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체호프 단편선 ㅣ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70
안톤 파블로비치 체홉 지음, 박현섭 옮김 / 민음사 / 2002년 11월
평점 :
톨스토이나 도스토예프스키, 또 체호프 같은 러시아의 문호들의 작품을 만나다보면 그들을 배출 해 낸 러시아의 바탕이 무척이나 부러워진다. 어떻게 그들은 이렇게 세계적인 작가들을 품 안에 품고 키워낼 수 있었을까. 대학시절 들었던 교수님의 말이 떠올랐다. 그들은 초등학생 시절부터 햄릿을 '즐긴다'고. 읽는 것에서 더 나아가 즐기는 수준에 이르러있는 그 초등학생들에게 교수님은 큰 감명을 받으신 듯 했다. 나 역시 그런 바탕에서 이렇게 거물 작가들이 탄생하는구나 감탄할 수밖에 없다.
그와 그녀의 만남. 혹은 스침.
이 단편선에 등장하는 남녀의 만남은 참으로 다양하다. <공포>에서 실린은 그의 아내를 무척이나 사랑하지만 아내가 자신을 사랑하지 않는다는 사실 때문에 삶을 공포스럽게 여긴다. 끊임없이 구애를 계속해야하는 그의 고뇌. 그럼에도 불구하고 친구와 아내가 바람피우는 현장을 보고서도 그저 떨며 나갈 뿐 화를 표현하지 않는다. 친구가 떠난 후에도 그는 그녀와 함께 살고 있다. 만났으나 늘 평행선일 뿐인 남녀의 결혼은 <공포>가 아닐런지.
<베짱이>에 나오는 올가는 두 남자와 만나게 된다. 하나는 그의 순수하고도 믿음직스럽고 성실한 남편 드이모프이고, 하나는 화가 랴보프스키이다. 그녀는 드이모프와 결혼하면서 그가 대단한 인물이라고 스스로에게 다짐한다. 그리고 한동안은 그에게 충실한 아내가 되고자 노력하기도 한다. 하지만 그녀의 천성은 예술을 사랑하는 척(?)하는 것이기에 파티와, 예술가, 화려한 의상에 신경쓰느라 남편은 언제나 뒷전이 되고 만다. 그러다 만난 랴보프스키는 얼마나 대단한지! 그에게 푹 빠진 그녀는 부끄러운줄도 모르고 그에게 온통 마음을 쏟다 남편이 죽음에 임박한 때에야 진정 남편이 훌륭한 인물이었음을 깨닫는다. 올가의 만남은 어느쪽도 정상적인 궤도에 오르지 못했다. 한쪽은 평가절하되었고, 한쪽은 지나치게 평가되었기 때문이다. 아직 드이모프와의 사이가 좋던 시절에 그는 다음처럼 말했었다. 그녀가 그의 말에서 교훈을 얻었더라면 얼마나 좋았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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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 친구들은 자연과학도 의학도 몰라.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당신이 그들을 비난하지는 않잖아. 모두에게는 각자의 일이 있어. 나는 풍경화나 오페라를 이해하지 못하지만 이런 생각은 해. 만약 똑똑한 사람들이 그런 일에 자신의 일생을 바쳤다면 다른 똑똑한 사람들이 거기에 대해 거금을 지불하지. 왜냐하면 그런 사람들이 필요하니까. 나는 이해를 못해. 하지만 이해를 못한다고 해서 거부한다는 건 아니잖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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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이지 : 41-42쪽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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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로치카>에서의 남녀는 그야말로 스친다. 통계 때문에 시골 마을에 머물렀던 주인공은 마을을 떠나던 날 자신에게 호의적이었던 마을 자치회 의장의 딸 베로치카에게서 사랑 고백을 듣게 되지만 어떤 답도 해주지 못한다. 오히려 사랑고백을 듣자마자 그는 그토록 멋스럽고 아름다워 보였던 그녀가 순식간에 빛을 잃은 것처럼 보이기까지 한다. 여인의 고백이 이렇게 단순하고 소박하게 거부당할 수 있다니. 그에게는 그토록 찬란했던 마을이 그녀에게는 그가 있어야만 찬란해지는 것이었다.
독특한 발상, 인간 내면의 고찰.
반면에 그의 독특한 발상이 명료하고 깔끔한 구성으로 표현된 작품들도 있었다.
<관리의 죽음>은 사소한 것에 지나치게 신경을 쓰고 집착하던 인물이 그로 인해 죽는 과정을, <드라마>에서는 엉터리 희곡을 읽는 여인의 목소리를 들어야 했던 주인공의 분노를, <내기>에서는 호기에 일어난 15년간의 감금과 그간 벌어지는 인간 내면의 변화를, 아름다운 여인 두 명을 예로 들어 아름다움의 기준을 새롭게 그려낸 <미녀>, 결혼을 오매불망 꿈꾸던 여인이 꿈에서 남편의 죽음을 경험하는 <거울>, 중병에 걸렸다 살아나 누이동생의 죽음에도 불구하고 기쁨을 맛보는 인물을 그린 <티푸스> 그리고 살아있을 때보다 죽음이 가까웠을 때 더 행복감을 느꼈던 <주교> 등. 스토리도 그렇지만 세세한 인물 묘사와 대사, 장면의 전환등 그야말로 깔끔한 단편구성의 전형을 보여주는 작품들이었다. 독특한 상황에서 인물들이 어떻게 움직이고 어떻게 느끼는지 어찌보면 뻔뻔하기도 하고, 어찌보면 정신이 나간것 같은 인물의 내면에 무엇이 들어있는지 낱낱이 해부되어 있다.
단편선을 읽으면 작가의 특징을 찾아내거나, 각 단편들에 들어있는 공통된 부분들을 찾아내는 데에서 묘미를 느껴볼 수 있다. 그의 수많은 단편들을 찾아 오늘 그만의 독특한 인물탐색에 들어가 보는 것은 어떨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