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년왕국운동사
노만 콘 / 한국신학연구소 / 1993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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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반적으로 종교적 이상주의는 성경의 <창세기>와 <사도행전>의 한 귀절에서 시작된다. 창세기의  아담과 이브의 에덴동산에 근거를 둔 종교적 이상주의와 사도행전에 나오는 초기 공동체를 모방한 이상주의가 그것이다. 많은 초세기 기독교도들은 아담과 이브의 에덴동산을 이 지상에 실현하려 노력하였다. 하지만 이 파라다이스-낙원-는 우리가 살고 있는 지상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하지만 이 사실을 현실이 아니라 앞으로 올 세계로 연장시켜 버린다면 이야기는 또 달라지게 된다.

반면 사도행전에 묘사된 기독교 교회 초기 공동체는 무척 매력있는 사회였다. 교회에 들어온 모든 사람들은 성과 신분에 의한 차별을 받지 않고 모두 평등하였고 재물을 공동으로 소유하고 분배하여 빈부의 격차도 없었다. 이 공동체는 옷도 필요없고 모든 것이 지상에 널려있는 에덴의 낙원은 아니지만 많은 사람들이 이 공동체를 모방하려고 노력했다. 칼 맑스의 공산주의는 마음은 이 공동체에 두고 시선은 에덴 동산으로 돌려 노동자의 천국을  건설하려고 했는지도 모른다.


중세 이후 근대에 이르기까지 유럽 기독교 운동사에는 수없이 많은 이단공동체가 등장한다. 그러나  이단 공동체들은 에덴 동산과 초세기 교회공동체 가운데 하나를 극단적으로 모방하였을 뿐이다. 부유한 교회는 사도행전에 묘사된 공동체의 이상을 신자들과 함께 나누고 실천하기에는 너무도 체계적이고 경직되었고, 창세기의 파라다이스를 실현하기에는 너무 부유하고 세속적이었다.

많은 민중들은 교회가 모든 것을 버리고 자신들 앞에 서주기를 간절히 원했고, 그렇게 되기를 진심으로 원했다. 그러나 제도의 교회는 순수한 이상을 수용하지 못하였고, 민중은 좌절하고 이것을 힘으로 표출할 수 밖에 없었다. 민중의 요구를 교회는 세속권력과 야합하여 힘으로 하면서 교회는 스스로의 자정능력을 상실하고 하나의 독재적인 권력으로 남게되었다. 이러한 역사는 루터의 기존교회에 대한 반항으로 끝을 맺는 것이 아니었다. 교회에 대하여 개혁을 요구하면서 스위스에 새로운 공동체-이상향-를 건설한 츠빙글리가 오히려 권력화되어  그 실험이 실패로 끝난것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고 할 수 있다. 지금도 수많은 종교인들이 천년왕국의 도래를 선포하고 있지만 이루어진 것은 아무것도 없다. 제도가 존재하는 한 천년왕국은 인간의 마음속에 존재하는 신기루일 뿐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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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의 이해 - 신화상징총서
에스터 하딩 지음, 김정란 옮김 / 문학동네 / 1996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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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동네에서 출간한 신화상징총서의 제1권이다. 부제가 '달 신화와 여성의 신비'라고 되어있는 이 책을 읽다보면 조지프 캠벨의 서양신화의 여성판을 읽는 느낌이 든다. 우리들은 달과 태양을 이야기할 때 태양은 우성적이고 달은 열성적이라는 식으로 기억한다. 태양이 밝음이고 달은 어둠이라는 것은 하얀색은 선, 검은 색은 악으로 보는 이분법과 조금도 다름이 아니다. 이렇게 우리가 어떤 사물을 보면서 상대적인 평가를 내리는 것은 일종의 훈련에 의한 것이다. 사회성이라는 명목 아래 남과 여의 차별성만을 강조함으로서 보편적인 인간관계를 상실하고 만 것이다. 이 결과 남과 여의 관계는 지배와 피지배의 관계로 이해되었다는 점이다. 하지만 저자인 하딩은 그렇지 않다고 주장하고 있다. 신화속의 여신과 남신의 관계를 통해 볼 때 남신은 여신으로부터 파생되었다는 것을 증명하고 있다. 이것은 여성이 가지고 있는 본연의 생식능력과 결부해보면 아주 지당한 것일지라도 훈련된 이분법적 시각으로 볼 때는 불합리하게 보인다는 점이다. 하딩은 남신가 여신은 구분이 아니라 역할의 다름을 표시한 이름일 뿐이란 점 역시 지적하고 있다. 하딩의 이 말은 현대의 가족관계속에서도 매우 중요하게 언급될 수 있다. 아버지와 어머니의 관계는 가족의 구성관계 속에서 가족을 위한 역할의 다른 이름일 뿐 그것이 남자와 여자의 존재를 고정시키는 단어가 아니라는 의미라는 것이다.

우리들은 여성성 혹은 남성성을 이야기할 때 어떤 선입견이 들어있다는 점을 인정한다. 하지만 신화의 세계에서 여성성이나 남성성은 아무런 의미가 없다는 점이다. 아킬레우스도 여장을 하고 시녀들 사이에서 숨어있었으며, 아테나 여신은 투구와 방패를 들고 전투를 벌인다. 이와 마찬가지로 칼리 여신은 피를 부르는 속성이 있지만 시바는 창조의 역할을 한다. 이렇게 하나의 신 속에도 여성성과 남성성이 교차되어 나타나고 있는데 이것은 신들이 성에 의한 고정적 관념이 아니라 역할에 따른 가변적인 모습을 보여주는 것이라 하겠다. 이런 의미에서 하딩은 처녀와 부인의 관계 또한 설명하고 있다. 즉 하딩은 진정한 여성이 된다는 것은 자신의 내면 속에 숨어있는 힘을 자각한다는 것이라고 보고있다. 내면에 있는 힘-그것은 여성성이든 남성성이든 사랑의 개념이라는 점이다. 여기서 사랑이란 여성이 한 남성에게 집착한다는 의미로 사용되는 것이 아니다. 즉 사랑은 내면 속의 자신을 발견하는 것이고 그것은 자신이 자신이 된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 자각이 가장 완벽할때 여성은 누구나 성모마리아가 된다는 것이다. 이것을 하딩은 처녀란 개념으로 설명하는데 여기서 처녀란 처녀막의 유무를 떠나 자신 안에 있는 남성성과 여성성을 독립적인 방법으로 자기 안에 통합해 넣을 줄 아는 독립적인 존재를 의미한다. 아테네 여신이 처녀의 이미지를 고수하는 것은 그녀가 순결함이란 의미만으로 취득된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즉 그녀의 존재성에 의거한 처녀라는 의미이다.

이러한 신화적인 발상은 그리스도교에서도 발견할 수 있다. 초세기 교부들은 마리아의 처녀 임신은 의심하지 않았지만 출산을 한 뒤의 처녀성에 대해서는 의심을 하였던 것이다. 즉 임신으로 인해 마리아의 처녀막이 손샹되었다면 그녀는 더 이상 처녀가 아니지 않는가하는 문제가 제기되었던 것이다. 이것을 극복하는 과정은 처녀라는 개념이 육체의 훼손이 아니라 신의 강림에 긍정적인 대답을 하고 자신의 사명을 자각하고 비개인적인 에로스의 힘을 자각한다는 의미에서 마리아는 영원한 처녀였던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막달라 마리아 역시 회개하고 과거를 씻어버리고 자신의 의미를 깨닫고 신의 사랑을 자각하고 그것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였을 그 순간 처녀인 것이다.

이 책은 달과 여성과 신화의 엮음을 아주 차분하고 지적으로 그리고 알기 쉽게 풀어나간 책이다. 이 책은 신화의 열기 속에서 그리스.로마신화의 아류로 나온 책이 아니다. 정말로 신화를 이해하고 알고자 하는 사람들을 위한 책이라고 할 수 있다. 물론 우리에게 생소한 중동지역의 신화와 신,여신들의 이름이 생소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 지역의 신화가 그리스,로마신화의 원형이란 사실을 알게되면 신의 이름이 그리 생소하게만 느껴지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왜 신화속에서 주인공은 남성적인 신인가에 의문을 가진 분들이라면 이 책을 읽어 보기를 바란다. 아울러 로즈마리 류터의 <새 여성,새 세계>란 책도 함께 읽어보기를..... 신화속의 여성의 역할이 어떻게 과소평가되어 왔는지를 깨달을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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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시아 고대문학 선집
L.A.드미뜨리예프 지음, 조주관 옮김 / 열린책들 / 1997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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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와 두만강을 사이에 두고 있는 나라가 세계에서 제일 넓은 땅덩어리를 가진 러시아란 사실을 가끔 망각할 때가 있다.  유럽과 아시아를 아우르며 장대하게 뻗어있는 러시아는 한마디로 정의를 내릴 수 없는 국가라고 할 수 있다. 그러기에 러시아라는 단어를 접할 때마다 우리는 그 속을 알수없는 음울함을 떠올리는지도 모른다. 고르바쵸프시절 미국이 느닷없이 자신들이 태평양국가라고 선언한 적이 있었다. 대서양과 태평양을 아우르고 있는 미국이 태평양국가라고 할 때면 일견 긍정적이면서도 약간 불편함을 느끼지만 , 러시아가 자신을 아시아 국가라고 주장하는데는 어떤 타당성과 우호성을 느낀다.  실제로 러시아인은 유럽인종 같으면서도 넓은 얼굴에 광대뼈 쑥 들어간 회색빛의 눈은 아시아인의 감성이 흐르고 있음을 증명하고 있다. 이들의 인종적 외모에서는 중간성이 흐르고 있다. 그뿐만이 아니다. 이들은 종교 역시  서구 제국주의의 종교인 가톨릭과 프로테스탄트를 거부하고  우리에게 생소한 동방정교-러시아정교-를 채택했다는 사실 또한 러시아의 중간성을 드러내는 것이라고 볼 수 있다.  러시아인의 이러한 중간적 심성은 어디에서 기원하는 것일까?

몽고의 침입으로 역사상 최초로 이민족에게 국토가 정복되고 유린되어 타타르의 압제에 시달릴 때 러시아인들은 이 시련이 <신에게 충실하지 못했던 자신들에게 내린 신의 징벌>이라고 감내하였다. 그리고 신에게 진정으로 회개한다면 이 징벌은 풀릴 것이라고 생각하였다. 그  이웃 고려에서도 같은 시기에  몽고의 침략을 물리치기 위해 팔만대장경을 각자하는 역사가 벌어졌다는 사실은 두 민족사이에 내적 감수성의 일치점이 있는 것은 아닌지.... 외세의 침략을 종교적으로 심화시켜 위기를 영광으로 승화시킨  러시아인의 이러한 감성은 어디에서 오는 것일까? 그 민족의 내적 심성을 알기 위해서는 민담과 설화를 읽어보면 알 수 있다고 한다. 같은 흥부전이라고 우리는 참새의 다리를 부러뜨리는 반면 일본에서는 혀를 자른다. 이러한 차이가 민족성이고 성격이된다.

이 책은 우리가 좀 낮설게 느껴졌던 러시아의 내면을 기록한 책이다. 이 책을 통해 우리는 러시아란 나라와 국민성을 좀더 가까이 다가갈 수 있을 것이다. 참고로 이 책을 읽기 위해서는 기본적으로 러시아 초기의 역사와 러시아인의 호칭에 대한 기본적 지식이 필요하다. 같은 이름이 부칭으로 불릴 때와 성으로 불릴 때 그리고 크리스찬 네임으로 불릴 때 적잖은 혼동이 올 수 있기 때문이다. 이 책의 아쉬운 점은 이러한 것을 설명하는 작은 배려가 있었으면 하는 것이다. 그렇지만 매우 유익하고 재미있는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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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은 파이프가 아니다
미셸 푸코 / 민음사 / 1995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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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셔의 그림을 보고 그 형이상학적인 면에 감탄한 적이 있다. 그리고 푸코를 읽고 그 박학함과 평범함을 철학으로 승화시킬 수 있는 그 천재성이 미치도록 부러웠다. 그리고 이 책을 읽었을 때 프랑스란 나라가 부러웠다.


-지상에선 이렇게 몽땅 망가지는데 비해, 저 위에선, 크기도 잴 수 없고 위치도 알 수 없는 저 큰 파이프가 접근 불가능한 거리에서 움직이지 않고 떠 있는 기구처럼 그렇게 영원히 떠 있을 것이라는 것인가?

이 글 옆에 나는 이렇게 주석을 붙여 놓았다. <실제로 보는 것과 심안으로 보는 것과의 차이... 선사들은 이미 푸코의 관점으로 1500년전부터 사물을 관찰하였다.> 어렵지만 한번 일독을 하라고 권하고 싶은 책이다. 책은 습관이다. 쉬운 책을 읽으면 그것만을 이해하게 되지만 어려운 책을 읽으면 그 뒤에 위치한 의미를 깨닫게 되기 때문이다.

**아래의 글은 부산일보에 시리즈물로 연재되었던 <책속의 그림 이야기>를 옮겨놓은 것입니다. 이 책의 성격을 잘 드러내는 것 같아 첨부합니다.

<책속의 그림이야기-16>푸코의 미술비평 '이것은 파이프가...'
박제화된 `이미지.언어` 부활 꿈꾼다

<이것은 파이프가 아니다>는 그림이다.벨기에 초현실주의 미술의 대가였던 르네 마그리트(1898~1967)의 작품.

그 그림은 2개의 파이프와 1개의 문장으로 이뤄졌다.파이프 하나가 그려진 액자가 3발을 한 받침대 위에 놓여있고 액자의 위쪽 허공에는 캔버스에 그려진 것보다 훨씬 큰 또 하나의 파이프가 그려져 있다.그런데 액자의 파이프 그림 밑에는 다음과 같은 얼토당토 않은 글이 적혀있다.

이것은 파이프가 아니다.

그래서 그 그림의 세계에 프랑스 구조주의 철학자 혹은 지식고고학자 미셸 푸코(1926~1984)가 달려든다. 이것은 파이프가 아니다 는 동시에 푸코의 미술비평.철학적인 미술비평이다.푸코의 대작 말과 사물 의 맨 앞쪽에 나오는 벨라스케즈의 그림 <시녀들>(메나니스)에 대한 글을 제외하면 이것은, 은 푸코의 유일한 미술비평이다.한국에서는 이것은, 이란 이름으로 지난 95년 민음사판 단행본(김현 옮김)으로 나왔다.

그림과 철학의 만남을 보여주는 이 비평은 미술이 문학 철학과 자연스러이 어우러지고 서로 화답하는 지적 풍토에서 유래한다.사실 초현실주의는 문학운동이자 미술운동이었고 프랑스의 현대 사상가들 거의 대부분은 그림에 대한 다양한 글을 남겨놓고 있다.발레리 샤르트르 바르트 데리다가 그러하고 그 이전에는 보들레르가 그랬었다.

푸코에 따르면 그 이상한 그림 <이것은 파이프가 아니다>는 이제는 너무나 낯익어 박제되어버린 이미지 와 언어(말) 의 부활을 꿈꾸고 있다.지금은 앙상한 뼈대만,껍데기만 남아버린 이미지와 언어들,그것들이 애초 지녔던 풍성함을 되찾으려 하는 것이다.도처에는 낯익은 이미지와 모습,구태의연한 언어와 말들만이 표백된 채로 떠돌고 있을 뿐이기 때문이다.

이것은 파이프가 아니다 라는 마그리트의 문장을 꿰뚫어보는 푸코의 전략을 따라가 보자.그의 전략은 그 문장에서 특히 이것 에 주목한다.<> 이것은 실제의 파이프가 아니라 파이프 그림일 뿐이다 <> 이것은 파이프가 아니다라는 문장일 뿐이다 <> 이것은 파이프가 아니다 라는 문장은(=이것은) 파이프가 아니다.그러므로 이것은 파이프가 아닌 것이다.말 장난같기도 한 푸코의 설명은 "어느 곳에도 파이프는 없다"로 요약된다.

그것이 2개의 파이프와 1개의 문장으로 보여주려한 마그리트 그림의 전략이라는 것이다.

이를테면 2개의 파이프가 그려진 마그리트의 그림을 보면 사람들은 "이것은 파이프"라고 생각해 버린다.그러나 마그리트는 그런 일반적인 생각을 도발하려 이것은 파이프가 아니다 라고 적고 있다.그러면 사람들은 다시 그 그림을 곰곰히 보게 될 터이다.그럴때 빼꼼히 고개를 내미는 경계는 "회화에 속하는 것은 남겨지고 담론에 속하는 것은 버려지는" 순수회화-이미지의 영역이다.

푸코에 따르면 이미지가 순수성을 회복할 때 그 이미지를 박제화하던 말과 언어도 순수성을 회복한다고 한다.그것이 마그리트 그림의 전략이라는 것이다.마그리트의 어느 편지글이다."상상적인 이미지로 가득찬 내 그림에서 나오는 시는 알 수 없는 것,알려지지 않은 것을 회복시켜 주는 셈이지."

마그리트가 지향하는 시적인 그림처럼 푸코는 때론 감정을 질풍노도처럼 일게 하고 또 다른 아름다운 이미지.언어와 겹쳐져 무한한 울림을 내는 언어의 감촉을 되찾자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그것은 괴테를 빌자면,회색인 모든 언어를 거부하고 오직 영원한 저푸르른 생명의 나무를 되찾는 것이리라.

<최학림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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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진남북조사
노간 지음 / 예문춘추관 / 1995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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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지를 재미있게 읽고 그 뒤의 역사를 알고 싶다면 꼭 읽어야할 책이라고 할 수 있다. 위진남북조사는 한나라와 당나라의 사이에 존재하는 역사로 중국이 국제적인 문화라고 자랑하는 당의 바탕이 된 시기라고 할 수 있다. 중국사에서 이 시대 이후 한족 단일의 역사는 종언을 고하고 한족과 호족의 연합에 의해 제국이 건설된다. 실제로 이후의 당, 원, 청은 호족과 한족의 연합국가였고, 송과 명은 한족의 국가였음에도 불구하고 지역적 협소성과 폐쇄성에서 벗어나지 못했다는 사실은 이들의 국가가 불완전한 통일체였음을 말해주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이렇듯 중국사에서  중요한 분수령의 시기임에도 불구하고 이 시대를 개관한 책이 이 책 밖에 없다는 사실은 우리 역사학의 편식증을 증명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이 책은 시기적으로 중국의 중세시대를 기술하고 있다. 그것도 중국 중세시대의 도입부분이라 할 수 있다. 이 책을 읽다보면 중국인들이 주장하는 한족 중심의 사관이 얼마나 기만적인 것인지를 알 수 있다. 이들이 주장하는 중화주의는 주변부의 역사를 왜곡하고 기만함으로서 자신들만의 역사로 개조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중국 역사상 한족이 제국의 중심이 되었던 적은 한, 송, 명의 시대였다. 그런데 우연의 일치라고나 할까 이 시대는 중국 역사상 성장의 동력이 멈추고 제국적 영역이 축소되는 시기와 일치하고 있다. 이런 역사적 사실을 볼 때 중국이 자국중심의 화이관을 주장하는 것이 얼마나 허구인지를 잘 알 수 있다.  

중국은 역사 이래로 우리의 이웃에 엄연히 존재하고 있는 국가이다. 우리의 역사는 중국이란 나라의 통일과 분열에 의해 팽창과 축소가 반복되었다. 우리는 이웃의 중국의 변화를 잘 읽어냄으로서 중국이란 카드를 잘 활용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이 책을 읽으며 중국이 어떻게 자신들의 땅에 침입하여 정주한 이민족을 무력화시키고 그들의 젊은 피를 자신들의 문명에 이식하여 거대한 중화제국을 건설했는지를 알 수 있을 것이다. 우리가 정말로 두려워해야 할 것은 중국의 팽창력이 아니라 흡수력이라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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