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시바시 다카오 

  <대청제국 1616-1799> 

  휴머니스트 2009 

 

 

 

  

p.47 

청조의 지배 체제를 정비하고, 한(칸)이 중국 황제를 겸하는 형식의 지배권을 확립한 것은 강희제의 뒤를 이은 옹정제. 그가 반청사상을 통제할 목적으로 편찬한 <대의각미록>은 한족의 중국이라는 좁은 중국국가론(소중화주의)의 구조를 넘어, 다른 민족도 포함하는 넓은 중국중가론(대중화주의)를 주창한 것으로 평가. 여기에서 새로운 다민족국가 중국으로서의 정치 이론이 제시된 것이다. 옹정제의 뒤를 이은 건륭제는 그 지배 영역을 크게 확대함으로써 다민족국가 중국의 형성을 실천했다. 그가 이룩한 청조의 최대 판도에는 만주족, 몽골족, 한족, 티베트족 세계 외에도 사상 처음으로 이슬람 세계의 일부인 위구르족 세계까지 포함되어 현재까지 계승되는 '오족의 중국'이 형성되었다. 

p.73-4

청조에 보이는 양면성 

청조는 이제까지 두 가지 면으로 설명되는 경우가 많았다. 즉, 명조를 잇는 중국 최후의 전통적 전제왕조(한족사회와 농경사회의 중국적 왕조)로서와 만주족 왕조(일반적으로 원조를 잇는 중국 최후의 정복왕조)로서의 두 가지 면이다. 

전통적 전제왕조로 보는 시각의 배경에는 청조의 중국 내지에 대한 지배 체제에 지극히 중국적인 요소가 엿보인다는 사실이 있다. 중국 내지로 진출할 즈음 명조의 계승자로서의 입장을 강조하고자 했던 점, 중국 내지를 경제 기반으로 하는 농경국가의 형설을 꾀한 청조 지배 체제의 대부분이 중국 전통의 관료제기구를 위시한 명조의 여러 제도를 답습했던 점, 지배 이념에 주자학이 중심인 유가사상을 도입하고 있었던 점 등. 기존의 통설. 

그러나 청조에서는 다른 특징을 찾아볼 수 있다. 만주족의 전통적인 두발형을 강제한 치발형, 지배 구조의 중요한 버팀목의 하나였던 팔기제에서 볼 수 있는 군사적인 면에서의 만, 몽, 한 병용책, 중앙 요직의 임용에서 볼 수 있는 행정적인 명에서의 만(=기인), 한 병용책, 황태자제를 대신한 저위밀건법, 한, 황제권 확립을 목적으로 하는 팔기제의 정비 등 명조의 계승자로서 중국화를 지향했다는 것만으로는 설명되지 않는 사례를 확인할 수 있다. 만주족 왕조로서의 청조론. 

양면적인 요소야말로 청조의 장기간에 걸친 통일과 영역 확대를 가능하게 만든 하나의 요인이 아닐까라고 생각할 수 있다. 

p.184-200  

옹정제-절대군주권의 확립 

내치의 황제 

청조 제5대 황제인 옹정제는 강희제의 넷째 아들로, 이름은 윤진胤縝이다...그는 아버지인 강희제와 아들인 건륭제가 대회정책을 주요 업적으로 내세우는 것과는 대조적으로, 특히 내정에 힘을 쏟아 청조의 황제 지배 체제를 확립한 황제였다. 승덕의 피서산장으로도 발길을 옮기지 않았다고 사서는 전하고 있다. 

'저위밀건'제도는...후계자의 이름을 적어서 밀봉한 후 자금성 내정의 정전인 건청궁의 보좌 뒷면 상부에 걸려 있는 '正大光明' 편액 뒤에 두었다가, 사휘에 비로소 개봉하여 공표하는 밀건(후계자를 비밀리에 책립)제에 따른 제위 계승법. 

강희제 시대에 발생했던 후계권 다툼처럼 자신이 속한 기의 왕을 제위 계승자로 옹립하기 위해 황태자 살해를 기도하는 등 암약 행위를 방지. 또한 미리 공표하지 않기 때문에 이미 기록된 이름은 언제라도 자유롭게 변경할 있었다. 제위 계승의 가능성을 가진 사람은 항상 절차탁마하지 않으면 언제라도 탈랄할 수 있었다. 그것은 신하인 기인도 마찬가지... 생전에 미리 후계자를 결정하지 않는 만주족 전통의 부족제 방식에, 생전에 황제의 의사로 자신의 후계자를 결정하는 중국식 황태자제 방식을 결합햇다는 점에서 '화이일가' 다민족국가로서의 청조를 상징하는 독특하고 효과적인 제위 계승법.  

옹정제는 독재권력을 강화하기 위해서 신하가 당파를 만드는 것을 금지했으며, 엄한 숙청을 감행하기도 했다. 지방관이 중간의 관료기구를 거치지 않고 황제에게 바로 제출하는 주첩에 주필로 의견을 적어 그 지방관에게 반송함으로써 황제가 나라의 구석구석까지 장악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했다. 황제가 자필로 쓴 부분은 주접의 원문과 함께 내용을 정리하여 <옹정주비유지>라는 제목으로 집록되어 전해지고 있다. 

 <옹정주비유지> 

주접은 강희제 시대에 도입한 황제가 지방 관료에게 의무적으로 제출하게 한 사적인 상주문. 일반적인 상주문과는 달리 지방관과 황제 사이에 있는 어떠한 관료기구도 거치지 않고 밀봉한 채 황제에게 바로 전해졌고, 또한 자신의 생각대로 의견을 서술할 수 있게 허락. 주접이라는 호칭은 종이를 접어 봉투에 넣어서 보내는 모양을 표현한 것. 제출된 하나하나의 주접에 대해서 황제는 주필로 정정하기도 하고, 批(자신의 의견)를 써서 상주한 본인에게 반송.  

날씨와 재정, 작황, 쌀값에서부터 지방 관료의 인물 평판에 이르기까지 지방정치에 대한 모든 내용을 포함. 

만주문에는 만주문, 한문에는 한문, 몽골문에는 몽골문, 만한합벽문에는 대부분의 경우 만주문으로 비를 썼다. 게다가 옹정제는 원래의 주접을 다시 황제에게 돌려보내도록 하여 보존하고, 그 중에서도 중요하다고 판단한 주접과 그것에 대한 비를 집록해서 편찬했다.  

비를 통해서 우리는 옹정제의 생생한 육성을 들을 수 있다. 주접을 보낸 지방관료 본인에 대한 평가 부분. 

"無知(어리석은 놈)" "無識小人(어리석은 놈)" "覽, 笑之(살펴보았다, 우습다)" "覽奏, 深爲嘉悅(주문을 읽어보았다. 매우 기쁘고 즐겁다)" "嘉悅覽之(기쁘고 즐겁게 읽었다)" "好, 勉力(좋다, 열심히 하라)" "勉之(열심히 하라)" "朕懷(그립다)" "深慰, 朕念(수고 많았다)"  

<어제붕당론> 

옹정제 자신이 1742년(옹정 2)에 지은 것. 만주문으로 작성한 다음 한문으로 번역. 

짐이 생각하기에, 하늘을 귀하고 땅은 천하듯이 군주와 신하의 구분은 정해져 있다. 신하 된 자의 義로서는 단지 군주가 존재한다는 것만을 인식해야 한다. 단지 군주가 존재한다는 것만을 인식한다면 가치판단을 군주와 한가지로 할 수 있다. 이것은 一德一心이고, 위와 아래가 합치하는 것이다. 반대로 二心三意의 마음을 품고 가치판단을 군주와 한가지로 하지 않으면, 위와 아래의 뜻은 어그러지고 귀천의 구분까지 역전시켜버린다. 이것은 모두 붕당의 관습이 근심이 되어 생겨난 것이다. 

군주 된 자가 사람을 평가할 때에는 단지 지극히 공평하게 함을 구할 뿐이다. 대개 사람의 用捨진퇴의 이유에는 아무개는 현능하기 때문에 등용했다, 아무개는 不善하기 때문에 물리쳤다는 것만 있는 것은 아니다. 만에 하나라도 잘못 본 것이 없을까 하는걱정에서 마음을 비우고 뭇사람의 여론을 모두 상세하게 조사하고 나서야 비로소 이러한 결정을 내리는 것이다. 만약 뭇사람의 여론이 모두 반드시 공정하다면, 군주가 이것에 따름으로써 틀림없이 크게 공평한 상황이 될 것이다. 그러나 만약 붕당의 무리가 사심에 따라서 군주의 귀를 미혹시키고 이 때문에 군주 된 자가 잘못 등용하게 되면, 지극히 공평한 마음으로 행하고 있는 것이 역으로 지극히 제멋대로인 결과를 낳게 된다. 

그런데 신하 된 자의 쪽에서는 다투어 사사로운 뜻을 쫓아 붕당을 만들고, 각자 제멋대로의 가치판단으로 옳고 그름을 결정하기 때문에 군주 쪽에서는 이러한 상태를 두려워한 나머지, '치우쳐 들으면 간계에 속게 된다. 그래도 독단하는 편이 누가 뭐래도 공평하다'는 생각을 하기에 이르게 된다. 여기에서 붕당의 죄는 극에 달하는데, 그 붕당의 죄는 당사자를 죽이는 것만으로 끝나는가? 끝나지 않는다. 

성조인황제(강희제)께서 옥자에 앉으신 60년간, 인재 등용과 정치 시책은 천고의 제왕보다도 발군이셨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소 관료들은 완전하게 公忠을 다하지 않았고 항상 붕우끼리 당을 만드는 상황이었다. 성조께서는 두 번 세 번에 걸쳐서 훈계하셨지만 완전히 고칠 수가 없었다. 짐도 즉위 이래 반복해서 훈계했지만 이 풍습은 그래로이다. 이러한 무리는 공평하게 사람을 평가하려고 하지는 않고, 사적으로 친교를 맺고 자만을 일방적으로 편들 뿐이다. 

군주가 어떤 인물을 등용하면 곧바로 '이놈은 저놈이 뒤를 봐준 것"이라고 서로 수군거린다. 그러고는 마치 그 당사자를 통해서 악습에 물들까 꺼리는 것처럼 멀리 거리를 두고는 "나는 의혹에서 몸을 멀리한다. 위광에 편승하거나 하지 않는다"고 스스로를 변호한다. 그러면서도 서로 질투하는 마음은 남보다 갑절로 품고 있고, 온갖 수단을 동원하여 백방으로 비방하고, 본인이 없는 데서 험담하여 함정에 빠뜨려서 사임하도록 몰아세우고 나서야 비로소 기뻐한다. 

군주가 어떤 인물을 파직하면 곧바로 "이놈은 저놈이 모함한 것"이라고 서로 수군거린다. 친밀하게 교제하고 있던 사람이라면 그 당사자를 위해서 유감스러운 일이라고 탄식한다. 소원했던 사람이라도 또한 억울하게 죄를 뒤집어썼따고 위로한다. 본래 불화가 있던 사람에게도 이러한 처지에 놓이면 거꾸로 가까워지려고 "이를 계기로 한을 풀고 좋은 관계로 친하게 지내고 싶다"고 말한다. "잘못을 바로잡고 몸을 새롭게 하라"고 나무라는 사람은 한 사람도 없다. 이 때문에 그 당사자 또한 자신이 범한 악행을 분명하게 알지 못하고 군주를 원망하는 마음만 더해간다. 

이 때문에 국가가 정한 賞賜, 처벌, 승진, 강등의 기준은 무시되고, 반대로 당의 가치 기준이 통용되고 있다. 군주가 가진 용사진퇴의 권력을 숨어서 몰래 방해하고 있다는 점에서 붕당의 근심은 그 지극함에 이르렀다. 만약 군주가 용사진퇴한 인물에게 문제가 있다면, 왜 군주의 면전에서 반대하거나 관청에서 간언하지 않는가? 겉으로는 신봉하는 태도를 취하면서 속으로는 거스르고, 이처럼 자신이 속한 붕당을 위해서 뛰어다니며 책략을 꾸미는가? 

짐은 매일 뭇 신하를 불러들여 가까이 나와서 의견을 상주하게 하고 있다. 이런 기회를 잘 활용하면 도대체 어떠한 일인들 분명하게 할 수 없겠는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도리어 침묵한 채 옳고 그름에 대해서는 전혀 말하지 않고, 교활함을 조금도 밖으로 드러내지 않으며, 자신의 견해는 가슴 깊숙이 담아두고서는 뒤에서 멋대로 이러니저러니 중얼거린다. 군주를 섬기는 절의가 이래서야 되겠는가? 

신하 된 자는 도리에 따라서 公을 위해서 私를 버려야만 한다. 아무리 조그마한 것이라도 사정에 얽매여 공의를 저버리는 행위를 용서받을 수 있겠는가? 더구나 군주와 어버이는 한가지로 중하지만 일신을 던져서 군주를 섬겼다면, 즉 몸은 군주에게 맡긴 것이므로 부모조차도 마음대로 할 수 없는 것인데, 하물며 붕우가 어찌 우선할 수 있겠는가? 

 짐은 이 4, 5년간 모든 허와 실을 달관하여 모르는 것이 없었다. 옥좌에 앉으면서부터 짐은 나쁜 관습을 고쳐 지금의 세상을 태평성대의 최고 위치에 올려놓고자 생각해왔다. 그 때문에 "모든 것에 귀를 기울이고, 크게 눈을 열고, 마음을 다하여 살피고, 두루 따져 물어 세상의 일을 조사하여 분명하게 알아 정통하고 싶다. 나쁜 관습이나 풍속이 고쳐졌는지 아닌지를 꼼꼼이 확인하고 싶다"고 말하면, 무지한 소인의 무리들은 이에 대해서 곧 짐이 사람의 결점을 들추어내고 소심하게 행동한다고 생각하고는 이러쿵저러쿵 수군거린다. 혹은 "군주 된 자는 庶務에 스스로 관계새서는 안 된다"고 말하는 자도 있다.  

이것은 모두 붕당의 악습이 완전히 제거되지 못했기 때문에 군주의 예리하고 훌륭한 명덕을 두려워하여 군주의 군과 귀를 가리고 덮어 붕당의 사사로운 마음에 합치되게 하고자 하는 것이다. 짐이 즉위하기 이전, 아직 일개 왕의 몸이었던 시절에는 마음을 넓고 평온하게 갖고 맑고 깨끗하게 하여 사적인 온정이나 은혜와 관계가 없었다. 만한의 대신이나 관리들을 누구 한 사람 측근으로 가까이 불러들인 적이 없었다. 문하에 들어오고 싶다고 하는 무리가 있어도 엄하게 거절했다. 성조께서는 짐이 사고방식이나 행동에 공정하고 사심이 없는 것을 분명히 알아보셨기 때문에 천자의 지위를 계승하게 하셨다. 오늘날 붕당을 좋아하는 무리는 단지 서로 뒤를 봐주거나 원조해주는 것만을 기대하여 만일의 위급한 때 의지할 수 있다고 말하지만 그것이 전혀 무익하다는 것을 알지 못한다. 헛되이 하늘에 반역하고 의를 저버려 죽임을 당하고 일족이 단절하당하는 죄에 빠지게 되니 이 또한 심히 가련하다. 

짐이 원하는 것은 만한, 문무, 대소 관리들이 모두 한마음이 되고 하나가 되어 충성을 다하고, 군주와 똑같은 공평함으로 사람을 칭찬하거나 비난하고, <역경>과 <논어>에서 말하는 명덕으로 가득 찬 교훈을 삼가 배워서, 朋으로 무리를 만들고 당으로 모여서 의논하는 교활한 관습을 완전히 제거하고 싶은 것이다. 그렇게 되면 엄숙하게 존비의 구분을 경외하고, 즐거이 상하의 정의를 화합할 수 있다. 또한 <서경>에서 "우 나라 순 임금과 신하가 하나가 되었다"고 한 예와 같이, 현량한 신하가 군주를 잘 섬김으로써 군주의 훌륭한 정치가 일어난다고 하는 숭고한 政道가 어찌 오늘날에 다시 나타나지 못한다고 하겠는가? 

-------------------------------------------------------------------------------------- 

관료에 대한 교화의 일환으로 만든 것이 <어제붕당론>이고, 민중 위에 있으면서 큰 영향력을 행사하는 독서인이나 문관에 대한 교화의 일환으로 만든 것이 <대의각미론>. 

옹정제가 펼친 시책에 의해서 중국 전통의 집권적 관료국가로서의 지배구조는 청조 안으로 편입하게 되었다. 동시에 이것은 옹정제에 의해 중국 전통의 관료제기구가 정비, 완성되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기도 했다. 극단적으로 말하면 만주족에 의해 만들어진 다민족국가로서의 청조가 관료제기구라고 하는 특성을 가진 중국 전통의 황제제도를 완성한 것이다.   

p.222 

신강 정복은 몽골의 '변환'을 제거하기 위한 것이었다. 건륭제가 (카자흐스탄) 발하시 호 서쪽의 중앙아시아(서투르키스탄)까지 진군하지 않은 것은 어디까지나 그 궁극적인 목적이 몽골족 복속에 있었기 때문이다.  

청조는 중국 내지의 18성을 북쭉에서 서쪽으로 초승달 모양으로 포위하는 듯한 모양으로 존재하는 '이'의 세계, 즉 내외몽골, 청해, 티베트, 그리고 신강을 통치하기 위해 '번부'라는 개념을 도입하고, 직접 통치하에 있는 '화'의 세계와는 달리 이 지역은 간접적인 지배를 했던 것이다. 

*가타오카 가쓰타다片岡一忠 <청조신강통치연구> 

p.244-247

<대의각미록> 

옹정제가 역사상 최초로 이적의 입장에서 중화가 주창하는 화이사상에 대해 반론하고, 정치사상을 통해서 청조의 정통성(황제로서의 정당성)을 주장하고자 한 것. 

이론에 탁월한 유례가 드문 황제가 주관한 어전 재판 기록. 주자학의 계통을 이어받아 강한 반청사상을 주창하다가 죽은 呂留良의 사상에 영향을 받아 반청운동을 전개한 曾靜 등이 피고이고, 변호사는 없으며 검사와 재판관이 황제 자신이다.  

옹정제는 자신의 생각을 상유의 형태로 내리지 않은 것일까? 왜 이러한 번거로운 수순을 밟은 것일까? 대답은 어렵지 않다. 자신이 옳다는 사실을 본인의 입으로 아무리 힘써 말해도 듣는 쪽은귀 기울이지 않을 것이다. 설사 진실에 가깝다고 해도 그 말을 그대로 받아들일 것이라고는 도저히 기대할 수 없다. 세상의 현실이란 그런 것이다. 그것보다는 반청운동을 계속하는 당사자에게 자기비판을 하게 하는 편이 영향력이 훨씬 크다. 옹정제으 의도는 거기에 있었다. 황제와 증정이 문답을 반복하여, 그 결과 증정이 자기자신을 비판함으로써 청조의 정통성을 인정하게 된 재판기록, 그것이 <대의각미록>이다.  

모두 4권으로 이루어진 <대의각미록>에는 上諭 10편, 옹정제의 심문에 대한 증정의 공술 47조, 이외에 마음을 바꾼 증정이 자기비판을 한 반성문이라고도 할 수 있는 <歸仁說> 등이 수록. 

"역적 여유량 등은 이적을 금수와 같이 보고 있다. 그들은 아직도 알고자 하지 않는다. 상천은 중국 내지에 유더한 자가 없어졌기 때문에 이것이 싫어서 방기한 것이다. 그 때문에 우리 외이를 중국 내지의 군주로 삼은 것이다. 역적 여유량의 논리에 따르면 이는 중국을 모두 금수로 보는 것과 같지 않은가? 어찌하여 안을 중국이라 하고, 밖을 이적이라고 하는 것인가? 자신을 욕하는가, 남을 욕하는가의 차이에 불과하다. 

게다가 예로부터 단절됨 없이 계승되어온 중국 일통의 영역은 본래 지금과 같이 멀리까지 넓었던 것은 아니다. 단지, 그 영역 안에 있는 사람 중에서 化에 향하고자(중국화하고자) 하지 않았던 자를 이적이라고 하여 배척해온 것이다. 예를 들어 삼대 이상에 걸쳐서 중국 내지에 있었던 묘족은 어떠한가? 또 형초, 함윤 등 그들이 살던 곳은 현재의 호남성, 호북성, 산서성 지역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현재에 이르러서 이들을 여전히 이적이라고 말할 수 있는가? 그렇지 않을 것이다. 

한당송의 전성시대에 북적이나 서융이 대대로 변경의 근심이 된 적이 있었다. 이것은 그들이 아직 이들의 왕조에 신하로서 복종하지 않고 그쪽 영역이다, 이쪽 영역이다 하는 구분이 존재했기 때문이다. 우리 청조가 군주가 되어서 중국 내지에 들어와 천하에 군림한 이래, 몽골을 병합함으로써 변경에 살던 여러 부족이 모두 판도 안으로 귀복했다. 이것은 중국의 영토가 개척되어 멀리까지 넓어진 것과 다름없다. 이것은 곧 중국의 신민에게는 위대한 행운일 뿐 그 무엇도 아니다. 어찌하여 아직도 화이, 중외의 구분이 있다고 논할 의미가 있는 것인가? 

예로부터 군주 된 자가 취해야 할 도는 바로 백성을 赤子와 같이 사랑하는 것이다. 신하 된 자가 취해야 할 도는 바로 군주를 부모와 같이 섬기는 것이다. 만약 아이가 부모에게 학대를 당하면 당연히 원망하고 거역할 것이다. 그런데 우리 청조에서 볼 수 잇는 군주의 모습은 부모가 마음으로 적자를 사랑하듯이 백성과 접하는 도에 철저히 일관해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역적들은 아직도 은밀히 끝없는 중상 비방을 퍼뜨리고, 끊임없이 군주가 그 도를 알지 못한다고 떠들며 이유 없는 반항을 계속하고 있다. 

------------------------------------------------------------------------------------- 

p.247 

옹정제가 주장하는 것은, 즉 중국은 고래로부터 계속해서 영역을 확대하고 있으며, 영토를 확대할 때마다 그 이전의 이적을 병합하여 새로운 중화로 성장해온 존재이기 때문에 중국은 고래로부터 중화와 이적으로 이루어진 다민족국가였다는 것. '중국은 다민족국가이다'라는 개념 규정이 가능하다면, 청조야말로 그 이상적인 구현자이며, 이적이라는 이유로 정통성을 상실하는 일은 피할 수 있게 된다. 그들에게 요구되는 것은 오직 천명에 부합하는 덕의 유무일 뿐이다. 한마디로 말하면, '화이가 일가라면, 제위는 천명에 따를 뿐'이라는 것. 

p.252 

건륭제의 두려움 

<대의각미록>의 무엇이 건륭제를 두렵게 만들었을까? 이유는 분명하지 않다. 그러나 주된 이유를 "화로 향하고자 하지 않는 자를 이적으로 배착한 것이다"라고 한 것 등에서 찾을 수 있다. 치발령을 강행하여 순역을 식별하게 한 사건의 정치적인 경위를 더듬어보면, 그 근저에는 결코 중국화를 쉽게 받아들이지 않고 만주족 전통으로 배양된 민족의 독자성을 지키고자 했던 청조의 자세가 있다. 시각에 따라서는 청조 자체가 중국화하고자 하지 않았기 때문에 이적으로 배척된 자와 같은 위치에 놓일 수도 있는 것이다. 이렇게 되면 청조의 정통성을 증명할 수 없다.   

아버지인 옹정제가 배포한 서적을 친아들인 건륭제가 금서로 만든 것에는 청조에게 적절하지 못한 점이 있는 것임이 틀림없다...얄궂게도 이 일로 인해 <대의각미록>은 일거에 주목을 받게 되었다... 그건 그렇고 옹정제가 주장했던 화이로 이루어진 다민족국가로서의 중국은 손문이 청조를 타도할 무렵에 주창했던 오족으로 이루어진 다민족 중국론과 어딘가 아주 흡사해 보인다. 이러한 유사함이 흥미를 끈다. 

p.255 

'화이일가'-대청제국의 세계관 

청조는 확실히 '화이일가'로서의 복합 다민족국가를 이룩했다. 그러나 중화에 아첨하는 '화이일가'는 아니다. 그러기에는 이적에 포섭되는 부분이 너무 많고 넓었다. 여기에서 말하는 이적은 구체적인 영토적 지배관계는 없다 해도 예수회 선교사를 매개로 한 유럽 문화까지를 포함하고 있다. 영토상의 대청국 세계는 만주족 세계에서 중화세계, 북아시아 세계, 티베트 세계, 중앙아시아 동투르키스탄의 이슬람 세계를 포함한다. 문화적으로는 유럽 세계까지도 포괄한다. 여기에서 확인할 수 있는 세계관에는 북아시아 세계도 뛰어넘는 대han으로서의 의식이 있었던 것은 아닐까? 중화 세계도 단지 그 안에 포함하고 있는 하나의 세계에 불과하다고 할 만큼 확대된 '화이일가'의 세계가 출현했다... 정확하게는 '이화일가'의 세계 제국이라고 칭해야 할 것이다. 청조 안에서 이적은 중화를 초월하고 있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