식민주의 흑서 -상권 - 16~21세기 말살에서 참회로
마르크 페로 책임 편집, 고선일 옮김 / 소나무 / 2008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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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주 색다른 재미로 읽었던 "새로운 세계사"의 저자인 마르크 페로가 감수를 했다는 책이라 해서 아무 망설임 없이 구했다. 물론 7백여 쪽의 방대한 책-그것도 상권-이 黑書라는 이름으로 나왔으니 식민지의 참상을 고발한 책 정도로 치부하였다. 하지만 읽어보니 그것은 방대한 식민지 시대에 대한 고발이며, 성찰인 동시에 약간의 우월감이 포함되어 있었다. 물론 우월감 운운하는 것은 나의 주관적인 판단일수도 있지만... 

우리들은 흔히 식민주의의 역사를 듣고 배울 때 가장 먼저 떠오르는 것이 아프리카라는 지역이다. 수많은 흑인들이 노예로 팔려 신대륙에 건너와 고생하였다는 이야기를 떠올린다. 그리고 좀더 관심이 있다면 아시아의 식민지 역사를 생각한다. 아시아의 식민지역사는 아프리카와는 또 다른 역사이다. 아시아는 유럽보다 유구한 역사를 지니고 있음에도 백인의 식민지로 전락하였다는 인식이다. 여기에는 아프리카는 아시아처럼 유구한 역사가 없다는 상호간의 불신이 깔려있다. 아시아와 아프리카는 이런 점에서 서로 평행선을 달리며 결코 만나지 못한다. 그래서일까, 요즘 개발이 거의 완료된 혹은 무섭게 발전해 가는 아시아 국가들은 아프리카를 또 다른 자원의 약탈지로 생각하고 진출하고 있다.  이것은 새로운 식민주의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식민지 역사에서 소외된 지역이 있다. 오스트레일리아와 아메리카이다. 이 지역은 구대륙이란 수식어의 대칭으로 신대륙으로 불리우고 있다. 이것은 역사를 약간 비트는 것이라 하겠다. 신대륙이란 미지의 땅 혹은 아직 기록되지 않은 땅이란 의미가 있다. 그것은 유럽인들에 의해 발견되었을 때 비로소 의미를 가지는 영토가 되는 것이다. 그래서 아메리카와 오스트레일리아는 백인들이 발을 디딘 순간부터 원주민들은 자신도 모르는 사이이에 왕의 혹은 황제의 신민이 되어 버렸다. 이것은 아프리카와 아시아의 식민지 역사와는 또 다른 유형의 식민화라 할 수 있다. 이 결과 오스트레일리아와 아메리카의 원주민은 기묘한 취급을 받게 되었고, 백인들의 무서운 무기-제레드 다이아몬드의 총,균,쇠는 이것을 잘 묘사하고 있다-앞에 원주민들의 사회는 완벽하게 해체되고 붕괴되었다. 이 결과 이 지역은 기존의 문명이 식민주의와 결합한 것이 아니라 기존의 문명이 해체되고 노예로 혹은 식민자로 이주해 온 자들의 변형된 문화가 강제로 이식되었다. 이런 변형적인 몰상식은 이 지역의 고유한 전통에 치유될 수 없는 훼손을 입혔던 것이다.  

이 책은 모택동 어록 처럼 찬양 일변도의 레드 북紅書도 아니고 미래의 희망을 담은 꿈의 白書도 아니다. 그렇다고 인류의 미래에 대한 고발을 담은 정의의 靑書는 더더욱 아니다. 말 그대로 우리 모두의 마음 속에 잠재되어 있는 탐욕과 악에 대한 고발서이다. 우리는 그동안 세계사 시간에 배워왔던 식민지 혹은 식민주의가 이 책을 읽다보면 얼마나 간결하게 기술되어 있는지 알 수 있다. 이것은 일본의 히로히토가 일제 36년의 고통을 "痛惜의 念"이라는 애매모호한 말로 표현한 것과 너무 흡사하다. 서구 식민지 종주국들은 시종일과 제3세계에 대한 식민지 통치의 정당성을 문명화라는 단어로 희석시키고 있다. 이런 서구의 개념은 자신들 이외의 영토는 무지몽매한 인간들이 문명의 혜택없이 살고 있는 개척해야할 땅으로 이해하고 있는 것이다. 이런 사고를 바탕으로 백인우월의 식민주의가 탄생하였던 것이다.  

백인의 백인을 위한, 백인에 의한 통치는 식민지 역사의 가장 확고한 표어이다. 백인들의 산물인 식민주의는 변형에 변형을 거듭하여 수많은 도덕성에 강한 내성을 가지고 끊질기게 살아난다. 일본의 집요한 한국 때리기는 식민주의의 향수가 마약보다 더 강함을 알게한다. 그리고 그 일본의 끊임없는 건드림에 갈수록 무뎌지는 우리의 저항성은 ... 

이러한 식민주의의 생존성은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들에게도 하나의 짐으로 다가온다. 우리들은 주변의 수많은 동남아 이민자들을 바라보고 있다. 그러는 한편 우리들의 시선은 저쪽 환락의 거리를 배회하며 백인들을 두리번 거리며 찾는다. 이것은 우리들의 또다른 예속성이며 이중성이라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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