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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친구 커트니 ㅣ 비룡소의 그림동화 29
존 버닝햄 글.그림, 고승희 옮김 / 비룡소 / 1996년 5월
평점 :
존 버닝햄의 <내 친구 커트니>를 보면서 제일 먼저 생각난 것은 우습게도 학창시절이었다. 요즘도 그리 보기 어려운 광경은 아니라는 생각이 드는데, 학교 다닐 무렵 어머니와 다툰 적이 있다. 친구 문제였다. 별로 넉넉하지 못한 가정에, 학교 성적마저 좋지 않은 친구를 사귀는 것을 어머닌 쉽게 받아들이지 못하셨다. 될 수 있으면 나보다 좋은 조건의 친구, 좋은 성적의 친구를 사귀라고 했지 성격 좋고 사람 좋은 친구를 사귀라고는 하지 않았다.
어머니의 마음을 이해하지 못한 것은 아니었다. 사실, 자식을 키우는 입장이 되면서, 어릴 때 그렇게 싫어했던 어머니의 이중잣대가 내게도 있음을 깨닫곤 놀라기도 했다. 나 역시 우리 아이들이 좀더 좋은 조건의 친구들을 사귀길 바라고 있었던 것이다. 우리 아이가 좋아하는 친구를 사귀는 것이 아니라.
아이들이 개를 키우고 싶다고 말을 꺼냈을 때 어른들은 반대한다. 번거롭기 때문이다. 밥도 줘야 되고, 운동도 시켜야 되고, 뒤처리 등 일이 늘어나는 것을 싫어한 어른들은 당연히 반대한다. 아이들이 그 모든 일을 떠맡기로 했을 때 어른들은 다시 어른들의 잣대를 들이민다. 젊고 좋은 혈통의 개를 고르라고.
존 버닝햄은 아이들의 선택에서 우리 어른들이 얼마나 위선적인지를 보여준다. 다른 사람들이 데려갈 수 있는 개가 아니고 자기들이 아니면 데려가지 않을 개를 고르는 아이들의 선택. 얼마나 순수하고 사랑스러운가. 사랑이란 이런 저런 잣대로 결코 잴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아이들의 선택을 통해 보여준다.
아무도 데려가지 않을 개 '커트니'는 생각밖으로 많은 재주를 지닌 개였다. 요리도 하고 마술도 부리고 아이를 돌보기도 하는 개. 커트니가 온 뒤로 엄마는 집안 일에서 해방(?)되었고 아빠도 한결 여유로워졌다. 불이 났을 땐 아이까지 구해주기도 하는 커트니였지만 어른들에게 완전히 받아들여진 것은 아니었다.
커트니가 온다간다 말도 없이 사라졌을 때 어른들은 언제 그랬냐는 듯 떠돌이개는 그래서 나쁘다는 식의 말을 한다. 커트니가 사라진 뒤 아이들이 받았을 상처를 어루만져 줄 생각은 없다. 휴가지에서 아이들이 사고를 당했을 때 아이들을 구해준 미지의 인물. 존 버닝햄은 희미하게 커트니를 그려놓음으로써 구원자가 커트니였음을 암시한다.
존 버닝햄이 커트니를 통해 이야기하고 싶었던 것은 무엇이었을까. 어려운 일이 닥쳤을 때 아이들에게 힘이 되어 줄 수 있는 건 주위에 있을 만한 젊고 좋은 혈통이 아니라 겉보기엔 하잘것없어 보이더라도 아이들이 사랑하고 이해하는 어떤 존재라는 것, 그것이 아니었을까. 그걸 이해시키기 위해 커트니는 또다른 아이들을 찾아 말없이 집을 떠난 것이 아니었을까.
존 버닝햄의 의도가 어떻든 간에, 커트니와 같은 개가 있다면 참 좋겠다는 생각을 그림책을 읽는 내내 했다. 커트니와 같은 개가 내게도 있어서 식탁에 앉기만 하면 밥을 먹을 수 있고 아이도 돌봐주고 바이올린도 연주해 준다면 얼마나 좋을까... '메리 포핀스' 다음으로 작중인물이 내 곁에 있음 좋겠다는 생각을 하게 만든 책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