르 클레지오, <침묵>, 세계사 1990

p.42-43

내가 죽게 될 때, 호흡과 함께 나를 지탱하고 있던 이성이 내게서 물러가버리게 될 때, 모든 것이 차이 없이 동등해지는 거대한 하루를 내 사라진 정신이 돌려놓게 될 때 내가 다시 조그마해지고 내 육신이 이 세상에서 차지하고 있었던 자리와 혼동될 때, 해묵은 모순들과 의혹과 리듬은 환영처럼 저절로 사라져버릴 것이다. 내가 살아보지조차 못할 그 마법의 시간은 올 것이다. 그것은 한갓 지나감이 아닐 것이다. 그것은 하나의 변모도 배반도 아닐 것이다. 높이 올린 가벼운 돛과 같이, 변하지 않는 돌의 표면에서 마르는 물방울 같이 어둠을 어둠답게 하던 빛의 물살이 정지되면 투사된 그림자가 사라지듯이, 그것은 마찰 없이, 세상의 그 무엇 하나 무너지거나 손상됨 없이 간단히 이루어질 것이다. 나와 세계 사이에 존재하는 근원적인 차이라고 믿었던 것, 나의 드라마였던 그 헤어짐. 이런 모든 것이 아무런 흔적도 남기지 않고 쉽사리 녹아버리고 해체될 것이다. 아무런 고통도 남기지 않고. 물질적 공간은 마치 그렇지 않은 적이 한 번도 없었다는 듯이 표현가능의 세계 밖으로 되돌아갈 것이다. 평평하고 선명하고 무한정으로 제공된 그리고 소외시킬 수 없는 공간으로. 혼란된 분위기, 시각적인 유희, 파동, 주기, 법칙은 여전히 통용되겠지만 그것들이 인식을, 나의 인식을 열어주지는 않게 될 것이다. 그러나 나 이전의 수천 만 년, 수세기, 수만 날 동안 두고 계속될 것이다. 내가 알고 느끼고 사랑하고 결정하였던 모든 것, 내 스스로 그것의 주인이라고 다소나마 여겼던 모든 것은, 내가 존재하지 않게 되어도 여전히 남아 있을 것이다. 나의 왕국은 나의 통치기간보다 더 오래 지속될 것이며 나의 학문은 나의 지식보다도 더 심원할 것이다. 그러니 나는 아무것도 소유해 보지 못한 채 떠나게 되리라. 앙갚음으로 그 무엇을 훔쳐가지도 지니고 가지도 못한 채 나는 나의 허무 속으로 떠나게 되리라. 나의 죽움은 나를 헐벗은 모습으로 남겨놓을 것이며 나는 누더기 하나도 건질 수 없게 되리라. 빈손으로 왔듯이 빈손으로 돌아가리라. 내 생의 상처는 나 스스로의 상처에 지나지 않았을 것이며 고통과 비명과 행복은 나의 재산이 아니라 내가 살아 있는 동안 이 세계에 주지 않으면 안 되었던 것이었으리라.

p.51

죽음이 인생의 완성, 인생에 형태와 가치를 부여하는 것, 인생의 고리쇠를 맞물리게 잠그는 것이듯이 침묵은 언어와 의식의 지고한 결말이다. 우리가 말하고 쓰는 모든 것, 우리가 아는 모든 것은 바로 그것을 위한, 진정한 <침묵>을 위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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