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억 전쟁 - 가해자는 어떻게 희생자가 되었는가
임지현 지음 / 휴머니스트 / 2019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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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지현의 계속된 작업은 내게 줄곧 관심의 대상이었다. 폴란드 근대사에 대한 관심이나 아마 거기에서 많은 부분 비롯되었을 '민족주의'의 반동성에 대한 저술들이나 기억연구자라고 이름붙인 최근의 작업도 그러하다. (그가 최근 작업한 집시 전시회에 못가본게 참 아쉽다.) 그의 저술들을 따라가다 보면 우리가 알고 있던 역사, 당연하게 해석되었던 역사에 대해 물음을 던지게 되고 무엇이 옳고 그른가에 대한 성찰을 필수적으로 하게 된다. 역사적 사실들에 대한 해석의 프리즘(민족주의든, 사회주의든 무엇이든)을 벗겨내고 사실(그 사실조차도 가끔은 의심스럽지만) 그 자체에 대해 천착할 때 종종은 혼돈스럽고 '진실'은 저 너머 어딘가에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이 책 <기억전쟁>은 그의 많은 책 중에서 생각의 단초, 성찰의 계기를 가장 많이 제공하고 있는 저술이었을 것이다. 


이 책에서 다루는 많은 사건들은 대부분 홀로코스트와 같은 '학살'과 '전쟁'과 관련이 있다. 유대인 학살에서부터 2차대전, 폴란드와 동구에서 벌어졌던 살육들, 일본군에 의한/에 대한 많은 죽음들. 거기에는 그 학살을 주도한, 국가이든 군대이든 간에 하나의 집단과 그들의 이데올로기(또는 집단화된 신념)이 존재하고, 추후에 그것을 기억하는 한 개인들 또는 역사가들이 있다. 임지현은 그 이전 저술들과 마찬가지로 집단화된 해석에 의존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의 사건을 기억하는 개인들, 그 개인들의 내면, 집단적 가치로 환원될 수 없는 어떤 개별자들의 내면에 더 주목하고 있다. 중심부의 해석을 벗어나 끊임없이 주변화한 시선으로 보기, 주변에 선 개인의 위치와 내면에서 응시하기. 집단 학살에 대한 역사를 읽으면 읽을수록 그 학살을 겪어온 개인의 내면과 의식에 더 신뢰가 간다. 내가 프리모 레비나 스베틀라나 알렉세에비치의 책 같은 것에 더 이끌리는 까닭이다. 


그가 들려주는 이야기 중에서 가장 기억에 남는 것은 아브라함 헤셀이 전하는 일화, 그리고 이와 관련된 시몬 비젠탈의 일화다. 기차안에서 랍비에게 폭력을 가했던 상인의 이야기, 랍비를 못 알아본 상인은 그를 자리에서 쫓아냈으나 추후에 그가 존경받는 랍비인줄 알고 용서를 구한다. 그러자 그 랍비는 "나는 그를 용서하고 싶어도 용서할 수가 없다. 기차 안에서 그는 내가 누군지 몰랐다. 그러니가 그는 내가 아니라 어느 이름없는 사람에게 죄를 지은 셈이지. 그러니 나 말고 그 이름없는 사람을 찾아가 용서를 구하는 게 옳다." 


이 이야기에서 죽어가는 나치 친위대원은 죽기 직전 자신의 행위에 대해 용서를 구하고자 수용소의 다른 유대인인 비젠탈을 불러달라 요청하고 그 앞에서 자신이 참여했던 유대인 학살에 대해 사죄하고자 한다. 자신의 행위를 두고 도저히 편히 죽음을 맞이할 수 없으니 다른 유대인에게라도 용서를 구하고 싶었던 것. 비젠탈은 그의 용서에 대한 간청에 아무 응답도 하지 않고 병실을 나온다. "그에게 희생당한 사람들을 용서할 권리를 위임받지 않은 상황에서 비젠탈이든 요제크든 또다른 누구든 그들을 대신해서 용서할 수 없는 것은 당연하다. 누군가가 저지른 죄를 용서할 지 말지는 전적으로 피해 당사자가 결정할 일이다." 


"용서는 때로 폭력적이다." 그것은 오롯이 그 폭력 행위를 당한 바로 그 개인이 할 수 있는 권리이지 누가 대신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살인자에게 자식을 잃은 부모 역시 해당 살인자에게 용서를 할 수 있는 권리를 갖고 있지 않다. 개인과 개인의 관계에서도, 집단과 집단의 관계에서도, 위안부에 대한 일본의 사과와 용서에서도, 독일국가가 유대인에게 용서를 구할 때도, 누군가를 대신하여 용서를 하고 사과를 하는 것은 거짓 화해이자 기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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