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혜란의 <나이듦에 대하여>란 책에 말이 없었던 저자의 친정어머니에 관한 이야기가 나온다. 아마 '아직도 어머니를 모른다'란 제목이었던 것 같은데, 거기서 저자는 친정어머니가 말이 없었던 게 타고난 성품 탓이기도 하겠지만 말많은 여자를 질색하시는 친정아버지 탓도 어느 정도 있었을 것이라고 이야기하고 있다. 어머니를 잘 알지 못하는 딸의 안타까움을 토로한 글이었는데도 정작 마음에 와 닿는 건 그 부분이었다. 세상이 많이 바뀌었다고는 하지만 아직도 이 땅에서 여자로 살아가는 건 쉽지가 않다. 여전히 어른들은 말많고 잘 따지는 여자를 질색으로 여기고, 행동에도 제약이 많이 따른다. 공부나 취직도 될 수 있으면 남자를 위해 양보하라고 등떠미는 분위기다. 지금도 생각나는 이야기. 대학입학 후 한 교수님이 여학생들은 될 수 있으면 대학원에 진학하지 말라는 것이다. 결혼하고 아이 낳느라 중간에서 공부포기 할 바엔 처음부터 남학생에게 기회를 주라던 교수님의 태도에 어처구니없어 하던 기억이 새삼스럽다. 그나마 낫다는 대학 사회마저 이러니 여성학을 하는 학자들은 자연스레 전투적이 될 수밖에 없을 것이다. 뜬금없이 여성학 이야기까지 꺼낸 것은 다이애나 콜즈의 <영리한 공주> 이야기를 하고 싶어서이다.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동화 속 공주들은 대개 예쁘고 마음씨 고운 모습으로 나타난다. 과장된 표현이긴 하지만 다소곳한 모습의 그녀들에게 주어진 최대의 임무는 백마 탄 왕자님을 만나 결혼에 성공하는 것이다. 자기 삶에 능동적이지 못하고 타인에게 자신을 맡겨버리는 공주 이야기는 사실 아이들에게 권해주고 싶지 않았다. 그렇잖아도 여자로 살아가는데 제약이 많은 세상인데, 동화에서라도 능동적이고 진취적인 여성상을 보여주고 싶었다. 다이애나 콜즈가 그려내는 아레카 공주는 '공주는 어떠해야 한다'란 도식에서 크게 벗어나 있는 인물이다. 매력적인 대화법을 익히기보다 책읽기를 좋아하고, 바느질과 그림을 배운 공주는 자신에게 닥친 어려움을 슬기롭게 이겨나간다. 마법사를 물리친 후에도 한 곳에 안주하기보다 세상을 구경하면서 다른 사람들에게 도움을 주고자 하는 공주는 확실히 여타의 공주 이야기와는 다른 공주 이야기이다. 아레카 공주가 모법답안은 될 수 없겠지만, 우리 아이들에게 길 하나는 알려줄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 지식과 지혜를 바탕으로 자기 삶을 개척해나가는 하나의 길 말이다. 능동적이고 진취적으로 자기 삶을 개척해나가는 딸이 되길 원하는 부모들이라면 아이들에게 권해보면 어떨까. 색다른 여자 아이 이야기 <삐삐 롱스타킹> 시리즈와 <종이봉지 공주>, <세상에서 가장 큰 여자아이 안젤리카>도 함께 권해보면 좋을 듯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