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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시창 - 대한민국은 청춘을 위로할 자격이 없다
임지선 지음, 이부록 그림 / 알마 / 2012년 10월
평점 :
이제는 너무나 진부해져버린 “현실이 소설보다 더하다”는 말은 소설이라는 형식과 현실이라는 내용의 관계를 말한다. 소설은 이런저런 미학적 장치를 통해 ‘현실’을 소설적으로 재구성해낸다. 그 현실이 형식화의 요구를 압도할 때, 소설이라는 미학적 장치는 별 쓸모가 없다. 형식화하지 않아도 그 ‘현실’이 다른 모든 것을 압도하기 때문이다. 거추장스러운 옷을 입지 않아도 날 것 그대로의 현실을 보여주는 것이 차라리 더 낫다. 르뽀가 바로 그런 것일 텐데, 김애란의 <비행운>이 그런 현실을 다룬 소설이라면, 한겨레 기자 임지선의 <현시창>은 김애란이 형식화하기 이전의 날 것 그대로의 현실을 담은 책이다. 전자를 읽고 나선 김애란의 솜씨에 감탄하게 되지만, 후자를 읽고 나서는 ‘지금 여기의 현실’에 대해 분노하게 된다. 이 책에 실린 사연들은 참으로 가슴아픈 이야기들이면서 지금 우리사회를 형성하고 있는 어떤 ‘질서’가 바뀌지 않고는 해결하기 어렵다는 것을 반증하는 생생한 증거들이다.
이 책의 표지 안 쪽에는 “내 젊은 날의 피를 거꾸로 흐르게 했고, 사회변화와 개혁을 평생의 업으로 삼게했던 한 권의 책은 <70년대>라는 르뽀였다”라는 송호창 변호사(민주당 의원이었다가 안철수 캠프에 합류한 국회의원, 바로 그 사람이다.)의 말이 인용돼 있다. 그의 기억은 좀 부정확한데, 그 책의 이름은 <70년대 현장>(한마당)이고, 저자는 당시 동아일보 해직기자였던 이태호다. 어쨌거나 송호창의 이 말은 박정희 시대의 사회현실을 담은 르뽀집 <70년대 현장>과 이명박 시대의 현실을 담은 <현시창>간의 관계를 잘 보여준다. 각기 산업화 시대와 신자유주의 시대의 현실을 현직 기자의 시각으로 보여주고 있다는 사실 말이다. <70년대 현장>이 출간된 1982년은 언론통폐합 이후 언로가 꽉 막혀 있던 시대였고, <현시창>의 시대는 인터넷과 소셜미디어로 인해 언론이 폭발하고 있는 시기다. 현장의 목소리가 제도언론을 통해 가로막혀 있을 때 분출되었던 것이 전자라면, 후자는 자유언론이 만개한 시대에 분출되고 있는 목소리다.
그러니까, 언론에 최대한의 자유가 부여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현시창>에서 다룬 사건과 사고들은 언론에 의해 주목받지 못한 것이다. 이렇게 된 까닭은 자명하다. 이들 사건들이 언론에 이렇다할 수익을 가져다주는 ‘정보상품’이 아니기 때문이고, 그들이 발딛고 선 이데올로기와 상업적 기반과는 거리가 멀기 때문일 것이다. 보수언론이든 진보언론이든 최대 공약수는 사람의 고통에 대해 분노하고 고발하는 ‘휴머니즘’일 진대, 오늘날의 언론(특히 보수언론)에게 그런 것을 기대하기란 참으로 난망한 노릇인 것이다. 그런 점에서 이 책을 쓴 임지선 기자와 그녀가 속한 한겨레가 나는 참으로 고맙다. 이런 시대를 견디는 힘은, 우리 시대에 어떤 일들이 벌어지고 있는가를 인식하는 데서 출발하기 때문이다. 지금 왜 다시 이런 ‘르뽀의 시대’가 도래했는지를 음미할 필요도 있다. 어떤 수사와 분칠로도 미화될 수 없는 '팩트'들이 우리 삶의 척박함과 비극성을 웅변으로 보여주고 있는 시대이기 때문이다. 동시에, 신자유주의의 폐해가 극복되지 못한 채 지난 5년 동안 역사적 퇴행이 한층 더 심화되었기 때문일 것이고, 그 퇴행의 극단적 결과가 이 책에 담긴 사실들이기 때문이다. 이 책을 읽으며 밑줄을 그었던 대목들.
“황 씨가 죽을 때까지 걱정했던 학자금 대출은 고스란히 남았다. ‘이제 학자금 대출 이자 내는 날이 다가오는데, 어떻게 해야 하죠?’ 라고 여동생은 물었다. 늘 자랑스러웠던 성실하고 착한 오빠가 남긴 것이 빚뿐이라는 사실을 동생은 받아들이기 어렵다. 승원씨를 짓누르던 학자금 대출은 어머니와 여동생이 떠안지 않기 위해서는 사망 직후 3개월 안에 법원에 ‘상속 포기 신청’을 해야 한다. 현실은 냉정하다.”
- 2011.7.2 경기도 고양시 이마트 탄현점에서 학자금 대출을 갚기 위해 아르바이트를 하던 서울시립대생 황승원씨가 질식사로 사망했다.
"사고가 나던 날 새벽 1시 20분께, 어김없이 스프레이 보수작업은 시작됐다. 김씨는 전기로 주변 청소를 맡았다. 당시 전기로에는 쇳물 15톤 정도가 남아 있었다. 새벽 1시 40분, 김씨의 동료는 김씨가 전기로 입구 옆에 걸쳐 있는 철근 조각을 치우려고 파이프를 들고 애쓰는 모습을 봤다. 그 다음으로 본게 김씨가 쇳물 속으로 떨어지고 있는 모습이었다. 김씨는 소리도 지르지 못했다. 동료들은 김씨가 빠진 사실을 알고도 이글대는 전기로 안을 들여다볼 수가 없었다. 허망한 죽음이었다."
- 2010년 9월 7일 충남 당진의 ㅎ 철강에서 일하던 김모씨가 야간 작업 중에 섭씨 1600도의 쇳물에 빠져 사망했다.
“현대자동차 파견업체에서 소장으로 일하는 아버지에게 회사쪽이 “딸이 농성을 그만두게 하라”며 압박해왔다. 불안해진 아버지는 홧김에 딸에게 전화해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처음으로 네가 부끄럽다”고 화를 냈다. 잠시 뒤 “미안하다”는 문자가 왔다. 평생을 비정규직으로 살아온 부녀에게 가혹한 겨울이다. 힘든 마음을 달래려 김 대의원은 농성장에서 매일 밤 일기를 썼다. “500명의 조합원들 중 단 한명의 여성 대의원인 나, 내가 한 결정이기에 후회는 없다”고 쓰고 조용히 노트를 덮었다.”
- 현대자동차 농성장의 여성 대의원 서른 한 살의 김미진씨.
"딸의 병명은 급성골수성 백혈병이었다. 백혈병 판정을 받은지 1년도 안되어 딸은 하얗게 말라갔다. 바스라질 것 같은 딸이 또 고열로 쓰러져, 그날은 수원의 아주대학교 병원에 데리고 갔다가 강원도 속초에 있는 집으로 돌아오는 길이었다. 먼 길을 아비의 택시로 달렸다. 이천까지 왔을 때 유미는 덥다고 했다. 횡성쯤 왔을 때 유미의 숨이 가빠졌다. 운전을 하던 황상기 씨가 이상한 기분에 뒷좌석을 돌아봤을 때 딸은 마지막 숨을 거두고 있었다. 아비는 죽은 딸을 뒷좌석에 태우고 울면서 택시를 몰아 집으로 돌아왔다."
- 2007년 3월6일 삼성전자 반도체 공장에서 일하던 23살의 어린 여성 황유미씨가 백혈병으로 사망했다.
“최씨는 의식불명의 상태로 열흘을 버텼다. 12월 21일 정오, 그는 조용히 숨을 거뒀다. 가슴 속에 간직한 꿈을 피워보지도 못하고 아까운 청춘이 목숨을 잃었다. 비싼 대학 등록금과 어찌될 지 알 수 없는 미래를 대비하려고 피자 배달에 나선 지 5개월 만에 사고를 당했다. 최저임금 수준의 월급을 받으며 피자가 식기 전에 배달을 하느라 오토바이 가속 페달을 밟다가 세상을 떠났다.”
- 스물 네 살의 대학 4학년 생 최모씨가 삼십 분 피자배달제를 운영하는 피자 체인에서 아르바이트를 하다 숨졌다.
“영미씨는 장문을 이메일을 통해 내게 “기사를 읽고 너무나 공감이 돼 슬펐다”며 “식당 노동자의 자녀가 공부를 못하는 것이 현실이라고 하더라도 기자는 ‘그래도 희망은 존재한다’고 써주면 안되냐”고 항의했다. 뒤이어 자신이 바로 공장노동, 식당 노동 등 빈곤노동에 시달리는 엄마의 자식이며 자신의 가족이 기초생활수급권자라고 했다. 자신은 어려서부터 공부를 잘하기는 했지만 너무도 힘든 삶을 살아왔으며, 지방에서 외국어고등학교를 나와 서울의 명문대에 진학한 지금도 너무나 괴롭다고 했다.... “저는 서울에 와서야 제가 아무리 발버둥을 쳐도 저들과 비슷하게 살아갈 수 없다는 현실을 깨달아요. 왜 하필 공부를 잘 했는지, 이제는 제 자신이 원망스러워요”
- 명문대에 진학한 기초생활수급권자의 딸
“갈 수록 바빠졌지만 이 모든 일을 오롯이 혼자 감당해내야 했다. 싸움이 커지자 “문제제기를 하면 도와주겠다”던 동료들도 증언을 기피했다. 회사에서 인사상의 불이익을 받는 그를 보며 “선배를 응원하지만 선배처럼 살 수는 없다”고 말하던 후배도 있었다. 성희롱 문제 제기를 끝으로 그의 승진도 멈췄다. 2005년 성희롱을 당할 당시 대리였던 은의 씨는 소송이 끝난 2010년까지 ‘만년 대리’로 살아야 했다.“
- 삼성전기 대리였던 서른 한 살의 이은의씨는 회사측과 5년여의 싸움 끝에 승소했다.
“최 아무개씨도 그날을 기억한다. 아무 것도 모른채 7월 30일 저녕에 유리방으로 ‘출근’한 최씨는 화장실에 갔다가 사방에 튀어 있는 피를 보고 비명을 질렀다. 유리방은 이웃한 여러개 업소가 공동으로 화장실을 사용한다. 화장실에는 몇 시간 전 숨진 박씨가 흘린 피가 사방에 묻어 있었다. 경찰은 박씨가 일하던 유리방에만 폴리스라인을 치고 돌아갔을 뿐, 피묻은 화장실은 그대로 뒀다. 최씨를 비롯한 성매매 여성들은 이날 그 피를 제 손으로 닦아낸 뒤 영업을 했다. 동료가 손님에게 죽임을 당한 날에도 덜 덜 떨면서 낯 선 남자와 단 둘이 방에 들어갔다.”
- 2010년 8월 588에서 일하던 성매매 여성이 쉰 두 살의 사내에게 살해당했다.
“남편의 폭력은 날이 갈 수록 심해졌다. 남편은 부인은 물론 아기와 시부모까지 폭행했다. 폭력적인 잠자리가 이어졌고 출산 뒤 곧바로 둘째를 임신했다. 남편은 ‘아침에 깨운다’는 이유로 임신한 아내를 때렸고 갓난 아이를 집어 던졌다. 남편과 이혼을 하겠다고 하니 시어머니가 “너 캄보디아에서 데려오느라 들어간 돈이 얼만 데 이혼이냐”며 반대했다. 만삭에도 바닷가에 나가 조개를 캤다. 둘째 출산 직후부터 펭소티씨는 몸져 누웠다. 눈이 튀어 나왔고, 목이 부어올랐다. 갑상선 이상이었다.”
- 캄보디아에서 온 펭소티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