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정희, <지금 장미를 따라>, 뿔 2009
<이별 이후>
너 떠나간 지 / 세상의 달력으론 열흘 되었고 / 내 피의 달력으론 십 년 되었다
나 슬픈 것은 / 네가 없는데도 / 밤 오면 잘들어야 하고 / 끼니 오면 / 입 안 가득 밥을 떠 넣는 일이다
옛날옛날적 / 그 사람 되어가며 / 그냥 그렇게 너를 잊는 일이다
이 아픔 그대로 있으면 / 그래서 숨 막혀 나 죽으면 / 원도 없으리라
그러나 / 나 진실로 슬픈 것은
엔젠가 너와 내가 / 이 뜨거움 까맣게 / 잊는다는 일이다
<할머니와 어머니_나의 보수주의>
공항을 떠날 때 등 뒤에다
나는 모든 것을 두고 떠나왔다
남편의 사진은 옷장 속에 깊이 숨겨 두었고
이제는 바다처럼 넓어져서
바람 소리 들려오는 넉넉한 나이도
기꺼이 주민등록증 속에 끼워두고 왔다
그래서 큰 가방을 들었지만
날듯이 가벼웠다
내가 가진 거라곤 출렁이는 자유
소금처럼 짭짤한 외로움
이거면 시인의 식사로는 풍족하다
사랑하는 데는 안성맞춤이다
그런데 웬일일까
십수 년 전에 벌써 죽은 줄로만 알았던
우리 할머니와 어머니가
감쪽같이 나를 따라와
가슴 깊이 자리 잡고 앉아
사사건건 모든 일에 간섭하고 있다
두 눈 동그랗게 뜨고
조심조심 길 조심 짐승 좃미
끝도 없이 성가시게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