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출처 : 조선인 > 드레스덴 폭격 사건
독일의 드레스덴은 슬라브어로 '숲 속의 사람'이라는 낭만적인 이름을 가진 도시이다. 또한 옛 작센 왕국의 수도로서 바로크 양식의 대표적 건축물인 츠빙어 궁 등 역사적인 건축물과 문화재가 많아 "엘베의 피렌체"라고 불리워졌을만큼 아름다운 도시였다. 그리하여 드레스덴만은 연합국의 폭격을 끝까지 면하게 될 것이라고 생각했던 피난민들에 의해 60만이던 도시 인구는 1945년 초 100만 혹은 120만까지 늘어났다고 추정된다. 이에 독일 정부는 짙어지는 패색을 지우기 위해 성 발렌타인 데이를 앞두고 13일에는 대규모의 시민 축제를 벌리기도 했다.
그러나 피난민들의 기대와 달리 1945년 2월 13일과 14일 이틀간 연합군은 드레스덴에 폭격을 가한다. 영국폭격기 244대와 미국 폭격기 450대가 동원되었고, 13일 밤의 1차 공습에서는 46만개의 폭탄이, 다음 날 새벽 3시의 2차 공습에서는 단 20분 동안 28만개의 소이탄과 1만 1천개의 지뢰가 집중적으로 투하되었다. 소이탄은 불붙은 인이 넓은 범위로 퍼져나가 오랫동안 타도록 만들어진 폭탄으로, 폭격을 당해 파괴당한 건물과 시가지는 불바다가 되었다. 마지막으로 14일 아침 11시 30분, 3차 공습이 30분간 더 이어졌다.
드레스덴 폭격 사건의 경우 3차례의 공습에 쏟아부어진 폭탄은 약 7천톤이었고, 공식적인 사망자는 약 3만 5천명이다. 하지만 살아남은 목격자의 증언에 따르면 신원 확인 없이 매몰시킨 시체가 산을 이루었다고 하고, 잿더미가 된 건물의 경우 아예 시체 발굴 작업이 포기되었다고 한다. 피난민의 신원 파악이 어려웠던 점, 주거 지역의 반과 산업지대의 4분의 1이 화재로 소실된 점 등을 고려하여 역사학자에 따라서는 사망자의 수를 13만 명에서 25만명까지 거론하기도 한다.
폭격의 명분은 동부전선에서의 독일군 저항을 방해하여 소련군의 진격을 돕는다는 것이었다. 문제는 드레스덴이 지역 폭격 전술의 희생양이 되었다는 것이다. 지역 폭격 전술이란 전략적 목표물을 공격하려다 독일 군의 대공 방위망에 의해 폭격기를 잃는 위험을 감수하는 대신에, 폭격기들이 고도 비행을 하며 목표물은 물론 그 일대의 모든 지역을 파괴하기 위해 대량 폭탄을 투하하는 것이다. 즉 지역 폭격 전술은 민간인까지 전쟁의 희생자가 되는 반인륜적 전술이라 하겠다.
게다가 드레스덴 폭격은 전략적 판단이 아니라 전쟁 기간 동안 독일의 런던 공습에 대한 보복성 공격에 지나지 않는다는 지적도 있다. 동원된 폭격기나 폭탄은 미국이 훨씬 많았으나, 작전을 계획하고 지역 전술을 선택하여 소이탄 사용을 불사한 것은 영국측 입장이 반영된 것이기 때문이다. 실상 영국 내에서도 피난민이 집결된 드레스덴 폭격을 반대한 참모가 많았다고 한다. 하지만 영국의 전쟁영웅 해리스 원수가 처칠의 지지를 등에 엎고 작전을 강행한 것이다.
전후 동독의 치하가 된 드레스덴의 별명은 '영원한 공사장'이다. 츠빙어 궁을 복원하는 데 20년이 걸렸고, 아직도 드레스덴의 전후 복구 작업은 현재진행형이다. 하기에 '드레스덴 지역 폭격'의 결과는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도쿄 대공습이나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의 원폭 투하에 버금가는 비극으로 오늘날 평가된다. 또한 드레스덴 폭격은 독일 내 극우파의 득세로 이어지고 있다. 지난해 2월 폭격 60주년을 맞아 드레스덴에서 열린 추모 행사는 전후 최대 규모의 극우파 시위로 난장판이 되고 말았다. 나치를 추종하는 5천여 명의 극우 민족주의 세력이 이날 드레스덴 곳곳에서 `연합군의 무차별 폭격'에 대한 미국과 영국의 사과를 요구하며 시위를 벌인 것이다. 이미 2004년 가을 드레스덴이 속한 작센주는 사실상 히틀러를 추종하는 국가민주당(NPD)에게 10% 가까운 지지율을 보여 국가민주당을 처음으로 주의회에 진출시킨 바 있다. 이대로 드레스덴은 꼬리에 꼬리를 무는 역사의 비극의 현장이 될런지 두고 볼 일이다.
또 다른 비극은 아프가니스탄 전쟁이나 이라크 전쟁에서 이어지고 있다. 이제 지역 폭격 전술은 미국이 벌이는 전쟁의 기본 전술이 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