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연수, <꾿빠이 이상>, 문학동네 2001

p.137
사람의 운명이란 구슬치기 게임과 같다고 이상은 말하고 싶었던 것일까? 그 운명의 구슬치기는 얼마나 가혹한 게임인가? 한 번의 구슬이 튀어나갔다. 이상이 죽고 난 뒤, 권순옥은 정인택을 따라 북으로 가고 변동림은 김환기를 따라 뉴욕으로 갔다. 또 한 번의 구슬이 튀어나갔다. 1953년 정인택이 병으로 죽으면서 권순옥을 부탁해 가족은 서울에 남겨둔 채 단신월북한 박태원은 그다지 내키지 않았지만, 권순옥과 재혼했다. 변동림은 필명을 향안으로 바꾸고 김환기의 성을 따 김향안이라 했다. 1970년대 말, 숙청됐다가 다시 복권된 박태원이 전신불수에 실명한 눈으로 <갑오농민전쟁>을 구술할 때, 권순옥은 옆에서 박태원이 부르는 단어 하나하나를 받아 적었다. 김환기가 뉴욕에서 어렵사리 그림에만 몰두할 때, 생계와 대외생활을 도맡아 한 사람이 김향안이었다. 김향안이 아니었더라면 김환기의 작품세계는 불가능했을 것이다. <갑오농민전쟁> 마지막 권을 펴낼 때, 박태원이 지은이 난에 아내 권순옥의 이름도 함께 넣자고 주장해 받아들여졌다. 이는 자신이 죽고 난 뒤에도 권순옥이 작가 대우를 받으며 말년을 편안하게 보낼 수 있게 하기 위한 배려였다. 1930년대 같은 하늘 아래에서 같은 사람을 사랑했던 두 여인이 운명의 구슬이 투겨질 때마다 전혀 다른 삶을 향해 달려갔다. 이런 운명을 두고 가혹하다 하지 않으면 무엇이 더 가혹하랴!

p.140
일본 시인 기타하라 하쿠슈이 시 <세월은 가네>가 혀끝에 맴돌았다.

세월은 가네
빨간 증기선의 뱃머리 지나가듯
곡물 창고 위에 저녁놀 달아오르고 검은 고양이 귀울림 소리 어여삐 들리듯
세월은 가네
어드덧
부드러운 그늘 드리우며 지나가네
세월은 가네
빨간 증기선의 뱃머리 지나가듯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