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0728 일


**게다가 좀 더 섬세히 따져보면, 인셀이 더욱 폭넓고 뿌리 깊은 문화적 현상의 징후라는 것을 알 수 있다. 말하자면 인셀은 타인이 자신을 지속적으로, 애정과 존경을 담아 우러러보길 기대하는 남성들이 가진 유해한 특권의식의 결정체다. 그리고 이들은 그런 눈길로 자신들을 추앙하지 않았거나 그렇게 하기를 거부한 사람들을 겨냥하고 심지어 파괴한다. 그런 애정과 추앙을 마땅히 받아야 한다고 믿는 특권의식이 가정폭력, 데이트폭력, 그리고 친밀관계에 있는 파트너에게 폭력을 가하는 상당수 남성들과 공유하는 특질이기도 하다는 것을 이 책에서 밝히고자 한다.

<남성 특권 / 케이트 만>


참 피곤한 놈들이다.

니가 김연아냐?

타인이 지속적으로, 애정과 존경을 담아 우러러보길 기대하려면

김연아 정도는 되야하는 거 아니냐?

대가리에 좆물만 들었나 진짜(이것은 데드풀st 틱장애 드립).


[인셀이 더욱 폭넓고 뿌리 깊은 문화적 현상의 징후라는 것]

노노!

문화는 거들 뿐.

걍 인정하자, y염색체 자체의 결함이라는 것을.

그 어떤 약품으로도 제거되지 않는 욕실 곰팡이라는 것을 인정하자.

욕실을 리모델링하지 않는 이상엔 해결이 되지 않는 곰팡이라는 것을!!


대부분의 진보적 인사들은 자본주의를 비난하지만

나는 자본주의가 좋다.

어떤 점이 좋냐면

자본주의는 질척대지 않아서 좋다.

자본주의에는 '우리가 남이가' 식의 질척댐이 없어서 좋다.


의외로 자본주의 구조에서는

바틀비st로 존버할 수 있다.

[안 하는 편을 택하는] 것처럼 

적게 버는 것을 택하는 것에 대해서 그 누구도 질척대지 않는다.

"니가 1만 원을 지불했으니 나는 1만 원치 서비스를 제공한 것, 

더 많은 서비스를 제공받고 싶으면 돈을 더 지불해."

라고 응대할 수 있는 것이다.

그래서 좋다. 

1만 원을 지불한 사람들의 질척댐을 처리할 수 있어서 좋다.


가부장제와 자본주의가 언제까지 파트너십을 유지할 수 있을까?

나의 경우 자본주의 구조에 탑승했기에 가부장제는 사뿐히 즈려밟을 수 있었다.

가부장제는 인셀처럼 밑도 끝도 없는 존경과 희생과 애정을 요구하지만

자본주의는 쿨하다.

내가 '돈 벌기 싫다'라고 하면 더 이상 구질구질하게 집착하지 않는다.

일 조금 하고, 돈 조금 벌고, 덜 쓰겠다는 나를 니들이 어쩔 건가 ㅋㅋㅋ


페미니즘 책을 읽으면 어쩔 수 없이 드는 생각은

'이 저자들은 y염색체를 고쳐서 쓸 수 있다'는 망상에 빠져있구나 하는 것.


나의 생각은 

인류가 가부장제의 구조로 살아왔다는 것 자체가

망함의 증거라고 보기에

할 수 있는 유일한 일은

망함 이후의 멸종을 의연히 받아들이고

이왕 태어난 사람들은 나처럼 수신에 힘쓰시고.

더 이상 번식하지 않는 것.

말고 다른 방법은 없다는 것이나 깨닫 길.


사사키 아타루가 <잘라라, 기도하는 그 손을>에서 국가의 존립이유는 번식을 위한 것이라고 하던데

ㅋㅋㅋㅋ

웃겨 죽을 뻔 했다.

무슨 철학자라는 놈이 이렇게 나이브 하냐!


번식보단 주변국가보다 더 많은 군병력 확보, 노동자 확보라면 모를까.


비겁한 인간일 수록 휴머니즘 뒤에 숨어서 개짖는 소리만 지껄여댄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240727 토.


**그들은 혼자였습니다. 그런 사람들이야 어딜 가도 있다고 말은 할 수 있을 겁니다. 하지만 그들이 느끼는 외로움은 각기 달랐습니다. 그들의 머릿속과 마음속에서는 그 외로움이 덩굴식물처럼 자랐을 겁니다. (중략) 타인의 삶에 아무런 흔적도 남길 수 없는 사람으로 산다는 게 말입니다. 외로운 사람들은 평생을 살면서 주변 사람들에게 아무런 관심도 불러일으키지 못했습니다.


**여러 해에 걸친 '부득이한 격리수용' 생활에서 그를 구해준 것은 바로 일상이란 챗바퀴였다.

사이먼 베리쉬는 습관이라는 장벽을 쌓아올려 자신을 향한 타인의 멸시와 고독을 견뎌냈다. 바닥으로 추락한 그는 새로운 삶을 만들어야 했고 새로운 방식으로 경찰 생활을 이어나가야 했다.


<이름 없는 자 / 도나토 카리시>


혼자 있는 게 좋다. 

다른 사람이 내 시간을 뺐는 게 싫다. 

사람들과 인사를 주고받는 것조차 귀찮다.

주변 사람들이 나를 투명인간 취급해준다면 나는 슬프기보다

오히려 '와 땡큐땡큐'할 것 같다.


귓구멍을 에어팟으로 틀어 막고

영화ost를 감상하고 있거나

범죄관련 팟캐스트를 듣고 있는데

누군가 나에게 말을 거는 소리가 흐릿하게 들려오면 

진짜 짜증난다.


외롭다는 이유만으로 범죄(테러나 살인)를 저지를 수 있는 게 인간의 특성이라면

지금과 같은 저출생으로 서서히 소멸하는 게 정답인 거 같다.


공짜표가 생겨서 <데드풀과 울버린>을 봤다. 

지금 이 일기는 데드풀과 울버린 ost라기보단 삽입곡들을 들으면서 쓰고 있다.

한 때 헐리웃에서 가장 섹시한 남자배우 1위를 한 라이언 레이놀즈(는 헐리웃에서 가장 섹시한 여자 배우 1위의 스칼렛 요한슨과 결혼해서 나는 놀라 자빠질 뻔했다 ㅋ 이혼 후 블레이크 라이블리와 재혼해서 한 번 더 식겁. 헐리웃 최강 섹시남 인증 ㅋㅋㅋㅋ)가

음담패설 틱장애 연기(너 ADHD 아니고 틱장애!)를 하는 게 웃겼다는 거 말곤

시간 낭비였던 128분.

(하지만 이런 영화를 보는 게 사람 만나서 기 빨리는 거보다 만 배 낫다)

데드풀의 필살기 자체가 너무 같잖아서, 

데드풀은 아이쿠 왕자냐?

모든 위험에서도 살아남아서 헛소리를 지껄여 대는 아이쿠 왕자(제작 ebs)처럼

재생능력 아니 부활능력이라니 ㅋㅋㅋ 뭐냐 진짜.


내 주변 인간들을 덜 미워하기 위해서

살인범죄 이야기를 가까이하는 중.

선량하기보다 적어도 사람을 죽이지는 않는 정도의 수준인 사람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240721 일.


계통발생적인 관점에서 출산하려는 충동은 극도로 원시적이다. 만일 '퇴행적인'이 '원시적인'으로 이해된다면, 출산하는 것은 퇴행적이다. 그리고 합리적인 동기를 가지고서 출산하지 않는 것은 진화적으로 더 최근 일이고 더 진보된 일이다.


이미 인구가 많은데도 그 인구의 대체율 이하로 출산율이 떨어졌다는 것을 우려하며 정부 개입이 이루어지기도 한다. 여기서 우려라는 건 노동 연령에 더 적은 수의 사람들이 있게 될 것이고 그러면 더 많아진 노인 인구를 먹여 살릴 납세자가 적어질 것이라는 우려다.


아이를 가짐으로써 자신의 가치를 높이는 것은 인질을 잡음으로써 자신의 가치를 높이는 것과 같을 수 있다. 우리는 그렇게 가치를 높이는 일이 불공정하며 그런 행위에 보상하지 않기로 결정할 수 있다. 그렇게 결정하면 아이들의 삶을 더 나쁘게 만들 수 있지만, 그러한 결과를 방지하는 비용이 아이를 갖지 않은 사람들의 어깨에 지워져야만 하는가?


특정한 사람이 존재하게 되는 것이 가능성이 매우 낮은 일이라는 인식을, 존재하게 되는 것이 항상 심각한 해악이라는 인식과 결합하면, 존재하게 된 것은 진짜 운이 나쁜 일이라는 결론이 산출된다. 해를 입는다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나쁘다. 그렇게 해를 입을 가능성이 아주 희박할 때 그 해를 입는다는 것은 더욱 나쁜 일이다.


<태어나지 않는 것이 낫다 / 데이비드 베너타>



매일 배상훈의 크라임을 듣는다. 

여긴 어디? 당연 지옥!

태어나지 않는 것이 낫다!! 가라사대.


배상훈의 크라임 에피소드들에서 가장 놀라운 점은 40~50% 정도가 가족 범죄라는 것. 

부모자식, 혹은 배우자 간, 혹은 부모자식 그리고 배우자가 서로가 서로를 죽이는 것.

와우!!


영화 <불한당 : 나쁜 놈들의 세상>의 주제는 무엇인가?

그건 바로 한재호(설경구)의 명대사 "사람을 믿지 말고 상황을 믿어야 해."이다.

이 대사를 약간 변주해 볼까? "가족을 믿지 말고 돈을 믿어야 해."

이 대사를 또 약간 변주해 볼까? "가족을 만들지 말고 직업을 구해야 해."


나는 연대, 화합, 평화, 이런 거 믿지 않는다.

왜냐 인간종에게 이것은 가능하지 않다는 것을 어렴풋이 알아기 때문.

가능했다면 진작에 평화롭게 살았겠지 ㅋㅋ

트럼프도 푸틴도 착한 새나라의 어른이로 자랐겠지.


개개의 인간은 각자의 근본환상이라는 우물 속에서 혼자 살아가니까.

대표적으로는 내가 그렇다.

난 푸코가 뭐라든 '개인으로서' 존재하고 싶다. 

아무리 결과가 좋더라도 '남이랑 같이' 뭔가를 이루어내는 거 딱 질색이다.

푸코가 살아있다면 "인마, 넌 내 책 읽지 마!"라고 했을지도.

하하하!

하지만 여긴 자본주의.

푸코 당신 책을 사서 읽는 사람은 나.

작년 여름 절반쯤 읽고 만 <감시와 처벌>을 다시 읽어볼 생각.

왜냐, 작년의 나에겐 배상훈의 크라임이 없었고, 지금의 나에겐 배상훈의 크라임이 있기 때문이지.

연쇄살임범에 대한 본격적인 연구는 미국에서도 1970년대 말부터 시작되었다고 한다.

푸코는 1984년 사망.


자본주의(돈)는 개인주의와 함께 간다!

필요이상의 노동(돈벌이)을 하지 않는 나에게 돈은 훌륭한 무기이자 방패다.

현대의 자본주의는 더 많은 수익을 만들어내기 위해서

개인들이 더 많이 먹고 덜 자게 하는 방식으로 사람들을 조련시킨다고 한다.

이걸 한 방에 해내는 콘텐츠는 먹방 유튜브!

자본주의라는 무기를 지붕 삼아 살고 있는 나는 안티 자본주의 방식으로 생존하고 있다.

더 많이 자고 덜 먹는!!

심지어 요즘엔 의류구입도 0원!!

더욱이 나는 혼자 하는 활동 책 읽기, 일기 쓰기, 영화 보기가 소확행인 사람.

이 얼마나 가성비 높은 여가 활동인가!

머릿속이 번식, 양육, 아파트 값, 주식 같은 똥 같은 걸로 가득 찬 인간들이랑

어울리느니

그냥 혼자 영화 보는 게 낫다.

별점 2점 이하의 영화라도 더 낫다.


그래서 요즘은 그 누구와도 '대화'라는 걸 하지 않고 있는데

그 결과는 놀랍다!

어깨결림이 사라진 것이다!!


라캉 말마따나 개개의 사람은 결코 자신의 우물 안(근본환상)을 벗어날 수 없다면

굳이 타인(여기서 내가 말하는 타인은 물리적 공간에 함께 존재하는 타인, 실시간으로 대화를 주고받을 수 있는 존재)이 왜 필요한가? 다시 말해 객체로서의 타인 말고 주체로서의 타인은 무쓸모 하다는 말.

어차피 나는 너를 이해 못하고, 너도 나를 이해 못하는 게 자연의 섭리라면

나는 너를 객체로 받아들이는 것이 최선.

어떤 부류의 인간들은 그저 자연재해로 받아들이고 살아갈 수 밖에 없다.

그런 인간들이 태어나는 걸 어쩔 건가 ㅋ

수정란 때부터 조직 검사를 해서 마이너리티 리포트 작성하고 낙태를 하시던가요.

그럴 수 없다면 지진, 홍수, 태풍처럼 받아들일 수 밖에.


인간을 이해하려는 노력(학문)

인간을 좋게 만들려는 노력(학문)

같은 거 

내 눈엔 걍 기우제같아 보일 뿐.

첩경은 마이너리티 리포트식 낙태인데 ㅋ 

이건 4차 산업혁명 식 아우슈비츠 행정이겠지 ㅉ


이래도 저래도 다 문제다

그러니 애초에 태어나지 않는 게 유일한 해답!


나는 대다수 인간들의 딜레마가 이해가 안된다.

몸무게 걱정을 하면서 자꾸 먹는 것. 

통장 잔고 걱정하면서 계속 소비하는 것.

시험 걱정하면서 공부하지 않는 것.

환경문제, 정치문제, 경제문제를 걱정하면서 자식을 낳는 것.

건강 상태를 걱정하면서 엉망인 생활습관을 그대로 유지하는 것.


나에겐 위에 언급한 딜레마적 상황(둘 다 갖고 싶은 욕심)이 없다.

덜 먹는 것, 소비하지 않는 것, 공부하는 것, 자식 낳지 않는 것, 건강한 생활습관 유지하는 것

이 모든 것들을 나는 별 어려움 없이 다 해 낼 수 있다.

몇 년 간 나를 괴롭히던 건강 검진 결과도 기어이 좋게 만들어 냈다.


이것이 나의 강점이자 약점인 것.

대개의 사람들은 정신력보다 육체력(?)이 강하다.

나는 그 반대. 

나약한 육체를 강력한 정신력으로 보강하면서 살고 있는 것.

의지대로 살지 않고 육체의 욕구대로 사는 사람들을 보고 있노라면...

아 시발 태어나지 않았어야 했다. 

이런 인간들이 만든 사회(시스템)속에서 생존해내야 하다니 진짜 좆됐다.

싶은. 


예전에도 종종 했던 생각이지만, 

내가 '월-E'같다.

홀로 지구에 남아서 인간들이 만들어낸 쓰레기를 치우는 임무를 수행하고 있는 월이 같다.

월이에게 인간이 남긴 것들(그게 좋은 것이든 나쁜 것이든 그저그런 것이든)은 모두 객체에 지나지 않으며

그 물건들, 역사들, 사연들의 가치는 월이의 기준(근본환상)에 따라 결정된다.

이를 테면 다이아몬드 반지는 버리고 까르티에 케이스는 수집하는.


사람들이 공감 공감 거리는 것 대부분은 공감이 아닌 공범의식 강요 같다.

그래서 장삼이사 인간들이 아픔과 고통에 별 흥미도 공감도 못 느낀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240720 토.

김연수를 싫어한다. 
김연수가 한국 소설계의 설경구 대접을 받던 시절 <네가 누구든 얼마나 외롭든>을 읽고, 촌스럽다고 생각했다.
뭐야 매일 라면 먹고 살 찌워서 연기하면 연기파 대배우?(설경구 주연의 영화 <역도산>을 보고 한 생각). 

생각해보면 한국 소설을 즐겨 읽지 않는 거 같다. 왤까?
아마도 그건 한국 소설의 대부분이 지지리궁상 혹은 라떼는 말이야여서 인 듯.
최근에 읽은 최은영의 <아주 희미한 빛으로도>만 해도 지지리궁상, 찢어지는 가난 뿐이다.
그리고 나는 이런 이야기가 싫다.
제일 싫었던 이야기는 <답신>이었다. 착한 김이설?? 난 김이설 소설은 못 읽는다. 비위 상함.

김사과의 <하이라이프>는 매우 만족, 대 만 족!! 이다.
<소유의 종말>의 주인공은 뜨거운 쌀국수를 좋아한다. 
폭염에도 쌀국수를 포기할 수가 없다. 
파텍필릭 시계를 끼고 땀을 뻘뻘 흘리면서 쌀국수를 먹는 주인공! 
생각만해도 피식 피식 웃음이 나온다. 

이 소설집의 백미는 단연 <두 정원 이야기>다!
이런 이야기가 필요했다.
나사가 절반 쯤 빠진 현재(2020년대)를 살아가고 있는 인간들 이야기.
슈퍼마켓 쇼핑 씬 어쩔.

르포<일할 자격>과 소설<두 정원 이야기>.
둘 다 리얼이다.
하지만 나에게 더 와닿는 리얼은 소설<두 정원 이야기>다.
이 시대의 '평균치' 인간들의 이야기.

아, 내가 김사과 소설을 좋아하는 이유는
의식주 소비재에 대한 구체적 언급 때문이다.
그 구체성은 시대상을 반영하는 것이므로 매우 중요하다.
영화<덤 머니>의 모든 등장인물이 마스크를 착용하는 것처럼 중요하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2024.7.16. 화요일. 장마다. 아침부터 비 많이 내리는 중


2018년 일기(현재는 비공개 상태)를 연대순으로 읽던 중

'나는 살인 이야기가 싫다. 그래서 즐겨 읽지 않는다'는 식의 문장을 읽고 놀랐다.

사실이었다. 

적어도 이건 올해 부처님오신날 전날까지는 사실이었다.

부처님오신날 이후 지금까지의 약 60여일 간의 내 일상에 '살인'이 없었던 날은

단 하루도 없었다.

나의 하루는 <오늘 나는 / 이랑>으로 시작하여 

팟빵 크라임으로 전개되고 

팟빵 크라임으로 절정에 이르고 

팟빵 크라임으로 끝이 난다. 

심지어 팟빵 크라임에서 언급하는 영화를 찾아보고, 책을 찾아 읽는다. 


과거의 나는 그나마 있는 인류애라도 잃지 않기 위해 살인(사건, 이야기)을 멀리했다.

지금의 나는 살인을 하지 않기 위해서 살인을 듣고, 읽고, 본다.

인류애는 가뭄의 논바닥처럼 말라 갈라져버린지 오래다.


어제는 '아, 차라리 내가 소시오패스나 사이코패스(이 둘의 정확한 차이는 무엇인가?)였다면 

얼마나 속 편하고 좋았을까?' 하는 생각을 했다. 

내 안의 미약한 측은지심이 싫다. 

내가 돕지 않는다면 저 아기는 절벽에서 떨어져 죽겠지, 

죽든가 말든가 내 알 바 아님. 

이래 버리고 싶다. 

크라임에 나오는 일부 경찰, 검사, 판사들처럼. 

아몰랑 내 알 바 아님. 참 편할 듯. 


파멸이 불 보 듯 뻔하지만

방관하고 싶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