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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형집행관 ㅣ 프랑스 현대문학선 23
미셸 폴코 지음, 이인철 옮김 / 세계사 / 1996년 7월
평점 :
품절
이 책을 읽게 된 이유가 재미있다. 세계사 출판사의 <책 읽어주는 여자>를 아주 오래 전에 재미있게 읽은 기억이 있었다. 이 기억이 깊이 각인된 나에게 이 책은 순전히 출판사의 이름을 보고 집어 든 책이었다. 필요가 아닌 한때의 기분으로 구입한 책이기에 얼마 동안 서가에 장식용으로 꽃혀 있었다. 어느 일요일 오후, 머리를 식히기 위해 이 책을 읽기 시작했고 오후를 몽땅 투자하여 다 읽었다. 그만큼 재미있는 책이었다. 이 책은 유럽 역사의 드러나지 않은 한 면을 조명하고 있다는 점에서 소중한 소설책이라 할 수 있다.
우리가 보통 망나니라고 부르는 자들은 유럽 역사에서는 일종의 특권 계급이었다. 이들은 영주의 사설 감옥의 관리인으로부터 한 국가의 사법체계의 틀을 지탱하는 집단이기 때문이다. 즉 이들 망나니 계급은 귀족과 왕의 법률 속에서 필요에 의해 서서히 성장하여 특권계급으로 도약하였다. 이들이 특권화될 수 밖에 없었던 이유는 수요와 공급이라는 범죄의 법칙에 따른 것이었다. 중세시대 도시가 서서히 발전되면서 현대적 의미의 범죄가 늘어났지만 교화를 목적으로 하는 근대적인 감옥은 아직 없었다. 그러므로 범죄자는 처벌 위주의 형벌을 받아야만 했다. 하지만 종교의 영향으로 사람의 목숨을 빼앗는 직업을 선택하는 사람들은 거의 엇었다. 그래서 영주들은 범죄자나 비천한 집안의 출신들을 선택하여 사형집행인으로 임명하였다.
하지만 이 일을 직업으로 하려는 사람들은 없었다. 그래서 영주계급은 망나니들에게 여러가지 특권을 부여하였다. 그 가운데 가장 큰 것은 대검의 특권이었다. 중세에 대검-검을 허리에 차는 것-은 귀족의 특권이었다. 망나니들은 귀족이 아니면서도 검을 소유할 수 있는 권리를 얻었던 것이다. 즉 이들은 속으로는 어떨지 몰라도 외형적으로는 귀족과 같은 반열에 들었던 것이다. 그리고 장날이면 시장에서 어떤 물건이든지 취할 수 있는 '한줌의 세'도 부여하였다. 즉 자신의 손아귀에 잡히는 것은 무엇이든지 가질 수 있는 특권이었다. 하지만 이들의 가장 큰 수입은 자신들의 직업인 사형집행에서 나오는 것이었다. 사형수들의 가족들은 고통을 조금이라도 덜어주기 위해 뇌물을 받쳤고, 망나니는 시신을 인도하면서 가외돈을 챙겼다. 그리고 여기서 나오는 부산물, 사형수의 옷과 피는 주술적인 효력이 있다고 여겨져 비싼값으로 일반 농민들에게 팔렸다. 이런 수입을 통해 망나니는 천대받는 계급이면서도 특권계급으로 성장할 수 있었다.
이들이 사형수에게서 가질 수 있는 특권은 근대에까지 남아있었다. 그 예로 영국의 추리소설작가인 피터 러브세이의 소설 'Waxwork'에도 잘 묘사되어 있다. 사형집행인은 언제나 사형수에 대하여 가장 우선적인 기득권이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이들은 부를 소유하고 권력을 위임받고 있다하더라도 원칙적으로 저주받은 직업이었다. 사람이 사람을 죽인다는 것은 신 앞에 결코 떳떳한 직업이 아니었으며 이들은 항상 성서를 가까이하였다. 이것은 지상의 원치않은 죄를 조금이라도 감해보려는 의도였다. 일반 농민들은 이들 사형집행인 계급을 두려워하면서도 경멸하였다. 그래서 아무도 이들과 혼인관계를 맺으려 하지 않았다. 결국 사형집행인들은 사형집행들과의 혼인으로 얽혀질 수밖에 없었다. 즉 사형집행인들은 중세를 거쳐 근세로 접어들면서 세습적인 형태를 띠게 되었던 것이다.
이 책은 우리가 알고 있는 중세와 근세의 가장 어두운 부분을 조명해주는 역사소설이라고 할 수 있다. 저자의 해박한 중세에 대한 지식과 사형집행인의 가문에 대한 철저한 조사는 이 책이 조세핀 테이의 '시간의 딸'과 같은 역사적 사실감에 충만해 있다는 점이다. 이런점에서 이 책은 중세 혹은 근세의 유럽 사형집행에 대한 훌륭한 지식을 전해준다고 본다. 다만 아쉬운 것은 이 책은 전체의 일부분만-사형집행인의 가문이 시작되는 중세부분-이 번역되어 나왔다는 점이다. 이 책은 초판이 1996년에 출판되었다. 거의 10년이 흘러간 이 시점에서 여전히 두꺼운 책이 미완성인채로 남아있다는 것은 독자의 입장에서 약간 불만스럽다. 언제 완전한 번역본을 접해 볼 수 있을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