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읽어주는 남자
베른하르트 슐링크 지음 / 세계사 / 1999년 1월
평점 :
품절


시간이 많이 흘렀는데도 일제 식민지의 상처는 쉽게 아물지 않고 있다. 잊을 만하면 터져나오는 일제의 망령들은 식민지를 경험하지 못한 후세들에게도 일본에 대한 곱지 않은 감정들을 안겨준다. 그들의 물건을 사용하고 그들의 문화를 받아들이는 것과는 별개의 문제로 말이다. 피해자였기 때문일 것이다. 그럼 가해자였던 일본인들에게 그 시대는 어떤 의미로 다가올까. 시대를 이끌어갔던 사람들보다는 시대에 휩쓸려 지나왔던 사람들이 훨씬 많은데, 식민지 사람들과 그들이 받은 수모와 고난에 대해 일본인들은 어떻게 생각하는지 가끔 궁금했다.

짧은 독서탓에 그때의 이야기를 담은 일본 문학작품을 읽지는 못했다. 일본 작가의 이야기는 읽지 못했지만 일본과 함께 2차 세계대전을 일으키고 많은 사람들에게 잊을 수 없는 고통을 주었던 독일 작가가 쓴 소설을 읽었다. '나치'라는 시대적 급류에 휩쓸려 그 당시를 지나온 독일인들은 '나치'와 그 시대를 어떻게 받아들일까. 베른하르트 술링크의 <책 읽어주는 남자>에서 우린 가해자이자 피해자였던 독일인들을 만날 수 있다.

<책 읽어주는 남자>는 궁극적으로는 한 여자와 한 남자의 사랑이야기이다. 열 다섯 살 소년 미하엘이 서른 여섯 살 여인 한나를 만나 사랑을 나누게 되는 1부, 이제는 법대생이 된 소년이 나치 전범을 다루는 재판정에서 헤어진 옛 여인을 만나게 되는 2부, 교도소 출소를 앞두고 이제는 할머니가 된 옛 여인과 중년의 신사가 된 소년이 만나는 3부의 이야기로 구성된 <책 읽어주는 남자>에서 두 사람의 사랑을 방해하는 것은 스무살이 넘는 두 사람의 나이차가 아니다. 두 사람의 사랑을 방해하는 건 한나가 끝까지 숨기고 싶어했던 '문맹'과 그녀가 젊은 시절 몸담았던 '나치'의 전적, 바로 그것이었다.

베른하르트 슐링크는 '문맹'이라는 개인적 한계가 한 여인에게 개인적, 사회적, 역사적으로 어떻게 작용했는가를 차분하게 그려냄으로써 역시 시대적 '문맹'이었던 독일인들이 범했던 사회적, 역사적 한계들을 고찰하고 있다. 문맹을 숨기기 위해 '나치'를 선택했던 한나는 그녀가 사랑했던 소년에게 그 사실을 밝히고 싶지 않아 나치 전범으로서 모든 책임을 뒤집어쓴다.

한나가 개인적 한계로 택했던 시대에 대한 책임을 교도소 생활로 갚고 있었다면, 미하엘은 그녀에게 책을 읽어보내는 일로 그 시대에 대한 책임을 갚는다. 그의 일생에 엄청난 영향을 미칠 만큼 사랑했던 여인이 나치였음을 알았을 때 미하엘의 심정은 어떠했을까. 시대적 급류에 휩쓸려 '나치'로 살아갔지만 그 급류에서 헤어나와 실상을 파악한 독일인들의 심정이 미하엘과 같지 않았을까. 독일인들에게도 씻을 수 없는 상처로 남아 있는 '나치'의 그림자를 발견하게 된 미하엘은 그녀를 외면하고 그녀 앞에 나서지 않는다. 어느 정도 시간이 흐른 뒤 책을 읽은 테이프를 그녀에게 보낼 뿐. 책을 테이프에 녹음하고 그녀에게 보냄으로써 미하엘은 어쩔 수없이 나치가 되었던 여인을 그 나름의 방식으로 보듬어 안는다.

한나와 미하엘의 이야기를 통해 비록 그들이 선택했지만 역시 시대의 피해자가 되고 만 독일인들의 내면을 돌아볼 수 있었다. 가해자 신분으로서 그들에게 피해를 입은 많은 사람들에게 사과를 하고 보상을 하지만, 시대에 따라갈 수밖에 없었던 대다수의 독일인들 역시 그 시대의 피해자였다는 사실을. 그래서 이렇게나마 그때의 그들을 보듬어 안을 수밖에 없음을.

책을 덮고도 한참동안 미하엘과 한나의 사랑에 안타까워했다. 그들 사이에 끼어든 역사로 인해 앞에 나서지도 못하고 표현할 수도 없었던 많은 시간들이 가슴아팠고, 한나의 그늘에서 벗어날 수 없었던 미하엘이 홀로 남게 된 사실이 마음에 걸리기도 한 베른하르트 슐링크의 소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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