 에드워드 1세로부터 대립교황인 요한23세의 죽음으로 막을 내리는 시기이다. 이 시기는 백년전쟁, 흑사병, 농민반란과 오스만투르크의 유럽침공, 교회의 분열과 페트라르카와 위클리프가 살고 죽었던 시대였다.

이 시대는 위의 예에서 처럼 역경의 시대이면서 동시에 새로운 기운이 싹트는 시기였다. 귀족들은 농민들의 반란에 직면했고, 교회 역시 교황청의 분열로 야기된 지도력의 약화와 개혁주의자들의 끊임없는 도전에 고심하는 시기였다.

중세의 장원경제는 3세기 동안 상승곡선을 그으며 성장하였다. 장원의 자급자족경제는 12-3세기동안 인구증가를 가져왔다. 그리고 이에 병행하여 경작지개간에 전력을 기울이므로서 식량생산도 비약적으로 향상되었다. 하지만 경작지의 지력이 고갈되면서 식량생산이 감소될 기미를 보이자 중세인들은 원래의 경작지에 집약적인 노동력을 투입하고 농업기술을 향상시킴으로서 식량생산을 감소시키지 않고 증가시킬 수 있었다. 그러나 흑사병이 14세기 중엽 유럽을 강타하면서 인구가 감소하고 경작지가 방치되면서 3세기동안 이루어놓았던 농업기반이 붕괴될 지경에 이르렀다. 하지만 흑사병은 노동력의 감소와 이에 따른 노동력 품귀로 농노의 해방에 기여하는 효과도 가져왔다. 흑사병은 농업뿐 아니라 당시의 산업인 양모산업에도 큰 영향을 미쳤다. 이 산업에도 노동력의 감소로 인해 그동안 집약적으로 이루어지던 작업이 물레방아와 같는 동력을 이용하는 방향으로 선회하였던 것이다.

14세기는 앞으로 여러 세기 동안 영향을 미칠 집단이 형성된 시기이기도 하다. 이른바 하층민이라 불리우는 집단이 광범위하게 참여하는 반란의 독자적 압력집단으로 성장한 시기이기도 하다. 하층계급은 수적으로 우세하였지만 상층계급의 조직과 자원에 밀리고 자신들 하층민집단 내의 분열과 이념부재로 인해 실패하였다(이에 관해서는 오르테가 이 가세트의 '대중의 반란'을 참조할 것). 그리고 흑사병으로 인해 사회 전반에 걸쳐 "Memento Mori(죽음을 잊지말라)"로 대표되는 이념이 지배하였다. 이 결과 14세기 예술에서는 병적이고 비판적인 양식이 강조되었고, 종교에서도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 그리고 승리에서 죽음과 슬픔과 공포의 주제로 바뀌었다. 이 결과 종교 예술은 그리스도의 십자가 처형이 주된 관심사로 떠오르게 되었다.

14세기의 가장 중요한 사건은 교황권에 대한 도전이 거세어졌다는 것이다. 14세기 이전까지는 유럽 왕국은 민족적 의식이 히미하였다. 이 결과 종교적 신앙이 민족감정보다 우선하였다. 하지만 14세기에 들어와 잉글랜드와 프랑스간의 백년전쟁을 통해 민족감정이 앙양되면서 교회의 신앙심이 더 이상 통용될 수 없었다. 이 결과 당시 교황 보니파키우스 8세는 프랑스의 필립4세와의 불화속에서 그를 파문했지만  2세기전 그레고리우스7세가 하인리히4세를 파문하여 얻은 효과를 기대할 수 없었다. 그레고리우스 7세는 카놋사의 굴욕을 통해 교황권의 우위를 확인했지만 보니파키우스8세는 아냐니의 치욕을 당했을 뿐이었다. 이제 교황의 파문은 전시대에서처럼 큰 반향을 불러일으키지 못하였다. 프랑스 국민들은 교황의 파문에 맞서 자신들의 왕과 국가를 수호하였던 것이다. 그리고 주교들 마저도 이런 국민적 감성을 무시할 수 없었다는 점이다. 이후 교황권은 유럽 전체가 아니라 이탈리아 내에 한정된 권력으로 남게 되었다는 점이다.

이런 상황 속에서 14세기에 유럽에는 앞으로 세계사에 중요한 흔적을 남길 잉글랜드와 프랑스 그리고 도이칠란트가 서서히 자신의 모습을 드러내게 된다. 이들 세 국가는 전혀 다른 정치적 길을 걸어가지만 강력한 민족주의 국가로 통합하는데 성공하여 하나의 국가를 형성하는데 성공한다. 물론 도이칠란트의 경우 더 오랜 세월을 기다려야 하지만.

그리고 14세기는 이제 교회의 영향력이 학문과 철학에서 서서히 그리스-로마의 고전에 자리를 양보하기 시작하는 시기이기도 하다. 지식인들은 그리스-로마의 고전을 자국어로 번역하여 르네상스로 가는 길을 준비한다. 14세기는 고대 로마가 남겼던 유산을 종교적 척도를 통해 해석하던 시기에서 인문주의자들과 종교개혁가들에 의해 좀더 다양한 해석을 가능하게하는 여지를 남겨두었다는데 큰 의미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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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프레드 대왕 - 영국의 탄생 창업의 리더십 2
저스틴 폴라드 지음, 한동수 옮김 / 해와비 / 2007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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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리타니아라는 섬은 절대자의 창조 이래로 하나의 단일체로 존재했던 적은 없었다. 왜냐하면 이 섬은 고집장이들의 보금자리이기 때문이다. 캘트족은 앵글로-색슨족과 이들은 데인족과 싸우고 대립하며 브리타니아에서 살아남았다. 지금도 브리타니아는 잉글랜드, 웨일즈, 스코틀랜드로 나뉘어져 있는데 이 구분은 정복자와 피정복자의 구분과 유사하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이들 전체는 노르만에게 정복당하였다. 이후로 이 섬은 결코 하나가 되려고 노력해 본적도 없었지만 서로 갈라지려고 애쓴적도 없다. 이 절대적 모순이 존재하는 섬 브리타니아는 왜 이렇게 대륙과 이질적인 섬이 되었을까? 대륙에서 절대적인 왕권이 성립하면서 국민국가로 향해 나갈 때 이 섬은 왕권을 제한하며는 행위를 서슴치 않았다. 이런 이질적인 선택은 어쩌면 이 섬이 유럽 대륙과 떨어져 있다는 점이 고려된 타협점이었는지도 모른다. 대륙과 달리 섬은 삶의 존재 방식이 한정되어 있다는 점이다. 섬은 사면이 바다라는 절대적인 경계선이 존재한다. 이 바다는 자신들을 구속하는 장벽인 동시에 어디든지 갈 수 있게 하는 출발점이 되기도 한다. 그리고 외부로부터 자신을 보호하는 천연적인 방어선인 동시에 고립의 원인이기도 하다. 이러한 이중성은 기묘한 자존심으로 표출된다. 그러기에 이 섬의 구성원들은 자신들의 섬이 침몰되지 않는 거대한 배라고 생각한다. 이는 신의 선택에 의해 자신들이 이 땅의 주인이 되었다는 자부심과 유사하다.

대륙의 중세 초기 모습은 카롤링거와 메로빙거 왕조의 역사를 살펴보면 된다. 하지만 브리타니아의 초기 중세의 모습은 매우 복잡하다. 잉글랜드 역사에 데인족이라고 불리우는 바이킹의 침입과 이스트 앵글리아와 머시아지역의 점령과 통치, 그리고 남부와 서부 지역의 앵글로-색슨족의 왕권이 동시에 존해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브리타니아의 중세 초기의 모습은 싫든 좋든간에 스칸디나비아의 역사와 밀접한 관계를 갖게된다. 이 결과 생소한 인명과 지명으로  이 시대는 역사가 아니라 신화와 더 가깝게 느껴진다. 이 신화의 색채가 히미해지고 역사의 기록이 진해지는 시기가 바로 이 책의 주인공 알프레드 대왕 시대부터이다. 이 시기 이후 브리타니아의 역사는 신화의 안개 속에서 비로소 유럽의 역사 속으로 드러오게 된다. 이제 이 朱錫의 섬은 테라 인코그니타Terra Incognita가 아니라 인간이 사는 섬으로 바뀌게 된다. 만약 알프레드가 데인족에게 패배하여 자신의 왕국을 잃어버렸다면 이 섬은 좀 더 오랫동안 신화의 섬으로 혹은 지도상의 미지의 섬으로 남아있었을지도 모른다.

알프레드는 데인족의 침입을 극적으로 막아냄으로서 자신의 왕국이 브리타니아 섬에서 절대적인 지위에 오를 수 있도록 해주었고, 데인족들의 세력권이 있던 곳-이른바 데인로지역-으로까지 자신의 왕국의 힘이 미칠 수 있도록 한 왕이었다. 즉 알프레드는 오늘날 우리들이 잉글랜드라고 부르는 지역을 확고하게 앵글로-색슨족의 영토로 확정한 것이었다. 그리고 알프레드는 힘을 바탕으로 한 유화정책을 바탕으로 데인족의 정착과 앵글로-색슨족과의 융합에 기초를 놓기도 하였다.

알프레드는 또한  브리타니아의 주인이 앵글로-색슨족에서 데인족으로 바뀌는 것을 막은 왕이기도 하다. 이는 노르만의 침입으로 잉글랜드가 점령 당한것과 조금 다르다. 왜냐하면 노르만 왕가 역시 알프레드의 혈통과 연결되기 때문이다. 알프레드의 막내 딸 엘프리스가 플랑드르 백작 보드웽과 결혼한 뒤 그 5대의 후손이 정복왕 윌리엄의 아내가 되는 마틸다이다. 그리고 정복왕 윌리엄 역시 알프레드의 둘째 아들로부터 시작된 혈통과 연결되기 때문이다. 결국 노르만 왕조도 알프레드 왕조의 혈통상으로 본다면 연결선상에 있는 것이다. 이것은 데인족의 침략과 정복이라는 역사적 사실이 알프레드에 의해 저지되지 않았다면 브리타니아 섬의 역사는 완전히 다른 방향으로 달려갔을지도 모른다. 이런 이유에서 알프레드가 잉글랜드 역사에서 유일무이하게 대왕으로 불리우게 되었는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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