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원청 - 잃어버린 도시
위화 지음, 문현선 옮김 / 푸른숲 / 2022년 11월
평점 :
<허삼관 매혈기>를 읽고 위화를 알게 된 후로, 그의 작품을 읽을 기회가 없었습니다. 허삼관의 이야기가 먼 이야기같지 않고 마치 내 이야기 같았으면서도 마치 풍문이 지나가듯 작품이 나왔다는 소식만 스치고 막상 손에 들지 못했어요. 그러다가 이번에 꼭 읽어봐야지 하게 된 건 8년 만의 신작이라는 광고문구 때문이었는데요. 마치 작가가 '그간 격조했네.'하고 말을 거는 듯 했거든요. ^^ 맞아요. 저는 좀 격조했습니다.
위화답게 담백하고 간절한.
주인공 린샹푸는 땅에 두 다리를 딛고 굳게 뿌리 내린 것 같은, 그런 남자입니다. 어디든 그가 있는 자리에 사람들이 깃들고, 그는 자기 그늘 아래 선 사람들을 보호하려는 듯 두 팔을 벌려 비바람을 막아내죠. 그는 미지의 공간 원청을 향해 떠난 후로, 간절하게 한 사람을 찾았고, 또 간절하게 한 사람을 키워냈습니다. 작가는 그의 행적을 묘사하여 한 걸음 한걸음을 독자가 따라가도록 하면서도 그의 감정을 폭발시키지 않습니다. 아들의 비보를 들은 리몌이롄의 슬픔에는 단장의 아픔을 절절하게 그려냈으면서 말이죠. 그것은 린샹푸의 성격 때문이기도 하고, 린샹푸대신 독자가 불안해하고 또 슬퍼하라며 만들어놓은 장치같기도 해요.
재앙의 한복판. 그 처절한 삶.
원청을 찾아 남쪽으로 내려간 린샹푸가 만난 세상은 추위와 얼음으로 쌓아올린, 동사하는 게 전혀 이상하지 않은 극한의 눈세상이었습니다. 심지어 그곳에 처음 발을 디디던 순간에는 어마어마한 회오리 바람이 불었지요. 하지만 눈과 회오리보다 더한 것들이 찾아와요. 처음에는 강도인 '토비'들이고 그 다음은 군인이라지만 약탈에 있어서는 토비들과 크게 다를 바 없는 북양군인데요. 정직하고 열심히 살아도 '사는 것' 자체가 쉽지 않은 세월이 휘몰아칩니다. 민병단을 조직해 스스로를 지키고자 애쓰는 이들의 어설픈 모습이 우스꽝스럽다가도 안쓰럽고, 버티지못하고 떠나는 이들의 이기적인 행태가 얄미우면서도 이해가 되고, 이어지는 주인공들의 삶의 궤적이 놀랍지만 수긍하게 됩니다.
인생은 어쩌면.
린샹푸와 샤오메이의 이야기는 건조하게 보면 아름답지 않습니다. 하지만 위화는 이들의 짧은 만남과 그 만남 전후의 사연을 엮어 '모란을 입은 봉황'같은 애잔함을 만들어냅니다. 샤오메이의 소박한 혼수였던 자수는 가까운 과거 그녀가 정체성을 얻기 위해 익혀야 했던 것이자 린샹푸에게서 마음을 얻어낼 수 있었던 수단이기도 하고, 내내 그녀를 떠올리게 만드는 물건이기도 하지만 다시 그들을 이어주지는 못합니다. 인간은 긴 세월을 감당하려고 애쓰지만 한편으론 그저 자수가 놓아지는 어느 순간을 살고 마는지도 모르겠어요.
소설을 읽으면서 저는 원청을 찾아가는 기분이었습니다. 그러다가 시진에 눌러 앉은 느낌이었고요. 가습이 답답해지기도 하고 마음을 졸이다가 풀어지기도 하고 피식 웃다가 가슴이 아프기도 했답니다. 잘 쓴 소설은 이렇게 독자를 어디론가 데려가 버리고, 시간도 가져가 버립니다. 지금 있는 공간에서 벗어나 어느 먼 곳으로 떠나고 싶을 때 펼쳐보세요.
YES24 리뷰어클럽 서평단 자격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