투명한 나선 ㅣ 탐정 갈릴레오 시리즈
히가시노 게이고 지음, 김선영 옮김 / 북다 / 2026년 7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오랫동안 마음의 쉼표가 되어주던 작가의 부고 소식을 접한 뒤 집어 든 책은 갈릴레오 시리즈의 열 번째 장편, 『투명한 나선』이었다. 비록 작가의 마지막 집필작은 아닐지라도, 전해진 소식과 맞물려 펼친 페이지들은 마치 작가가 건네는 애틋한 유작처럼 느껴졌다. 


1. 눈에 보이지 않지만 운명을 지배하는 '혈연'이라는 이중나선


소설의 제목 '투명한 나선'은 생명의 설계도인 DNA, 즉 겉으로는 드러나지 않는 '혈연'을 직관적이면서도 깊이 있게 빗댄 은유다. 전작 『가공범』에서도 강하게 작동했던 이 모티프는 이번 작품에서도 미스터리를 추동하는 가장 강력한 축으로 작동한다. 아무런 접점이나 동기가 없어 보이는 사건의 이면에는 결국 사람의 운명을 거칠게 옭아매는 핏줄과 숙명이 자리 잡고 있다.

작품은 초반부터 복잡하게 얽힌 인물들의 관계를 제시하며 "대체 누가 누구와 피로 이어져 있는가"를 추론하게 만든다. 단순한 트릭 규명에 머무르지 않고 꼬리를 무는 인간관계를 짚어나가게 하는 구조는 추리소설 특유의 장르적 재미를 단단하게 유지해 준다.


2. 차가운 이성의 화신 유가와 마나부에게 채워진 온기


하지만 이 작품의 진정한 울림은 예측할 수 없었던 지점에서 터져 나온다. 냉철한 논리와 과학적 사고로만 무장했던 '이성의 화신' 유가와 마나부 교수의 감춰진 이야기가 전면에 등장하기 때문이다. MBTI로 치자면 극한의 'T'형 인간처럼 감정의 동요 없이 사건의 모순만 집어내던 그에게, 지극히 인간적이고 애틋한 가족의 서사가 덧입혀진다.

냉정했던 흑백의 마나부라는 인물에게 비로소 다정한 색채가 입혀지는 순간, 독자는 깊은 여운을 마주하게 된다. 인간의 진정한 성숙이란 더 많은 지식을 증명해낼 때가 아니라, 누군가의 아픔과 삶을 온전히 이해할 때 완성된다는 메시지가 결말의 온기와 함께 조용히 스며든다. 마지막 장을 덮으며 작가의 남겨진 온기를 실감하게 만드는, 시리즈 팬들에게 더없이 각별한 작품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l 공유하기 l 북마크하기찜하기 lthankstoThanksTo
 
 
 
내가 죽이지 않았다 ㅣ 내가 죽였다
정해연 지음 / 반타 / 2026년 6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전작 『내가 죽였다』에서 환상의 호흡을 보여주었던 신여주와 김무일 콤비가 후속작 『내가 죽이지 않았다』로 다시 돌아왔다. (사실은 두 권을 한꺼번에 읽어서 오래 기다리지는 않았다. ^^;;) 전작의 결말이 씁쓸하면서도 현실적이었기에 여주는 결국 지방(홍천)으로 발령을 받았었는데, 이렇게 멀리 떨어지면 다음은 어떻게 되려나 걱정했던 것과 달리 둘은 마치 월하노인이 실을 이어놓은 것처럼 줄줄 서로를 끌어당긴다.


1. 폐쇄적인 군부대 사건과 꼬리를 무는 의혹

이번 작품의 중심축은 3년 전 군부대 내에서 벌어졌던 의문의 살인 사건이다. 당시 범인으로 지목되어 억울하게 복역까지 마쳤던 인물이 출소 직후 변사체로 발견되면서 서사는 급물살을 탄다. 피해자 어머니의 의뢰를 받아 사건을 재조사하던 변호사 김무일이 하필 피해자의 마지막 통화 상대이자 최초 신고자가 되고, 이 난처한 상황을 계기로 무일은 "여주 형사가 아니면 진술하지 않겠다"고 버티며 두 사람은 다시 한번 운명적인 수사 파트너로 묶이게 된다.

군부대라는 특수하고도 폐쇄적인 공간이 얽힌 만큼, 사건의 이면은 전작보다 한층 복잡하고 긴장감이 팽팽하다. 증언과 정황이 엇갈리며 꼬리를 무는 단서들은 독자에게 끊임없이 추리의 즐거움을 선사하며 몰입감을 끌어올린다.

2. 한층 깊어진 인물의 성장과 로맨틱 코미디의 절묘한 결합

속도감 있는 추리 서사 속에서도 인물들의 매력은 전작 이상으로 반짝인다. 전작에서 약삭빠른 기획 변호를 맡으며 속물적인 면모를 보였던 김무일은 특유의 능청스러움은 간직한 채 보다 정의롭고 든든한 조력자로 성장해 매력이 더 폭발한다.

동시에 두 사람의 관계 변화 역시 빼놓을 수 없는 관전 포인트인데, 사건 해결을 최우선으로 두는 장르적 본분을 잃지 않으면서도, 전작의 은근한 썸을 넘어 한 걸음 더 진전되는 두 사람의 감정선과 유쾌한 티키타카는 묵직한 사건의 무게감을 덜어주는 훌륭한 완급조절 장치라고 할 수 있다. 

마지막 장에 이르러 또 다른 사건의 시작을 예고하며 다음 편에 대한 기대감을 한껏 부풀려 놓는 점 역시 시리즈물로서의 매력이라고 할 수 있다. 


완성도 높은 한국형 콤비 수사물을 기다려온 장르소설 독자들이 큰 실망 없이 읽을 수 있는 작품이라는 생각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l 공유하기 l 북마크하기찜하기 lthankstoThanksTo
 
 
 
내가 죽였다 ㅣ 내가 죽였다
정해연 지음 / 반타 / 2026년 6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추리소설을 읽다 보면 전개 과정에서 대략적인 결말이나 범인의 윤곽이 일찌감치 짐작되는 순간이 있다. 보통 이럴 때 책을 덮어버리게 되는 작품이 있는가 하면, 결말의 방향이 뻔히 보이는데도 끝까지 페이지를 넘기게 만드는 작품이 있다. 소설 『내가 죽였다』는 후자에 속하는 책이었다. 잘 짜인 수사 드라마 한 편을 단숨에 몰아본 듯한 몰입감을 준다고 할까.


1. 자백에서 시작되는 미스터리, '아는 맛'이 주는 흡인력


이야기의 출발점은 이렇다. 7년 전 발생해 이미 단순 사고사로 종결되었던 사건에 대해, 한 건물주 노인이 "사실은 내가 죽였다"라며 불쑥 자백을 던진다. 가만히만 있어도 법적 처벌 없이 평온하게 여생을 누릴 수 있었을 노인이(물론, 긴 시간이 남은 건 아니지만)  스스로 살인을 고백한 것이다.

진짜 미스터리는 그 자백 직후부터 고개를 든다. 사건의 진상을 다시 파헤치려 하자마자 기다렸다는 듯이 협박과 의문의 죽음들이 꼬리를 물고 이어진다. 대체 누가, 왜 그토록 오래된 사건을 필사적으로 감추려 하는 걸까. 노인이 실수로 목숨을 앗아갔다는 그 청년은 과연 누구이며, 허점투성이였던 살인이 어떻게 감쪽같이 사고사로 덮일 수 있었을까. 이 소설은 독자의 뒤통수를 얼얼하게 만드는 기막힌 반전으로 승부수를 띄우기보다는, 범위를 좁혀가며 서사의 밀도를 채우는 은근한 '아는 맛'으로 읽는 사람들을 끌어당긴다.


2. 티키타카 콤비플레이와 다음을 기대하게 만드는 결말


자칫 전형적인 장르물의 문법처럼 느껴질 수 있는 빈틈을 메우는 것은 바로 두 주인공의 케미스트리다. 외모보다 올곧은 정의감이 먼저 빛나는 형사 신여주와, 겉으로는 돈만 밝히는 속물 같지만 결정적인 순간에 날카로운 기지를 발휘하는 변호사 김무일의 조합이 무척 매력적이다. (그래서 드라마같은 것이, 실제로 만들면 매우 매력이 넘치는 캐릭터가 탄생할 것 같기 때문이다. ^^;)

상극처럼 보이는 두 사람이 주고받는 유치하면서도 차지게 오가는 티키타카는 읽는 내내 피식거리며 웃게 만드는 강력한 활력소가 된다. 위기 속에서 김무일의 기지가 언제 어디서 발휘될지 기대하게 되고, 사건을 헤쳐나가며 서로 의지하고 성장하는 모습을 지켜보는 재미도 쏠쏠하다.

결말에 이르면 책은 다음 장을 기대하도록 만드는데, 나는 이미 다음 권이 나온 다음에 이 책을 읽었기 때문에 왠지 큰 그림같기도 하고 그랬다.  노련한 콤비로 거듭난 두 사람이 마주할 다음 무대에서는 과연 법과 제도의 한계를 넘어 진짜 정의가 온전히 구현될 수 있을지, 다음 권을 읽어봐야겠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l 공유하기 l 북마크하기찜하기 lthankstoThanksTo
     
     
     
    가공범
    히가시노 게이고 지음, 김선영 옮김 / 북다 / 2025년 7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최근 읽었던 장미와 나이프의 여운이 가시기 전, 히가시노 게이고의 최신작 가공범을 찾아 읽었다. 이 작가는 출간만 하면 베스트셀러 순위에 자연스럽게 오르는 믿음직한 이름인데, 이번 작품 역시 기대를 저버리지 않았다.

    이야기는 유명 정치인과 전직 배우 부부의 죽음으로 시작된다. 정치인이라는 직업상 정적은 있을 수 있지만, 인간적인 매력과 인품을 두루 갖춘 이들이 누군가의 원한을 살 만한 인물은 아니었다는 점에서 사건은 더욱 기묘하게 다가온다. 자살처럼 꾸민 듯 보였지만 세부를 들여다보면 오히려 조잡하기까지 한 흔적들. 과연 범인은 서툰 위장자일까, 아니면 모든 것을 계산한 기획자일까.

    불타버린 저택은 단순한 현장이 아니라, 이 사건의 분위기를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배경이기도 하다. 시선이 닿는 곳마다 의문이 남고, 남겨진 조각들 사이에서 독자는 자연스레 상상하게 된다.

    사건이 살인임이 확실해진 후, 형사 고다이 쓰토무가 본격적으로 이들의 과거를 파헤치기 시작한다. 그러나 오래된 원한처럼 보이는 요소들은 손에 잡힐 듯 잡히지 않고, 단서들은 분명 가까이 있는 듯한데도 조금만 손을 뻗으면 흩어져 버린다. 독자는 고다이 형사와 함께 계속해서 가능성을 좇고, 방향을 바꾸며 추리를 이어가게 된다.

    고다이 쓰토무라는 인물도 이 작품의 중요한 매력이다. 히가시노 게이고 작품 속 천재형 인물들과 달리, 그는 철저하게 성실함으로 무장한 평범한 형사다. 특별한 능력 대신 꾸준함과 꼼꼼함이 그의 무기이며, 현실에서도 실제로 있을 법한 책임감 강한 인물로 묘사된다. 그래서 그의 추적에는 리얼리티가 살아 있고, 독자는 마치 다큐멘터리를 따라가듯 사건을 함께 좇는 기분을 경험한다.

    제목인 가공범은 말 그대로 ‘가공의 범인’을 의미한다. 실제로 존재하는 범인인지, 아니면 존재하지 않는 누군가를 가리키는 말인지 끝까지 읽어도 긴장을 놓을 수 없게 만든다. 작품의 분위기나 구성은 어느 순간 용의자 X의 헌신을 자연스럽게 떠올리게 한다. 그 작품을 사랑했던 독자에게는 또 하나의 변주곡처럼 느껴질 수도 있겠다.

    완벽한 퍼즐을 맞추듯 스토리를 구축하는 작가의 장점이 이번 작품에서도 강하게 드러난다. 치밀함과 의외성이 공존하는 추리소설을 찾는 독자라면, 가공범은 충분히 몰입할 만한 작품이다. 숨겨진 의도와 감춰진 감정들을 찾아가는 여정을 경험해 보고 싶다면, 이 책을 권하고 싶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l 공유하기 l 북마크하기찜하기 lthankstoThanksTo
     
     
     
    미로장의 참극 ㅣ 긴다이치 고스케 시리즈
    요코미조 세이시 지음, 정명원 옮김 / 시공사 / 2024년 11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미로장의 참극』은 전쟁이 끝난 뒤, 기존 귀족 계급이 몰락하고 신흥 재벌 세력이 등장하던 격동의 시대를 배경으로 한다.
    일본의 귀족 문화가 다소 낯설게 느껴질 수 있지만, 어느 시대든 지배층의 몰락과 새로운 세력의 부상은 반복되는 역사이기에 오히려 자연스럽게 받아들이게 된다.

    추리소설의 가장 큰 재미는 역시 ‘누가, 어떻게, 왜’라는 질문을 좇아가는 과정에 있다.
    CCTV도 블랙박스도 없던 옛 시절이기에, 이 작품에서는 부재(결핍)를 추리로 채워가는 묘미가 더 크게 느껴진다.

    탐정으로 등장하는 인물은 바로 긴다이치 고스케.
    말더듬이에 헝클어진 머리를 긁적이는 이 청년이 훗날 김전일이 “할아버지의 이름으로!”를 외치며 모시는 바로 그 ‘할아버지’라는 사실은, 이 시리즈를 읽을 때마다 가장 큰 미스터리이기도 하다. (그는 대체 언제 결혼을 하고 무려 아이까지 낳았는가!!)
    하지만 그만큼 전설적인 명탐정이라는 점은 부정할 수 없다.

    이 작품에서 가장 흥미로운 요소는 ‘공간’이다.
    제목 그대로 저택 전체가 하나의 거대한 미로처럼 구성되어 있다.
    원래 명칭은 ‘명랑장’이지만, 저택을 설계한 귀족이 위기 상황에서 도망칠 수 있도록 곳곳에 탈출구와 사각지대를 만든 탓에 후대 사람들에게는 ‘미로장’으로 불리게 되었다.
    세월이 흘러 귀족 세력이 사라지고 신흥 재벌 가문이 이 집을 물려받았지만, 저택에는 여전히 과거의 참극이 깊은 그림자처럼 남아 있다.

    이 소설의 재미는 단순한 추리에만 있지 않다.
    저택 아래 뻗어 있는 복잡한 지하 미로, 숨은 공간, 오래전 사건의 흔적들…
    모두가 상상력을 자극하며, 마치 만화 속에서나 볼 법한 장면들이 곳곳에 배치되어 있어 읽는 동안 영상처럼 장면이 펼쳐진다.

    여유로운 주말이나 조용한 밤 시간에 읽기 좋은 책이다.
    부담스럽지 않은 분량 속에서, 고전 추리만의 분위기와 공간 자체가 주는 미스터리함을 충분히 즐길 수 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l 공유하기 l 북마크하기찜하기 l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