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원의 전사들
에릭 힐딩거 지음, 채만식 옮김 / 일조각 / 2008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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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이 말을 이용하여 전쟁을 벌인 것이 무릇 35세기가 된다고 한다. 20세기 폴란드의 창기병인 포모르사케가 나치의 기갑군에게 용맹하게-하지만 무모한-돌격한 것을 끝으로 사실상 인간이 말을 이용하여 전쟁을 벌인 시대를 종언을 고하였다. 하지만 그 오랜 세월 동안 초원의 유목민들은 정주민들에게 커다란 공포와 위협으로 존재하였다. 이 책은 그 오랜 세월에 걸쳐 초원의 유목민들과 농경사회의 정주민들이 투쟁한 역사를 기록한 책이라 할 수 있다. 다만 시선이 유목민의 시점이란 것이 다를 뿐이다.  

유목민들은 그 광활한 초원을 이동해야하기 때문에 속도를 무척 중요하게 생각하였다. 그리고 이들은 이 속도에 화력이라는 무장력을 덧붙임으로서 자신들만의 전통을 확립하였다. 이것은 근세 이전에 어느 민족도 가질 수 없었던 군사적 기동성을 확보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이들 유목민들은 이를 바탕으로 정착민을 공격하여 자신들이 필요한 물품을 조달하였다. 이는 정착민들의 입장에서 보면 약탈이었지만, 유목민들에게는 생존과 직결된 것이었다.  

사실 군사적 측면에서 본다면 농경정착민이 초원유목민을 상대한다는 것은 이야기 거리가 되지 않는다. 농경민들은 언제나 그곳에 고정된 지역에 거주한 반면 초원유목민은 자신들이 침입의 장소를 선택할 수 있는 잇점이 있었다. 이런 차이점으로부터 시작된 유목민과 정착민과의 투쟁은 언제나 유목민의 승리로 귀결되었다. 그렇다면 그 승리의 결과는 무엇이었을까? 그것은 문명세계로의 동화라는 씁쓸한 결과를 낳았다. 그 수많았던 유목민족은 지금 어디에 있는가? 그 광대한 초원 저 너머로 사라진 것이 아니라 문명 세계로 흡수되어 흔적 없이 희석되고 말았다.  

반면 정착민 사회는 유목민과의 투쟁을 통해 기마술과 활의 진정한 가치를 배웠다. 이 두가지는 정착민 사회의 전쟁에도 커다란 영향을 끼쳤다. 활의 경우 유목민들의 단궁이 활의 제조에 큰 영향을 끼쳤고, 기마술은 전쟁의 속도감에 영향을 끼쳤다. 기차나 자동차가 발명되기 전까지 기병대는 가장 빠른 전장의 이기였다.  

초원의 전사들은 말을 통한 기동력, 활에 의한 장거리 사격 능력을 가짐으로서 현대로 말하면 전격전의 효시를 이루었다는 점이다. 막강한 곳을 우회하여 후방을 기습함으로써 적의 사기를 꺽고, 거짓 후퇴를 통해 우회 포위 섬멸이라는 전술을 구사하였다. 이렇게 함으로서 유목민들은 역사상 격변기에 대제국을 건설할 수 있었다. 하지만 정착민 역시 유목민들의 이런 전술을 재빨리 흡수하여 자신들의 것으로 만들어 감으로서 유목민족들이 가진 장점들이 서서히 상쇄되어 갔다는 점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 결국 화포의 발명으로 유목민들은 그들의 전술적 우위성이 약화되어 갔지만 그 위혁은 19세기까지 유지되었다. 1910년 멕시코 내란 당시 판쵸 비야의 농민기마군이 오브레곤의 정규군-보병이 주였다-을 공격하였다. 철조망으로 방어된 참호 뒤편에서 오브레곤의 군대는 기관총으로 무장하고 있었다. 이 진지를 공격한 판쵸 비야 군대는 거의 소멸되고 말았다. 사실상 이후 기병대의 무모한 공격이 몇차례 더 세계 전사에 나타나지만 그것은 막장 뒤의 크레딧과 같은 것이었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이들 유목민족이 역사의 주역에서 사라진 것이 아니라 이들의 영향력이란 점이다. 지금도 미국은 군사편제에 기병대가 유지되고 있다. 다만 다른 점이 있다면 말 대신 헬리콥터와 장갑차가 대신하고 있다는 점이다. 물론 다른 국가에서도 명칭은 다르지만 말의 기동력을 대신하는 문명의 이기를 이용하여 군사적 기동성을 유지하고 있다는 점이다. 이것은 유목민 전사들이 일상적으로 영위하였던 기동성과 화력이라는 요소를 지금도 버리지 못하고 신봉하고 있다는 것을 증명하는 것이라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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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이 인간인가 - 아우슈비츠 생존 작가 프리모 레비의 기록
프리모 레비 지음, 이현경 옮김 / 돌베개 / 2007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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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omo homini lupus. 이것은 다 아는 명제.  

다윈이 인간의 법칙을 생물학적으로 정의하기 이전 부터 인간은 인간의 적이었다. 이 명제는 여성의 적이 여성이듯 인간의 적은 인간이란 명제가 성립된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홉스의 인간은 인간에게 늑대다라는 명제 이전부터 인간들은 자신들의 생존 세계 안에서 인간의 본능을 간파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런 질문이 떠오른다. '인간으로 산다는 것은 어떤 것인가?' 이것은 '인간으로 산다는 것은 무엇인가?'와는 전혀 다른 질문이다.  

'무엇'과 '어떤'은 아주 다른 질문 형식이기 때문이다. 무엇은  존재 혹은 삶을 물어보는 것이라면 어떤 것은 그 무수한 존재의 형식을 질문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것이 인간인가?라는 물음에는 우리가 절대적으로 대답할 수 있는 것. 즉 '인간은 태어날 때부터 선하다'든가 아니면  '인간은 태어날 때부터 악하다'라는 것을 질문하는 것이 아니다. 선하게 태어났다면 그 행위 자체가 이해 될 수 없는 것이지만, 악하게 태어났다면 그 행위는 정당한 것이 되기 때문이다. 그렇게 때문에 여기서 질문하는 것은 '왜' 그렇게 살아야만 하는가 혹은 '왜' 그렇게 행동해야만 하는가를 우리에게 물어보고 있는 것이다.  

왜 그렇게 했느냐고 질문한다면 필연적으로 변명이 수반된다. 변명이 나온다는 것은 그 행위에 대한 성찰이 있었고 그 행위에 대한 의혹이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저 인간이 십자가에 달려있으니 무엇이라고 하는지 들어보자구." "엘리 엘리 라마 사박타니." "저 자가 엘리야를 부르는군." 우리가 이해할 수 있는 한계는 여기 까지라는 사실이다. 그러기에 이 질문의 답은 끊임없는 변명의 연대기를 형성하게 된다. 깊은 반성이 없기에 즉흥적인 사과와 도발이 지루하게 반복된다. 하지만 그 행위의 본질을 이해한다면 이런 지루한 도발과 사과의 세레모니는 의미가 없게 된다. 저자는 그 점을 너무나 잘 이해하고 있다. 도발과 사과의 기록이 지속되는한 희생자의 고통은 아무런 의미가 없다는 것이다. 아마도 그렇기에 저자는 자살로서 그 의미없는 반복을 고발하려 했는지도 모른다. 

이 책의 저자는 바로 이 극한 상황까지 자신의 삶을 기록했다는 점이다. 그렇기 때문에 그의 기록은 여전히 우리에게 십자가의 예수를 조롱하는 무책임한 단어를 고발하는 하나의 사실로 다가온다는 점이다. 첫경험은 우리의 삶에 지워지지 않는 각인이 되지만, 그 경험이 없는 사람은 그것은 영원히 하나의 허상 혹은 자신의 상상으로 존재하는 것처럼.....  

프리모 레비는 이런 현실에 절망하지 않았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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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기율표
프리모 레비 지음, 이현경 옮김 / 돌베개 / 2007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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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의 '이것이 인간인가'를 읽고 이 책 역시 흥미를 느껴 읽게 되었다. '주기율표'라는 제목에서 그전에 읽었던 화학적 상식의 책으로 생각하지는 않았지만, 저자의 독특한 시각으로 화학의 세계로 나를 이끌 것이란 생각을 하였다. 하지만 이런 생각도 나의 섣부른 판단이었다. 책을 덮고 나서 내가 무엇을 읽었는가?라는 생각을 해 보았다. 사실 주기율표에 나타난 원소와 거기에 얽힌 저자의 삶이 기록되어 있는 하나의 인간표였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오랫 만에 여기 저기를 뒤져서 주기율표를 보았다. "벰가스바라,비알가..."하면서 외웠던 옛 기억과 함께 주기율표 속에 인류의 시작부터 종말까지 다 들어있다는 생각이 언뜻 들었다. 이렇게 생각하자 내가 무엇을 읽었던가?라는 의문은 "나는 한 사람의 전체를 보았구나"라는 생각으로 바뀌게 되었다. 사실 주기율표의 관계는 결합과 밀어내기의 반복이다. 이 반복적인 규칙속에서 지구상의 모든 물체가 생성되고 소멸된다. 결국 우리 인간들 역시 인류라는 거대한 주기율표 속에서 결합과 밀어내기를 반복하고 있을 뿐이다.  

다만 그 결합과 밀어내기가 철학적인 용어, '사랑'과 '증오'라는 단어로 교묘히 포장되어 있을 뿐이다. 저자는 이 책에서 결합보다는 밀어내기의 관계를 더 많이 보여준다. 하지만 그 밀어내기의 관계 속에서도 인간의 저 깊숙한 곳에 숨어있는 순수함도 발견해 낸다. 하지만 첫 머리의 아르곤처럼 이 지구상에 존재하지만 아무도 본 적이 없는 기체에 대한 이야기와 유대인의 관계를 설명할 때는 정말로 가슴 한쪽이 저려옴을 느꼈다. 존재하지만 아무도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느끼는 원소와 유대인. 자신들과 함께 살고 있음에도 유대인이라는 그 사실 하나만으로 그림자처럼 되어 버렸던 유대인들의 모습... 

이런 시각으로 주기율표의 한칸 한칸을 채워가다 보면 어느새 인류의 가장 참혹했던 밀어내기의 역사가 완성된다. 그 마지막에 채워넣어야할 새로운 원소는 무엇일까? 그것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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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민주의 흑서 -상권 - 16~21세기 말살에서 참회로
마르크 페로 책임 편집, 고선일 옮김 / 소나무 / 2008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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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주 색다른 재미로 읽었던 "새로운 세계사"의 저자인 마르크 페로가 감수를 했다는 책이라 해서 아무 망설임 없이 구했다. 물론 7백여 쪽의 방대한 책-그것도 상권-이 黑書라는 이름으로 나왔으니 식민지의 참상을 고발한 책 정도로 치부하였다. 하지만 읽어보니 그것은 방대한 식민지 시대에 대한 고발이며, 성찰인 동시에 약간의 우월감이 포함되어 있었다. 물론 우월감 운운하는 것은 나의 주관적인 판단일수도 있지만... 

우리들은 흔히 식민주의의 역사를 듣고 배울 때 가장 먼저 떠오르는 것이 아프리카라는 지역이다. 수많은 흑인들이 노예로 팔려 신대륙에 건너와 고생하였다는 이야기를 떠올린다. 그리고 좀더 관심이 있다면 아시아의 식민지 역사를 생각한다. 아시아의 식민지역사는 아프리카와는 또 다른 역사이다. 아시아는 유럽보다 유구한 역사를 지니고 있음에도 백인의 식민지로 전락하였다는 인식이다. 여기에는 아프리카는 아시아처럼 유구한 역사가 없다는 상호간의 불신이 깔려있다. 아시아와 아프리카는 이런 점에서 서로 평행선을 달리며 결코 만나지 못한다. 그래서일까, 요즘 개발이 거의 완료된 혹은 무섭게 발전해 가는 아시아 국가들은 아프리카를 또 다른 자원의 약탈지로 생각하고 진출하고 있다.  이것은 새로운 식민주의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식민지 역사에서 소외된 지역이 있다. 오스트레일리아와 아메리카이다. 이 지역은 구대륙이란 수식어의 대칭으로 신대륙으로 불리우고 있다. 이것은 역사를 약간 비트는 것이라 하겠다. 신대륙이란 미지의 땅 혹은 아직 기록되지 않은 땅이란 의미가 있다. 그것은 유럽인들에 의해 발견되었을 때 비로소 의미를 가지는 영토가 되는 것이다. 그래서 아메리카와 오스트레일리아는 백인들이 발을 디딘 순간부터 원주민들은 자신도 모르는 사이이에 왕의 혹은 황제의 신민이 되어 버렸다. 이것은 아프리카와 아시아의 식민지 역사와는 또 다른 유형의 식민화라 할 수 있다. 이 결과 오스트레일리아와 아메리카의 원주민은 기묘한 취급을 받게 되었고, 백인들의 무서운 무기-제레드 다이아몬드의 총,균,쇠는 이것을 잘 묘사하고 있다-앞에 원주민들의 사회는 완벽하게 해체되고 붕괴되었다. 이 결과 이 지역은 기존의 문명이 식민주의와 결합한 것이 아니라 기존의 문명이 해체되고 노예로 혹은 식민자로 이주해 온 자들의 변형된 문화가 강제로 이식되었다. 이런 변형적인 몰상식은 이 지역의 고유한 전통에 치유될 수 없는 훼손을 입혔던 것이다.  

이 책은 모택동 어록 처럼 찬양 일변도의 레드 북紅書도 아니고 미래의 희망을 담은 꿈의 白書도 아니다. 그렇다고 인류의 미래에 대한 고발을 담은 정의의 靑書는 더더욱 아니다. 말 그대로 우리 모두의 마음 속에 잠재되어 있는 탐욕과 악에 대한 고발서이다. 우리는 그동안 세계사 시간에 배워왔던 식민지 혹은 식민주의가 이 책을 읽다보면 얼마나 간결하게 기술되어 있는지 알 수 있다. 이것은 일본의 히로히토가 일제 36년의 고통을 "痛惜의 念"이라는 애매모호한 말로 표현한 것과 너무 흡사하다. 서구 식민지 종주국들은 시종일과 제3세계에 대한 식민지 통치의 정당성을 문명화라는 단어로 희석시키고 있다. 이런 서구의 개념은 자신들 이외의 영토는 무지몽매한 인간들이 문명의 혜택없이 살고 있는 개척해야할 땅으로 이해하고 있는 것이다. 이런 사고를 바탕으로 백인우월의 식민주의가 탄생하였던 것이다.  

백인의 백인을 위한, 백인에 의한 통치는 식민지 역사의 가장 확고한 표어이다. 백인들의 산물인 식민주의는 변형에 변형을 거듭하여 수많은 도덕성에 강한 내성을 가지고 끊질기게 살아난다. 일본의 집요한 한국 때리기는 식민주의의 향수가 마약보다 더 강함을 알게한다. 그리고 그 일본의 끊임없는 건드림에 갈수록 무뎌지는 우리의 저항성은 ... 

이러한 식민주의의 생존성은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들에게도 하나의 짐으로 다가온다. 우리들은 주변의 수많은 동남아 이민자들을 바라보고 있다. 그러는 한편 우리들의 시선은 저쪽 환락의 거리를 배회하며 백인들을 두리번 거리며 찾는다. 이것은 우리들의 또다른 예속성이며 이중성이라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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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압박민족인 이스라엘의 화두는 언제나 '해방'이라는 단어에 귀착된다. 이스라엘은 이 해방이란 단어를 투쟁과 항상 연결시킨다. 구약의 모세오경이나 예언서 혹은 역사기록을 보면 이스라엘은 해방을 위해 항상 이방민족과 투쟁을 할 수 밖에 없었다. 이스라엘에게 이 투쟁이란 단어는 이집트에서 종살이 하던 민족을 가나안으로 이끌어낸 야웨를 통해 알게된 노예성에 대한 투쟁에서부터 시작된다. 종살이 하던 민족을 구원해 내시고... 이런 시편의 귀절은 제처두고라도 이스라엘에게 있어서 해방의 의미는 억압의 사슬을 끊어버리는 것임을 명확히 하였다. 이것은 반대로 억압을 끊어버리는 해방의 의미를 역행하는 그 자체는 해방이 아니라 다시 그들이 노예로 돌아가게 하는 것임을 명확히하는 것과 같은 것이라 하겠다.  

그렇다면 이스라엘의 해방은 아니 노예성에 대한 탈출은 계약이 이루어짐으로서 약속되었던 것일까? 야웨는 아브라함과 계약을 통해 해방을 약속했다. 그것은 바다의 모래알처럼이란 구체적인 약속으로 성문화되었다. 아브라함이 야웨와 맺은 계약은 이스라엘의 해방에 관한 첫번째 약속이었다. 그리고 모세에 이르러 그 약속은 폭력성을 수반한 구체적인 약속으로 변모한다. 즉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을 이스라엘에게 주겠다는 명시적인 것으로 나타난다. 정말로 야웨는 이스라엘에게 이런 폭력적인 계약을 성사시켰을까? 

사실 야웨는 아브라함에게 후손의 번성이라는 약속을 가장 크게 드러내었다. 그 번성한 후손이 온세상에 퍼져나갈 것이라고 약속한 것이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번성과 퍼져나감이 이 세상의 정복이라는 것과 동일한 것은 아니었다. 언제나 야웨는 자신과의 계약을 충실히 지킬 때만 그 계약의 결과가 드러날 것이라고 언명하고 있기 때문이다. 야웨와의 계약은 율법의 충실함이 아니라 종교적 본질인 사랑과 충성이라는 것이다. 야웨에 대한 충실함과 이웃에 대한 사랑이 전제 될 때 번성과 확장은 보장되는 것이다.  

만약 야웨에 대한 충실함과 이웃에 대한 사랑 이 두가지 가운데 하나라도 부실할 경우 이스라엘이 야웨와 맺은 계약은 어떤 의미를 지니는 것일까? 종교적 충실함과 순수함을 상실한 종교는 권력의 베일이 될 수 밖에 없다. 권력을 치장하는 종교는 결국 해방적 능력을 상실하는 종교가 될 수 밖에 없다. 이스라엘은 예언자를 통해 종교의 세속화와 권력에 예속되는 것을 쯚임없이 경고하였다. 야웨와 이스라엘의 계약은 할례로 대표되는 피의 계약이 아니다. 예언자 이사야가 외친 '그날이 오면 산은 낮아지고, 계곡은 솟아올라 평지가 되리라'라는 것이고 '그날이 오면 사자와 노루가 같이 놀고 아이가 뱀굴에 손을 집어넣는 그런 날'이라는 것이다. 즉 화합과 사랑의 계약이지 선민사상에 물든 폭력의 계약이 아니라는 점이다.  

결국 오늘날의 가자지구 사태를 보면 이스라엘은 전통적인 계약사상의 범주에서 벗어난 행위를 저지르고 있다는 것이다. 이것은 이스라엘이 승리한 듯 보이지만 결코 승리하지 못한 패배의 서곡이라는 점이다. 이스라엘의 종교가 권력과 유착하여 나일에서 티그리스까지 자신들의 세력권을 확장하려 한다면 이스라엘 종교가 본질적으로 가지고 있는 해방능력을 스스로 포기하는 것이라 하겠다. 우리는 이스라엘이 제국으로 가는 길을 포기하고 이웃과 화합할 수 있는 국가로 남기를 원하는 것이다. 이스라엘이 제국적인 욕심을 포기하지 않는 한 가자지구의 사태는 영원히 해결될 수 없으며 팔레스타인 문제 또한 영원히 폭력의 악순환 속에 가두어 버릴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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