햄릿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3
윌리엄 세익스피어 지음, 최종철 옮김 / 민음사 / 1998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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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명한 작품이지만 천천히 읽어 본 적이 없는 작품이다. 햄릿의 인물형이 전혀 공감이 가지 않았기 때문에 왠지 미뤄두게 되었달까. 고뇌하는 햄릿의 이미지와 그의 사랑 때문에 광기에 자살을 감행한 오필리아의 이야기는 내게 그다지 땡기는(?) 줄거리는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러다가 햄릿을 한번 읽어볼까 생각했던 게 대학때 강의를 듣다가 러시아에서는 초등학생들도 햄릿을 즐긴다는 소리를 듣고 나서 였다. 물론 그렇게 생각하고도 당장 읽어보지는 못했지만.

 

햄릿은 아버지의 죽음에 이미 의심을 품고 있었다. 왕비는 그런 아들에게 어째서 죽음을 의문스러워하느냐고 묻는다. 유령이 나타나 아버지의 죽음이 독살에 의한 것이라고 말해주기 전까지 햄릿은 의심은 하고 있었지만, 또 어머니가 그토록 사랑하던 아버지를 배신하고 금세 새 남편을(그것도 왕의 동생을) 맞이한 것 때문에 슬퍼하고는 있었지만 그러한 내색을 겉으로 드러내지 않는다. 이대로라면 그는 자신의 운명을, 아버지와 어머니의 운명을 그냥 받아들였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유령이 나타나 그의 평온을 유지하려는 노력을 여지없이 무너뜨려 버린다. 유령은 비명횡사한 왕의 이야기를 들려준다. 그가 얼마나 처참하게 죽었는지를. 그리고 그렇게 죽었기 때문에 죽음 이후에도 여전히 고난을 당하고 있음을. 아버지를 사랑했다면 복수하라. 그것이 유령의 명령이었다.

 

복수는 생각보다 더디게 이뤄졌다. 그리고 실은 햄릿의 광기가 과연 복수에 어떤 역할을 하는 것이었는지도 모르겠다. 햄릿의 광기는 그의 의도를 감추는 데에만 유용했을 뿐이다. 그리고 그렇게 감춰왔던 의도는 애꿎은 폴로니어스만을 죽인 채 영국행 배에 햄릿을 태워버리는 효과만 가져왔다. 영국행 배에서 햄릿은 그간의 모습과 달느 결단력을 보이고 돌아와서 사랑했던 여인 오필리아가 죽었음을 확인한다. 복수의 대상만을 제외한 채 다른 생명들을 이미 넷이나 죽게 한(폴로니어스와 오필리아, 영국행 배에서 그가 조작한 편지를 전해서 죽었을 로젠크란츠와 길든스턴까지 포함하여) 햄릿은 레어티즈에게 그 모든 것은 광기에서 비롯되었으며 자신도 그의 피해자라고 말한다. 이 말은 어떻게 보면 햄릿의 괴로운 심정을 대변하는 말인지도 모른다. 그는 사실을 알고 미치지 않을수도 없었고 완전히 미쳐버릴수도 없었다. 결국 그의 이 있음과 없음의 고뇌는 네명의 생명에 더해 그 자신의 생명과 레어티즈, 왕비와 왕의 생명까지 빼앗아 간 후 멈추게 된다. 유령의 출현이 가져온 비극이라고 해야할까. 형을 죽인 동생이 가져온 비극이라고 해야할까.

 

햄릿의 망설임이라고 표현하기는 했지만 그가 망설인 것 같은 느낌은 들지 않았다. 그의 지위와 그가 복수하려는 대상의 지위가 그를 망설이게 했을 것이고, 또 일의 중요함을 따져 보면 그가 충분히 다양한 방법으로 사실 확인을 할 필요가 있었을 것이다. 그리고 그의 여인 오필리아에 대해서는 쉽게 포기할 수 없었겠지만 포기하지 않을 수도 없었을 것이다. 그의 아버지 폴로니어스는 클로디어스의 충실한 부하였으니. 이 전 가족의 죽음은 모난 놈 옆에 있다 정맞는다 정도로 표현되어야 할까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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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운몽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72
김만중 지음, 송성욱 옮김 / 민음사 / 2003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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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어와 시문이 많아 읽기 힘든 책이다. 서양의 고전보다 우리의 고전이 더 어렵다는 것은 사실 좀 부끄러운 일이기는 하다. 그러나 반면에 서양의 고전에서는 이해할 수 없었던 문화의 차이가 우리의 고전에서는 없다는 점이 또 장점이라고 할 수 있겠다.

 

구운몽은 성진의 꿈이야기이다. 그는 불교에 귀의한 몸으로써 육관대사의 제자로 성실한 삶을 살다 어느 날 세속에 대한 욕망을 품게 된다. 불가에서 금하는 세가지. 술과, 여인과, 입신양명에 대한 포부를 생각해 보는 것이다. 육관대사는 이를 빌미로 성진을 염라대왕에게 보내버린다. 그리고 성진은 양소유라는 인물로 다시 태어나게 된다. 성진은 육관대사에게 자신이 그런 마음을 품은 것은 사실이나 이를 곧 뉘우쳤다고 항변해본다. 하지만 육관대사는 전혀 동요하지 않는다. 그토록 아끼던 제자를 한순간에 내치다니. 왠지 심하다는 생각도 들지만 그가 사람의 마음 너머를 볼 수 있는 인물이라는 점에서 성진의 마음 속의 동요가 단순한 것이 아님을 알아보았다고 생각해 볼 수도 있겠다.

 

양소유가 된 성진은 자신의 마음속에 품었던 모든 것을 실현할 수 있게 된다. 처음에는 성진으로서의 자신을 자각하기도 하였으나, 점차 과거의 일은 잊고 양소유의 삶에 충실하게 된다. 양소유의 삶은 성진이 웠했던 그것. 술과, 여자와, 입신양명이 모두 이뤄지는 삶이었다. 성진의 환생이며, 아버지가 신선이라는 출생의 특이점을 제외하고는 양소유가 자신의 입신양명을 위해 노력한 흔적은 없다. 여인들은 그를 만나기만 하면 그가 대단히 성공할 인물이라는 것을 알아보고 그와 함께 하고자 하거나, 혹은 자신과 친한 여인들과 함께 하기 위해 그를 함께 섬기고자 한다. 이들과의 운우지정은 당시의 유교적 관념을 뛰어넘는다. 처를 들이기 전에 첩을 들이거나 (춘향전같은 판소리계에서는 오히려 이가 좋지 않다고 꺼려했건만..ㅡㅡ; ) 여인의 얼굴을 보기 위해 노력을 기울이거나 여인과 함께 있기 위해 과거를 미루거나 하는등 양소유의 모습에는 입신양명에 대한 욕구보다 더 큰 여인에 대한 욕구가 더 커 보이는 점이 많다.

 

이렇게 자신이 이루고자 했었던 모든 일을 이루고 난 성진은 양소유의 삶이 부질없는 것임을 깨닫는다. 본래 자신이 추구했던 것이 참이고, 양소유의 삶은 자신이 추구하던 것보다 화려해 보였지만 결국 허무한 것이었다. 삶의 끝이 허무하다는 것은 모든 것을 이룬 양소유에게 뿐 아니라 깨달음을 얻은 후의 성진에게도 마찬가지가 아닐까 생각해보지만, 그 또한 이루어보지 않고서는 알 수 없는 것인지도 모른다.

 

 이런 생각이 든다. 이루어보지 않고서야 허무한 것을 알 수가 없지 않느냐고. 꿈이기는 했지만 모든 것을 이뤄볼 수 있었던 성진이 깨달음을 얻은 것은 모든 것을 이룬 다음이기 때문에 가능한 것은 아니겠느냐고. 육관대사가 성진을 꿈꾸게 한 것도 어쩌면 그런 이유가 아니었겠느냐고. 그렇다면 우리들. 이루려고 애쓰는 사람들에게 단지 허무하다는 결론을 말하기보다는 최선을 다해 이루어본 후에 삶을 돌아보는 여유도 가져보아야 할 것이라는 충고가 더 어울리지 않겠느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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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셀라스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126
새뮤얼 존슨 지음, 이인규 옮김 / 민음사 / 2005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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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비시니아의 왕자 라셀라스는 왕국의 법도대로 행복의 골짜기에서 아무것도 부러워할 것 없이 모든 것이 충족된 상태로 살아가고 있다. 왕국의 네번째 왕자로서 그는 왕권의 차례가 자기에게 올 때까지 그곳에서 지내게 되어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이 충족된 상태'는 그를 우울함으로 몰고간다. 아무것도 추구할 것이 없고, 그렇기 때문에 그는 점점 더 삶의 가치를 느낄 수 없게 되어가고 있었다. 하루는 너무 길었고, 할 일은 없었다. 왕자는 이 골짜기를 벗어나는 자유를 꿈꾸기 시작했다.

 

그러다가 만난 현자가 바로 시인 이믈락이었다. 그는 그에게서 세상의 이야기를 들었고, 그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세상에 대한 동경은 점점 더 커져만 갔다. 더욱 왕자를 부추겼던 것은 이믈락의 솔직한 발언이었다. 그는 이 골짜기의 어느 누구도 이곳에 들어온 그 날을 후회하지 않는 사람이 없다고 말했다. 세상을 겪은 사람이지만 그곳이 아무리 위험한 곳이라고 하더라도 이 골짜기보다는 낫다는 말이 아닐까 하고 라셀라스는 생각하게 되었다. 하늘을 날아서 골짜기를 벗어날 수 있다고 생각한 기술자의 실패 이후로 왕자는 이믈락과 성공 가능한 탈출 방법을 다시 모색한다. 이번에는 새를 모방하는 것이 아니라 토끼를 모방해보고자 한 것이다. 동굴을 파기로 한 계획은 성공하여 왕자는 그 행복한 골짜기를 탈출한다.

 

라셀라스와 이믈락, 그리고 우연한 기회에 이 둘의 계획을 알게 되어 합류한 공주 네카야, 그리고 그녀의 시녀인 페쿠아까지 왕자의 일행은 이도시 저도시로 여행을 다니기 시작한다. 그러나 이 여행은 골짜기를 벗어나 세상에 속하게 되었다는 의미만 있을 뿐 장소의 의미는 크게 없다. 어디에나 존재하는 삶의 보편적인 상황들이 존재할 뿐이다. 이 여행지에서 공주와 왕자는 행복을 찾고, 또 과거의 행적을 찾고, 또 죽음과 영원을 찾는다. 이들이 이 주제들에 대해 탐구하는 것이 사실은 이 소설의 전체 핵심일 것이다. 행복이란 무엇인가, 우리는 행복을 가장하고 살아가는 것은 아닌가. 그렇다면 행복이란 이 세상에서 성취할 수 있는 가능성이 있는 것인가. 과거의 삶을 통해 우리가 배울 수 있는 것은 무엇인가. 죽음 이후에는 무엇이 있는가 등등. 이들은 젊고, 그렇기 때문에 낙관적으로 세상을 바라보고 또 판단하며, 이믈락은 노인의 심정으로 그들의 젊음이 내리는 판단을 지켜보기도 하고 도와주기도 하고 제재하기도 한다. 마치 한 편의 소설이 아니라 하나의 회의록을 읽고 있는 것 같기도 한 느낌이었다.

 

그러나 여행은 언제나 그렇듯 의미있는 것이었다. 이 여행을 통해 이 세 젊은이들은 자신들이 하고 싶어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찾았다. 왕자는 통치를, 공주는 지식을, 시녀는 경건을 추구하고 싶었고 아마 그렇게 될 것이다. 그리고 어쩌면 이들은 이 여행에서 얻은 지혜를 바탕으로 행복에 접근해가며 이전의 사람들과는 또 다른 삶의 결론에 이를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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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단편문학선 1 한국단편문학선 1
김동인 외 지음, 이남호 엮음 / 민음사 / 1998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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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동인의 감자부터 염상섭의 두 파산까지 한국 단편 문학의 대표라 할 수 있는 작품들이 실려 있다. 김동인의 감자는 꽤나 오랜만에 만난 작품이었다. 고등학생 때 읽고 복녀의 처지에 대해 안타까워했던 감상문을 적어 낸 기억이 있다. 그녀의 도덕성이라는 것이 그토록 손쉽게 바래지는 것에 대해, 또 그녀의 삶의 가치가 그토록 가볍게 처리되는 것에 대해 또 한번 안타까워하며 작품을 읽었다.

 

발가락이 닮았다 역시 제목만으로도 매우 유명한 작품인데, 실제로 m군의 처지가 불쌍하기는 하지만 한편 그의 업보라는 생각도 들었다. 작가는 남자의 입장에서 친구가 불쌍했을지 모르지만. ^^; 빈처와 운수좋은 날은 가난을 겪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듣는 것 같았다. 예술가의 아내로 산다는 허울만 있을 뿐 손에 잡히는 것이 없는 상태에서 때로는 절망에, 때로는 희망에 손가락을 갖다 대 보는 두 부부의 애정과, 지독히도 운이 좋았던 어느 날 자꾸만 집으로 가는 발걸음을 미뤄야 하는 김첨지의 불안감은 갑자기 생겨난 행복이 엄청난 불행의 전조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할 수밖에 없는 가난한 이의 슬픔인 것만 같다.

 

이광수은 병감에서 일어난 일을 바탕으로 하고 있다. 사소한 죄목으로 들어와 병을 앓고 있다는 이유로 병감에 있기는 하지만 보살핌을 받는다기 보다는 격리된 이들인데다, 식탐과 서로에 대한 미움밖에 없는 사람들의 덧없음이란. 이상이나 희망이 들어차지 못한 곳이 감옥이어서일까, 게다가 병까지 앓는 신세여서일까. 이들의 대화는 어딘지 쓸쓸하고 갑갑하다.

 

물레방아와 홍염은 가난하고 힘없는 이들의 설움이 폭력으로 실현된 경우다. 울분을 참을 수 없는 상태에서 인간이 취할 수 있는 단순하지만 명쾌한 방법인지 모를 폭력은 읽는 이들에게 한편으로는 안타까움을 한편으로는 시원함을 가져다주기도 한다. 반면, 채만식의 맹순사와 치숙은 당시의 정치적 상황을 풍자하고 있다. 살인범이 정식 순사가 되는 상황이 발생했을 때, 적어도 자신은 청렴하다 생각했던 맹순사가 하는 솔직한 발언은 당시의 독자들에게는 꽤나 설득력있는 것이 아니었을까.

 

이효석의 산은 모밀꽃 필 무렵에서 느껴졌던 서정성이 그대로 드러난 작품이라고 해야할까, 아니면 이효석이 보여주는 아름다운 풍경 묘사의 향연이라고 해야할까. 산 속에서 그대로 산처럼 살고 있는 사내의 모습이 모밀꽃 필 무렵의 동이의 등짝처럼 푸근하게 느껴지는 글이었다.

 

이태준의 밤길과 토끼 이야기는 삶의 고달픔이 드러나는 작품이다. 열심히 돈을 벌어 가족에게 돌아가려 했으나 비가 추적추적 계속 되는 바람에 돈을 벌 기회도 놓치고, 설상가상 백일된 아기를 버리고 간 아내 때문에 결국 그 아이를 밤길에 빗물 스며드는 구덩이를 파고 묻어야 하는 슬픔이며, 소일거리로 토끼를 기르려다가 토끼 때문에 생활을 잃게 되자 피를 보지 못하던, 게다가 임신까지 한 아내가 열 손가락에 피를 묻혀가며 토끼를 죽이게 되는 상황을 가져온 고단함.

 

정비석의 성황당은 순이와 현보의 순수한 애정과 성황당에 대한 순이의 순박한 믿음이 따뜻하게 그려진 작품이다. 이후 둘의 삶이 평탄하지 않다 하더라도 그들의 마지막 모습에 미소가 지어지는 것은 비온 뒤 땅이 굳어지듯이 이들이 굳은 애정으로 살아갈 것을 기대할 수 있기 때문이다.

 

염상섭의 임종과 두 파산은 어쩌면 이 시대의 이야기라고 해도 좋을 듯 하다. 사람의 죽음을 놓고 죽을 사람의 입장보다는 산 사람의 생계와 체면이 더 중한 우리들의 모습이, 또는 돈 때문에 정서를 잃은 채로 살아가면서도 그것이 진정 파산인줄 모르고 살아가는 우리들의 모습이 그려져 있다.

 

과거의 작품이 과거에만 머무는 것이 아니라 현재에도 여전히 유의미한 것은 그 과거가 바로 우리들의 과거이며 때로 보편적인 과거이기 때문일 것이다. 밟아 온 자취에서 길의 시작을 찾을 수 있는 것처럼 우리 단편 문학을 읽으면서 우리 작품들이 걸어 온 길을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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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단편문학선 2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20
김동리 외 지음, 이남호 엮음 / 민음사 / 1999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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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후 문학이라고 할 수 있는 문학 작품들의 모음이다. 전쟁은 육체적인 상처 뿐 아니라 정신적인 상처도 크게 남겼다. 국가간의 전쟁이 아니었고, 민족간의 전쟁이었기 때문에 더 그랬다. 아마도 전후 문학에 이러한 상처들이 반영되었고, 그래서 때로는 파괴적인 모습과 인간이되 인간이지 못하게 살아가야하는 슬픔이 진하게 드러나 있다. 김동리의 까치 소리 손창섭의 혈서, 장용학의 비인탄생, 서기원의 암사지도 등은 그러한 작품 군이다. 20년대의 가난이 생활고와 삶의 어려움으로 드러났다면, 전후의 가난함은 그저 가난함이 아니라 인간성의 상실을 가져온 가난함이다. 굶어서 배고픈 것이 전부가 아니라 정신마저도 피폐해서 사람이되 사람이 아닌 것으로 사는 것이 낫겠다고 생각하게 만드는 우울함이다.

 

반면, 지역적인 특성이 두드러지는 소설들도 있다. 이 소설의 주인공들은 자신에게 주어진 운명을 순순히 받아들이는 인물들이다. 그러나 순순히 받아들인 삶이라고 하더라도 그것이 기꺼운 삶은 아니었기에 때로는 울분을 토해내기도 하고 또 일탈을 꿈꾸어 보기도 하는 것이다. 자연과 더불어 살아가고, 자신이 태어난 고장의 모습을 그대로 닮은 그들의 이야기는 인간의 숙명에 대해 생각하게 하는 작품이었다.

 

전황당인보기는 나에게는 좀 생소한 작품이었는데, 읽으면서 주인공에게 짠한 감정을 느꼈다. 지금 우리의 현실에서 느껴지는 안타까움이 그대로 드러나 있었기 때문이다. 한 때 가까웠던 친구에게 소중한 선물을 해주고자 했던 주인공 수하인은 그 선물을 건네러 간 자리에서도, 그리고 선물 그 자체로도 전혀 기쁨이 되지 못한다. 그것은 그가 변해서라기 보다는 세상이, 또 친구가 변해서라고 해야 할 것이다. 순수한 마음으로 벼슬한 친구를 축하해 주고 싶었지만, 온갖 청탁에 시달리던 친구와 그의 아내는 그를 그닥 반겨하지 않는다. 그가 운 좋게 얻어 성실하게 만든 도장은 한순간 도장방으로 흘러들어가 버린다. 우리의 소중한 정이 그렇게 쉽사리 값을 쳐서 팔려버리는 것이 지금의 현실인 것만 같아 아쉬움이 느껴졌다. 그가 친구에게서 버림받은 듯한 느낌을 받고는 도장을 파기 힘들어졌듯이, 우리 사회에 장인들이 사라지게 된 배후에는 그런 상실의 아픔이 있었는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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