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것이 인간인가 - 아우슈비츠 생존 작가 프리모 레비의 기록
프리모 레비 지음, 이현경 옮김 / 돌베개 / 2007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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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omo homini lupus. 이것은 다 아는 명제.  

다윈이 인간의 법칙을 생물학적으로 정의하기 이전 부터 인간은 인간의 적이었다. 이 명제는 여성의 적이 여성이듯 인간의 적은 인간이란 명제가 성립된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홉스의 인간은 인간에게 늑대다라는 명제 이전부터 인간들은 자신들의 생존 세계 안에서 인간의 본능을 간파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런 질문이 떠오른다. '인간으로 산다는 것은 어떤 것인가?' 이것은 '인간으로 산다는 것은 무엇인가?'와는 전혀 다른 질문이다.  

'무엇'과 '어떤'은 아주 다른 질문 형식이기 때문이다. 무엇은  존재 혹은 삶을 물어보는 것이라면 어떤 것은 그 무수한 존재의 형식을 질문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것이 인간인가?라는 물음에는 우리가 절대적으로 대답할 수 있는 것. 즉 '인간은 태어날 때부터 선하다'든가 아니면  '인간은 태어날 때부터 악하다'라는 것을 질문하는 것이 아니다. 선하게 태어났다면 그 행위 자체가 이해 될 수 없는 것이지만, 악하게 태어났다면 그 행위는 정당한 것이 되기 때문이다. 그렇게 때문에 여기서 질문하는 것은 '왜' 그렇게 살아야만 하는가 혹은 '왜' 그렇게 행동해야만 하는가를 우리에게 물어보고 있는 것이다.  

왜 그렇게 했느냐고 질문한다면 필연적으로 변명이 수반된다. 변명이 나온다는 것은 그 행위에 대한 성찰이 있었고 그 행위에 대한 의혹이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저 인간이 십자가에 달려있으니 무엇이라고 하는지 들어보자구." "엘리 엘리 라마 사박타니." "저 자가 엘리야를 부르는군." 우리가 이해할 수 있는 한계는 여기 까지라는 사실이다. 그러기에 이 질문의 답은 끊임없는 변명의 연대기를 형성하게 된다. 깊은 반성이 없기에 즉흥적인 사과와 도발이 지루하게 반복된다. 하지만 그 행위의 본질을 이해한다면 이런 지루한 도발과 사과의 세레모니는 의미가 없게 된다. 저자는 그 점을 너무나 잘 이해하고 있다. 도발과 사과의 기록이 지속되는한 희생자의 고통은 아무런 의미가 없다는 것이다. 아마도 그렇기에 저자는 자살로서 그 의미없는 반복을 고발하려 했는지도 모른다. 

이 책의 저자는 바로 이 극한 상황까지 자신의 삶을 기록했다는 점이다. 그렇기 때문에 그의 기록은 여전히 우리에게 십자가의 예수를 조롱하는 무책임한 단어를 고발하는 하나의 사실로 다가온다는 점이다. 첫경험은 우리의 삶에 지워지지 않는 각인이 되지만, 그 경험이 없는 사람은 그것은 영원히 하나의 허상 혹은 자신의 상상으로 존재하는 것처럼.....  

프리모 레비는 이런 현실에 절망하지 않았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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