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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은 파이프가 아니다
미셸 푸코 / 민음사 / 1995년 1월
평점 :
구판절판
에셔의 그림을 보고 그 형이상학적인 면에 감탄한 적이 있다. 그리고 푸코를 읽고 그 박학함과 평범함을 철학으로 승화시킬 수 있는 그 천재성이 미치도록 부러웠다. 그리고 이 책을 읽었을 때 프랑스란 나라가 부러웠다.
-지상에선 이렇게 몽땅 망가지는데 비해, 저 위에선, 크기도 잴 수 없고 위치도 알 수 없는 저 큰 파이프가 접근 불가능한 거리에서 움직이지 않고 떠 있는 기구처럼 그렇게 영원히 떠 있을 것이라는 것인가?
이 글 옆에 나는 이렇게 주석을 붙여 놓았다. <실제로 보는 것과 심안으로 보는 것과의 차이... 선사들은 이미 푸코의 관점으로 1500년전부터 사물을 관찰하였다.> 어렵지만 한번 일독을 하라고 권하고 싶은 책이다. 책은 습관이다. 쉬운 책을 읽으면 그것만을 이해하게 되지만 어려운 책을 읽으면 그 뒤에 위치한 의미를 깨닫게 되기 때문이다.
**아래의 글은 부산일보에 시리즈물로 연재되었던 <책속의 그림 이야기>를 옮겨놓은 것입니다. 이 책의 성격을 잘 드러내는 것 같아 첨부합니다.
<책속의 그림이야기-16>푸코의 미술비평 '이것은 파이프가...' |
박제화된 `이미지.언어` 부활 꿈꾼다 |
<이것은 파이프가 아니다>는 그림이다.벨기에 초현실주의 미술의 대가였던 르네 마그리트(1898~1967)의 작품.
그 그림은 2개의 파이프와 1개의 문장으로 이뤄졌다.파이프 하나가 그려진 액자가 3발을 한 받침대 위에 놓여있고 액자의 위쪽 허공에는 캔버스에 그려진 것보다 훨씬 큰 또 하나의 파이프가 그려져 있다.그런데 액자의 파이프 그림 밑에는 다음과 같은 얼토당토 않은 글이 적혀있다.
이것은 파이프가 아니다.
그래서 그 그림의 세계에 프랑스 구조주의 철학자 혹은 지식고고학자 미셸 푸코(1926~1984)가 달려든다. 이것은 파이프가 아니다 는 동시에 푸코의 미술비평.철학적인 미술비평이다.푸코의 대작 말과 사물 의 맨 앞쪽에 나오는 벨라스케즈의 그림 <시녀들>(메나니스)에 대한 글을 제외하면 이것은, 은 푸코의 유일한 미술비평이다.한국에서는 이것은, 이란 이름으로 지난 95년 민음사판 단행본(김현 옮김)으로 나왔다.
그림과 철학의 만남을 보여주는 이 비평은 미술이 문학 철학과 자연스러이 어우러지고 서로 화답하는 지적 풍토에서 유래한다.사실 초현실주의는 문학운동이자 미술운동이었고 프랑스의 현대 사상가들 거의 대부분은 그림에 대한 다양한 글을 남겨놓고 있다.발레리 샤르트르 바르트 데리다가 그러하고 그 이전에는 보들레르가 그랬었다.
푸코에 따르면 그 이상한 그림 <이것은 파이프가 아니다>는 이제는 너무나 낯익어 박제되어버린 이미지 와 언어(말) 의 부활을 꿈꾸고 있다.지금은 앙상한 뼈대만,껍데기만 남아버린 이미지와 언어들,그것들이 애초 지녔던 풍성함을 되찾으려 하는 것이다.도처에는 낯익은 이미지와 모습,구태의연한 언어와 말들만이 표백된 채로 떠돌고 있을 뿐이기 때문이다.
이것은 파이프가 아니다 라는 마그리트의 문장을 꿰뚫어보는 푸코의 전략을 따라가 보자.그의 전략은 그 문장에서 특히 이것 에 주목한다.<> 이것은 실제의 파이프가 아니라 파이프 그림일 뿐이다 <> 이것은 파이프가 아니다라는 문장일 뿐이다 <> 이것은 파이프가 아니다 라는 문장은(=이것은) 파이프가 아니다.그러므로 이것은 파이프가 아닌 것이다.말 장난같기도 한 푸코의 설명은 "어느 곳에도 파이프는 없다"로 요약된다.
그것이 2개의 파이프와 1개의 문장으로 보여주려한 마그리트 그림의 전략이라는 것이다.
이를테면 2개의 파이프가 그려진 마그리트의 그림을 보면 사람들은 "이것은 파이프"라고 생각해 버린다.그러나 마그리트는 그런 일반적인 생각을 도발하려 이것은 파이프가 아니다 라고 적고 있다.그러면 사람들은 다시 그 그림을 곰곰히 보게 될 터이다.그럴때 빼꼼히 고개를 내미는 경계는 "회화에 속하는 것은 남겨지고 담론에 속하는 것은 버려지는" 순수회화-이미지의 영역이다.
푸코에 따르면 이미지가 순수성을 회복할 때 그 이미지를 박제화하던 말과 언어도 순수성을 회복한다고 한다.그것이 마그리트 그림의 전략이라는 것이다.마그리트의 어느 편지글이다."상상적인 이미지로 가득찬 내 그림에서 나오는 시는 알 수 없는 것,알려지지 않은 것을 회복시켜 주는 셈이지."
마그리트가 지향하는 시적인 그림처럼 푸코는 때론 감정을 질풍노도처럼 일게 하고 또 다른 아름다운 이미지.언어와 겹쳐져 무한한 울림을 내는 언어의 감촉을 되찾자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그것은 괴테를 빌자면,회색인 모든 언어를 거부하고 오직 영원한 저푸르른 생명의 나무를 되찾는 것이리라.
<최학림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