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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미안 ㅣ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44
헤르만 헤세 지음, 전영애 옮김 / 민음사 / 2000년 12월
평점 :
우리가 어떤 음식이 갑자기 생각날 때는 그것이 함유한 영양분을 우리 몸이 필요로 한다는 설이 있다. 어느 날 평소에는 찾지 않던 음식이 너무 먹고 싶어지면 그 음식 속 영양분이 부족해서라는 것이다. 이런 근거 없는 이야기로 시작한 이유는 내가 『데미안』을 손에 집었을 때가 꼭 비슷하기 때문이다.
문학을 꽤 오랜 시간 멀리했다가 다시 친해지고자 집에 쟁여둔 세계문학전집(민음사)을 하나씩 읽기로 마음먹었다. 헤르만 헤세의 『데미안』이 그 첫 번째였다. 너무나도 유명하고 제목을 하도 들어서 안 읽어도 읽은 것 같은 느낌이었다. 최근 TV 프로그램에서도 소개되어 더욱 익숙했다. 친숙하지만 전혀 모르는 이 책은 독서 구미를 당겼다. 그리고 뒤늦게 읽은 나 자신이 조금 안타까웠다. 딱 나에게 필요한 내용이었으므로.
간략한 줄거리로는, 주인공 싱클레어가 단면만을 가르치는 반쪽 세상에서 벗어나 세상 전체를 인식하면서 세상의 격정을 버티고 사랑을 배우며 주체적인 자아가 되는 성장소설이다. 그의 모든 각성은 데미안으로 시작되어 데미안으로 지속하며 데미안으로 마감한다.
「그러나 세계는 다른 것으로도 이루어져 있어. 그런데 다른 건 죄다 그냥 악마한테로 미루어지는 거야. 세계의 이 다른 부분이 통째로, 이 절반이 통째로 숨겨지고 묵살되는 거야. (…) 우리는 모든 것을 존경하고 성스럽게 간직해야 한다고 생각해. 인위적으로 분리시킨 이 공식적인 절반뿐만 아니라 세계 전체를 말이야! - p.83」
학창 시절을 돌이켜 보면 대체로 이분법적으로 학생을 구분했다. 착한 아이와 나쁜 아이, 모범생과 문제아, 인싸와 아싸 등등. 중간지대가 없었다. 이런 구분은 어릴 적 나를 가르친 말들에서도 존재한다. 해야 할 것과 하지 말아야 할 것, 착한 짓과 나쁜 짓, 깨끗함과 더러움, 말을 잘 듣느냐 안 듣느냐……. 어린 싱클레어가 어렴풋이 느낀 ‘환한 세계’와 ‘다른 세계’라고 할 수 있다. 두 세계는 경계가 맞닿아 있으면서도 경계가 확실했다. 그리고 이런 구분은 다른 한쪽을 말살하려 든다. ‘환한 세계’에 있지 않으면 ‘다른 세계’의 존재이며, ‘환한 세계’로 넘어오지 못하도록 말이다. 반대도 마찬가지.
나에게 있어 세계의 구분은 나 자신을 규정하는 쪽으로 작용했다. 예를 들어, 현실을 ‘영어 가능’과 ‘영어 불가능’의 세계로 나누어져 있다고 치자. 나는 영어를 바라지만 ‘불가능’에 있으므로 항상 ‘가능’을 보며 절망하고 괴로워한다. 발버둥은 쳐보지만 이내 지쳐버리고 심화된 ‘불가능’으로 나를 몰아댄다. 결국, ‘영어 가능’ 세계를 포기하고 마는 것이다. 우스꽝스럽지만, 이런 예는 내 삶 전반에 걸쳐 일어났다. 세상이 요구하는 삶을 따르지 못해 여태껏 나를 망치며 지내왔다.
그러나 데미안의 말대로 세계를 구분이 아닌 온전한 하나로 인식하면 나의 삶에서 잘못된 점은 존재하지 않았다. 달이 앞면만 보인다고 뒷면을 부정할 수 없듯이, 내가 보는 세계의 앞면만 떠올릴 필요가 없었다. ‘생각이란, 우리가 그걸 따라 그대로 사는 생각만이 가치가 있(p.85)’기에 내가 따를 수 없는 세계를 떠올리는 일은 무의미한 일이었다.
「우리들 속에는 모든 것을 알고, 모든 것을 하고자 하고, 모든 것을 우리들 자신보다 더 잘 해내는 어떤 사람이 있다는 것 말이야. - p.116」
무가치함에서 벗어나 보다 온전한 자아를 구축해야 한다. 그런 가능성은 누구에게나 건재한다. 산다는 것은 행동의 문제이고, 가능성은 행동에서 비롯되기 때문이다. 행동반경에는 세계 한쪽만 존재하지 않는다. 방황 속에서 목표를 이룩하기 마련이고, 이룩한 결과는 다시 방황의 씨앗이 된다. 이는 합일의 단계이기도 하다. 옛말에 그런 말이 있지 않은가. 정신일도 하사불성(情神一到 何事不成). 정신을 한 곳으로 모으면 이루지 못할 일이 없다. ‘환한 세계’와 ‘다른 세계’를 하나로 합하여 인식해야 비로소 자아는 굳건해질 준비를 마치게 된다. 새가 알에서 나오기 위해 꿈틀대는 것이다.
「〈새는 알에서 나오려고 투쟁한다. 알은 세계이다. 태어나려는 자는 하나의 세계를 깨뜨려야 한다. 새는 신에게로 날아간다. 신의 이름은 압락사스.〉 - p.123」
알에서 나오지 않은 새는 새가 아니다. 알 속에서 아무리 새의 형상을 갖추었다 한들 날아오르지 못한다면 과연 새라고 할 수 있을까. 상식이 아니라 본질에서 말이다. 알은 새를 규정한다. 진정한 새가 되기 위해서는 알을 깨고 나와 훨훨 날아가야 한다. 신에게로, 압락사스에게로. 마찬가지로 우리가 진정한 자아를 깨닫기 위해서는 우리를 규정하는 세계를 깨뜨려야 한다. 싱클레어는 이렇게 정의했다.
「나도 또 다른 그 어떤 인간이 되라고 존재하는 것이 아니었다. 그 모든 건 다만 부수적으로 생성된 것이었다. 모든 사람에게 있어서 진실한 직분이란 다만 한 가지였다. 즉 자기 자신에게로 가는 것. (…) 누구나 관심 가질 일은, 아무래도 좋은 운명 하나가 아니라, 자신의 운명을 찾아내는 것이며, 운명을 자신 속에서 완전히 그리고 굴절 없이 다 살아내는 일이었다. - p.172」
압락사스는 세계를 구분 짓는 신이 아니다. 세계 그 자체인 신이고, 어떠한 가능성도 받아들이는 신이다. 알을 깨고 나온 새가 자신을 분명히 알 수 있도록 이정표가 되어주는 신이다. 한마디로 살아야 하는 이유이다.
거창하게 들리겠지만, 앞서 근거 없는 설을 언급한 까닭이 여기 있다. 나는 내가 살아야 하는 이유가 필요했다. 실리적 목표를 지향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나 스스로 나를 인정하기 위해서 말이다. 정신적 버팀목이랄까. 그동안 나는 구분된 세계에 맞춰서 나를 재단하고 조립하려고 했다. 맞지 않는 퍼즐에 억지로 끼워 맞춰져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게 살아가는 일이라고들 하니까. 완전히 틀린 말은 아니다. 모두가 알 속의 새로 사는 세계에서는, 하나하나가 구분 지어지는 세계에서는 규정된 채로 사는 게 맞다고 여겨지기 때문에. 그러한 세계에서 완전히 벗어날 수는 없더라도 자기 자신으로 살아간다면 고독도, 고통도 감내할 힘이 생기지 않을까.
「그래요. 자신의 꿈을 찾아내야 해요. 그러면 길은 쉬워지지요. 그러나 영원히 지속되는 꿈은 없어요. 어느 꿈이든 새 꿈으로 교체되지요. 그러니 어느 꿈에도 집착해서는 안 됩니다. - p.191」
마지막으로 에바 부인이 과정의 고됨을 하소연하는 싱클레어에게 말했듯이, 지향하는 꿈이 전부라고 집착하거나 착각해서는 안 된다. 그것은 새로운 알을 둘러싸는 일이다. 새 꿈이 생기면 다시 둘러싸려는 알을 깨부수고 날아가야 한다. 결국, 살아가는 일은 자기 자신에게로 향하기 위해 끊임없는 세계와의 투쟁이다. 어찌 보면 당연한 말이지만, 당연함의 속성이 빠른 망각임을 감안하면 잊지 말아야 하는 중요한 핵심이다.
아직 나는 알 속의 새다. 그리고 어제까지 나는 알 속이 안전하다고 여겼다. 깨부술 생각은 추호도 한 적이 없었다. 그러나 그 알이, 나를 둘러싼 세계가 내 괴로움의 근간이었다. 아마도 내 괴로움은 쉽게 끝나지 않을 것이다. 그렇게 쉽게 부서질 알이라면 애초에 둘러싸이지도 않았을 테니까 말이다. 이제는 사소하나마 깨뜨리고자 하는 의지가 생겼다. 싱클레어처럼 내가 새로 태어나려는 일은 어렵겠지만, 에바 부인 말대로 내가 충실할 꿈을 찾는다면 길은 쉬워지리라. 그 여정의 첫걸음을 떼었다고 감히 적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