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압박민족인 이스라엘의 화두는 언제나 '해방'이라는 단어에 귀착된다. 이스라엘은 이 해방이란 단어를 투쟁과 항상 연결시킨다. 구약의 모세오경이나 예언서 혹은 역사기록을 보면 이스라엘은 해방을 위해 항상 이방민족과 투쟁을 할 수 밖에 없었다. 이스라엘에게 이 투쟁이란 단어는 이집트에서 종살이 하던 민족을 가나안으로 이끌어낸 야웨를 통해 알게된 노예성에 대한 투쟁에서부터 시작된다. 종살이 하던 민족을 구원해 내시고... 이런 시편의 귀절은 제처두고라도 이스라엘에게 있어서 해방의 의미는 억압의 사슬을 끊어버리는 것임을 명확히 하였다. 이것은 반대로 억압을 끊어버리는 해방의 의미를 역행하는 그 자체는 해방이 아니라 다시 그들이 노예로 돌아가게 하는 것임을 명확히하는 것과 같은 것이라 하겠다.  

그렇다면 이스라엘의 해방은 아니 노예성에 대한 탈출은 계약이 이루어짐으로서 약속되었던 것일까? 야웨는 아브라함과 계약을 통해 해방을 약속했다. 그것은 바다의 모래알처럼이란 구체적인 약속으로 성문화되었다. 아브라함이 야웨와 맺은 계약은 이스라엘의 해방에 관한 첫번째 약속이었다. 그리고 모세에 이르러 그 약속은 폭력성을 수반한 구체적인 약속으로 변모한다. 즉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을 이스라엘에게 주겠다는 명시적인 것으로 나타난다. 정말로 야웨는 이스라엘에게 이런 폭력적인 계약을 성사시켰을까? 

사실 야웨는 아브라함에게 후손의 번성이라는 약속을 가장 크게 드러내었다. 그 번성한 후손이 온세상에 퍼져나갈 것이라고 약속한 것이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번성과 퍼져나감이 이 세상의 정복이라는 것과 동일한 것은 아니었다. 언제나 야웨는 자신과의 계약을 충실히 지킬 때만 그 계약의 결과가 드러날 것이라고 언명하고 있기 때문이다. 야웨와의 계약은 율법의 충실함이 아니라 종교적 본질인 사랑과 충성이라는 것이다. 야웨에 대한 충실함과 이웃에 대한 사랑이 전제 될 때 번성과 확장은 보장되는 것이다.  

만약 야웨에 대한 충실함과 이웃에 대한 사랑 이 두가지 가운데 하나라도 부실할 경우 이스라엘이 야웨와 맺은 계약은 어떤 의미를 지니는 것일까? 종교적 충실함과 순수함을 상실한 종교는 권력의 베일이 될 수 밖에 없다. 권력을 치장하는 종교는 결국 해방적 능력을 상실하는 종교가 될 수 밖에 없다. 이스라엘은 예언자를 통해 종교의 세속화와 권력에 예속되는 것을 쯚임없이 경고하였다. 야웨와 이스라엘의 계약은 할례로 대표되는 피의 계약이 아니다. 예언자 이사야가 외친 '그날이 오면 산은 낮아지고, 계곡은 솟아올라 평지가 되리라'라는 것이고 '그날이 오면 사자와 노루가 같이 놀고 아이가 뱀굴에 손을 집어넣는 그런 날'이라는 것이다. 즉 화합과 사랑의 계약이지 선민사상에 물든 폭력의 계약이 아니라는 점이다.  

결국 오늘날의 가자지구 사태를 보면 이스라엘은 전통적인 계약사상의 범주에서 벗어난 행위를 저지르고 있다는 것이다. 이것은 이스라엘이 승리한 듯 보이지만 결코 승리하지 못한 패배의 서곡이라는 점이다. 이스라엘의 종교가 권력과 유착하여 나일에서 티그리스까지 자신들의 세력권을 확장하려 한다면 이스라엘 종교가 본질적으로 가지고 있는 해방능력을 스스로 포기하는 것이라 하겠다. 우리는 이스라엘이 제국으로 가는 길을 포기하고 이웃과 화합할 수 있는 국가로 남기를 원하는 것이다. 이스라엘이 제국적인 욕심을 포기하지 않는 한 가자지구의 사태는 영원히 해결될 수 없으며 팔레스타인 문제 또한 영원히 폭력의 악순환 속에 가두어 버릴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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