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주 오래된 농담
박완서 지음 / 실천문학사 / 2000년 10월
평점 :
구판절판


이젠 고희의 나이에 접어든 박완서의 <아주 오래된 농담>은 그녀의 작품이 대개 그렇듯이 현대인을 지배하고 있는 자본주의적 속물성과 가부장적 이데올로기를 비판하고 있는 작품이라고 볼 수 있다. <아주 오래된 농담>의 이야기를 이끌어가는 인물은 의학박사 심영빈이다. 심영빈의 매제 송경호의 죽음을 둘러싸고 송씨 집안이 벌이는 이야기와 심영빈의 결혼생활과 외도에 대한 이야기로 나눌 수 있는 이 작품을 지배하고 있는 것은 사람들을 둘러싸고 있는 자본주의적 속물성과 가부장적 이데올로기, 그럼에도 이와 무관한 듯 행동하는 사람들의 허위의식이라고 볼 수 있다.

이 작품 속 등장인물들은 누구 하나 자본주의적 속물성과 가부장적 이데올로기로부터 자유롭지 못하다. 돈이 지닌 힘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기에 이를 이용하는 송회장 일가가 자본주의적 속물성을 여실히 드러내는 인물들이라면 심영빈 일가는 부정축재로 파직 당한 아버지로 인해 나름대로 도덕적 강박관념에 사로잡혀 지내는 인물들이다. 거기에 맞물리면서 두 가정을 지배하는 가부장적 이데올로기. 영빈의 여동생 영묘는 '돈'의 논리에 남편을 잃고 자식과 함께 서 있을 자리마저 잃어가는가 하면 교사인 영빈의 아내는 아들을 낳기 위해 뱃속의 아이를 서슴없이 지운다. 남편 몰래 산부인과를 다니며 아들을 가지려 노력하는 아내와 이 사실을 알면서도 모르는 척 속아주는 남편. 한 생명의 탄생과 죽음마저 가부장적 이데올로기와 자본의 논리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대목들이 아닐 수 없다.

<아주 오래된 농담>에서 그나마 자본의 지배를 벗어난 인물이 유현금이다. 어려서부터 '자본'의 힘을 알았던 현금은 돈으로 얻을 수 있는 즐거움을 마음껏 누린 후에야 비로소 돈에 초연해질 수 있게 된다. 하지만 그녀 역시 가부장적 이데올로기로부터 자유롭지는 못하다. 심영빈과 불륜의 관계에 빠진 현금은 영빈의 아이를 낳고 싶다는 소망을 가지게 되고 산부인과를 찾게 되니까.

심영빈이 병원 복도에서 유현금을 만나 불륜의 관계를 맺게 되고, 매제 송경호가 암에 걸려 죽음을 맞이하고, 아내가 늦동이 아들을 낳게 되는 과정을 통해 박완서는 우리 사회를 지배하고 있는 '돈'의 모습과 가부장적 세계관과 자본에 황폐해지는 여자들의 삶을 보여준다. 재벌 가문에 시집을 갔지만 자신이 서 있을 자리마저 잃어가는 영묘, '아들의 어머니가 되기 위해' 산부인과 병원을 드나드는 아내나 결혼이라는 제도 밖에서 애인의 아이를 갖기 위해 산부인과를 찾아간 현금 모두 가부장적 이데올리기와 자본주의적 속물성이 넘쳐나는 이 땅에서 살아가는 여자들이 처해있는 현실을 묘사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인간이 지니고 있을 속물성과 허위의식에 대한 비판적 시각을 이야기하고 있긴 하지만 <아주 오래된 농담>은 예전의 박완서 작품들에 비해 빼어난 재미를 지니고 있지는 않다. 지이야기가 지루하게 전개되는가 하면 느닷없이 나타난 영빈의 형이 해결사처럼 영묘의 일을 해결하고 사라져버리는 대목은 설득력이 떨어지기도 한다. 불필요한 묘사들도 눈에 많이 띄고. 독자들을 끌어들이는 흡입력이 그만큼 약해졌다는 반증일 터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박완서의 글을 쉽게 떨쳐버리지 못하는 이유는 고희의 나이가 넘었음에도 여전히 소설쓰는 고통을 즐기는 노소설가로서의 성실한 자세와 아직은 무뎌지지 않은 그녀의 필체에 있다고 할 수 있다. 능소화에 대한 묘사처럼 말이다. 다음 작품은 또 어떤 세계를 이야기하고 있을지 기대를 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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