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찰관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120
니꼴라이 고골 지음, 조주관 옮김 / 민음사 / 2005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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흘레스따코프시치나(흘레스따꼬프주의)라는 말이 러시아에서는 자만이나 허풍의 동의어로 쓰인다고 한다. 이 말만으로도 검찰관이 얼마나 러시아에서 유명한 작품인지. 또 얼마나 많은 영향을 끼친 작품인지 알 수 있게 해주는 말이 아닐까.

 

희곡의 내용은 비교적 간단하다. 시골의 어느 작은 도시. 시장과 경찰, 병원과 교육감까지 모두 부패한 이 도시에 검찰관이 올 것이라는 소문이 들린다. 안그래도 찔리는 것이 많은 사람들은 어떻게 대비할 것인지에 대해 고민하기 시작한다. 그 때 마침 검찰관처럼 보이는 젊은이가 등장한다. 사람들은 제대로 판단하지도 못한채로 그를 검찰관이라고 생각하고, 시장과 이하 사람들은 모두 이 젊은이에게 잘 보여 그간의 부패를 덮을 수 있을까하며 적극적인 공세를 펼치기 시작한다. 돈이 모두 떨어진 이 젊은이가 배고파서 쳐다보는 것을 그토록 오해하다니. 실소를 머금을 수밖에 없는 장면이다. 흘레스따꼬프는 이를 이용해 모두를 농락하며 시장의 딸에게 청혼까지 하게 되고 그가 유유히 돌아간 후에서야 마을 사람들은 그의 실체를 알고 분통을 터뜨린다. 그리고 그 울분이 채 사라지기도 전에 진짜 검찰관이 온다는 헌병의 외침소리에 모두들 굳은 채로 움직일 수 없게 된다.

 

사칭을 다룬 실화모음집을 읽은 기억이 난다. 사칭에는 대단히 많은 노력이 필요하기도 하지만 사실은 속아주는 사람이 더 필요하다. 사람들의 헛점을 이용하여 자신을 잘 포장하기만한다면 얼마간의 사칭은 뛰어난 연기력을 가진 이에게는 못할 일도 아닐지 모른다. 그러나 검찰관에서 다루고 있는 사칭은 단순히 젊은이의 치기에 그치지 않는다. 그가 농락하는 이들 모두 그보다 더한 비리를 저지르고 있다는 점에서 그렇다. 그렇기 때문에 그에게 이용당하고 그가 대놓고 돈을 요구하며, 그의 거짓말에 쩔쩔매는 모습을 보면서 그들이 하나도 불쌍하지 않다. 게다가 그에게 청원서를 넣었던 상인들 또한 재료비를 속여 이익을 남겨먹었다고 시장이 외치는 장면에 이르면. 대체 이 마을에 깨끗한 인물이 있기는 한 것인지 한심스러운 마음이 든다. 결국 이 희곡에는 긍정적인 인물이라고는 없는 것이다. 모두 자기 나름의 부패를 등에 짊어진 채 다른 사람에게 손가락질을 하고 있는 형국이다. 어쩌면 그것은 시골 마을의 풍경이 아니라. 지금 내가 발딛고 있는 이곳의 풍경인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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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화밭의 고독 속에서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124
베르나르마리 콜테스 지음, 임수현 옮김 / 민음사 / 2005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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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화밭의 고독 속에서> 와 <숲에 이르기 직전의 밤>이 수록되어 있다. 두 작품 모두 서정적인 제목과는 달리 두 사람의 대화. 또 한 사람의 독백으로 되어 있기 때문에 약간 메마른느낌이 들었다. 

<목화밭의 고독 속에서>에는 두 명의 등장인물이 나온다. 한 사람은 딜러. 한 사람은 손님이다. 그러나 이 둘의 관계를 이렇게 정의하기에는 석연찮다. 딜러는 팔 물건을 꺼내놓지 않고, 손님은 사겠다는 요구도 하지 않는다. 그래도 두 사람은 파는 자와 사는 자라고 정의될 수 있을까. 서로가 서로에게 아무런 제시도 하지 않으면서 어떻게 거래는 성사될 수 있을까. 아니 둘 사이의 거래가 성사되지 않기 때문에 더더욱 이 두 사람은 서로에게서 떨어질 수 없는 것은 아닐까. 이 둘이 제안을 거부하는 이유는 같다. 거절당할까 두렵기 때문이다. 이러한 두려움은 <숲에 이르기 직전의 밤>에도 드러난다. 나는 끊임없이 이야기를 하면서, '너'가 지쳐서 가버릴까봐 두려워한다. 거절에 대한 막연한 두려움. 이것이 콜테스의 삶에서 비롯된 것이라면, 그의 삶의 고통이 얼마나 그의 정신을 피폐하게 했는지 짐작해 볼 수 있다. 

두 작품 모두 '나'는 이방인이다. 섞이지 못하는 이. 섞이려고 노력하지만 언제나 들킬 위험을 안고 있는 이. 콜테스가 여기저기에서 거부당하며 또 어느 곳에도 정착하지 못하면서 살았기 때문에 그런 것일까. <목화밭의 고독 속에서>에 등장하는 딜러역시 이동하는 인물이기는 마찬가지이다. 그는 손님을 기다린 것이 아니라 손님이 가는 길목으로 이동해왔다. 그렇게 해서 마침내 둘이 만난 것이다. <숲에 이르기 직전의 밤>에서 나역시 '너'를 붙잡았다. 내 말을 들어줄 유일한 이. 

전자에서 각각의 인물이 서로 화해하지 못하는 것으로 끝나기는 하지만 두 사람이 존재한다고 생각할수 있다면 후자에서는 '나'의 존재에 비해 '너'의 존재가 명확하지 않다. 어쩌면 '나'는 어느 벽을 보고 이야기를 하고 있거나, 비에 비친 그림자를 보고 이야기를 하고 있을 수도 있다. 자기의 이상형을 떠올리면서. 그가 정신을 차리고 자기가 꼭 붙잡고 있었던 것이 자기의 옷자락일까봐 안타까운 마음이 밀려들었다. 그 고독에 대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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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래의 여자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55
아베 코보 지음, 김난주 옮김 / 민음사 / 2001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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점점 더워지는 이 계절에 이 소설을 읽는다는 것은 작품을 실감하기 위해서는 좋은 일이고, 여가를 즐긴다는 측면에서는 조금 힘든 일이기도 할 것이다. 소설을 읽으면서 내내 모래에 대해 생각했다. 건조한 모래가 아니라 찝찝하고 끈끈한 모래. 수분을 가득 머금고 있지만 몸의 수분을 모두 말려버리는 모래. 매일매일 덮여와서 집을 무너뜨리고, 마을을 쓸어버릴 기세로 덤벼드는 모래들. 그리고 이 모래들을 가능하게 하는 태양과 바람. 소설은 내내 이 모래. 태양. 바람. 그리고 여자에 대해 이야기한다. 

곤충채집을 위해 사구를 찾은 남자. 교사라는 직업이 있기는 하지만 왠지 곤충학자라고 불러야 할 것 같은. 모호한 정체성을 가진 이 남자는 신기한 곤충을 발견해 내고 그렇게 해서 이름을 날리고 싶어하는 포부를 지녔다. 이 이외에는 다른 사람과 다를 것이 없는 지극히 평범한 이 남자. 그가 시도한 잠깐의 일탈의 그를 세상에서 지워버릴만한 사건이라고 누가 생각했을까. 

사구에 갖혀서 여자와 살아가는것. 또는 그 혼자서 이전의 생활을 반복하며 교사로서 살아가는 것. 그는 후자를 선택하기 위해 그토록 애를 썼지만. 냉정하게 생각해보면 그 둘이 서로 다른 것이던가. 우리 삶이 늘 그렇게 일상을 반복하는 것이라면 이 두 삶이 그에게 목숨을 걸고 바꾸어야 할만큼 다른 그 무엇이 아닐수도 있지 않을까. 그래서 그 역시 사다리가 치워지지 않은 것을 보았을 때. 언제든 떠날 수 있다고 생각되었을 때. 비로소 떠나기를 보류한 것처럼.

사구의 사람들이나 그를 붙잡아 둔 여자가 그런 깨달음에 이르렀기 때문에 삶을 정체하고 있는지는 알 수 없다. 분명한 것은 그들에게는 아무런 망설임이나 갈등이 없어보인다는 점이다. 시골 사람들의 순박함이 그래서 더더욱 불안해 보인다. 망설임없는 움직임때문에 마치 곤충을 보면 아무 망설임없이 죽이는 것처럼 그들은 남자를 그렇게 대한다. 반면 남자는. 곤충채집을 일로 알던 남자는 곤충을 대할때마다 자꾸 망설인다. 이제 그가 곤충의 처지에 내려간 탓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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벨킨 이야기 / 스페이드 여왕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62
알렉산드르 세르게비치 푸시킨 지음, 최선 옮김 / 민음사 / 2002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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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야기꾼이 쓴 글이라는 느낌이 들 때가 있다. 이 작가의 머릿속에는 어쩜 이렇게 다양한 인물들이 들어있을까. 이렇게 절묘한 상황을 만들어 낼 수 있을까. 비슷한 주제를 전하는 것 같은데 이렇게 다른 말을 하기도 하는걸까. 등등의 느낌. 

푸슈킨의 작품들도 그랬다. 벨킨이야기는 이제 고인이 된 벨킨이 쓴 것이며 모든 작품들에는 실재하는 주인공이 있다고 말하고 있지만 그것부터가 소설의 시작이니 모두 믿을만한 것은 아니다. 하지만 이런 장치는 단편들에 등장하는 인물들이 왠지 실재하는 인물일것만같은 현실감이 들도록 하는데 기여한다. 이들의 이야기는 시간을 뛰어넘어가며 진행된다. <발사>의 실비오는 현재로 시작하지만 과거의 사건을 깊이 간직한 인물이며, 이 과거의 사건은 미래의 실비오에게 영향을 미친다. 화자는 그러니까 과거의 사건에 얽매여있으며 미래의 사건을 준비하는 현재의 실비오를 잠깐 관찰한 인물에 불과하다. 그래서 화자가 그리는 실비오는 그의 진실된 모습이 아닐 수밖에 없다. 그의 진정한 모습은 질투심 때문에 잘못된 결투를 신청해버린. 그리고도 그 결투의 결과를 떨치지 못하는 과거에 사로잡힌 인물일 뿐이다. 화자에게 그토록 호방해보였던 인물이 사실은 그다지 호탕하지 못하다는 것은 아이러니가 아닌가. 

<눈보라>에서도 사건은 해를 넘어가며 진행된다. 중간의 빈 공간을 독자들이 채워넣기에는 우연이 강하기 때문에 왜 마랴가 드러누웠는지 또 어째서 블라지미르는 그렇게 냉정해졌는지 이해할 수 없다. 그래도 다행인 것은 작가가 가여운 이 여인을 외면하지 않았다는 것일까. <역참지기>에서도 역시 늙은 역참지기의 현재로 시작해서 미래의 일로 끝난다. 그의 미래를 궁금해하는 화자와 독자의 시선은 서서히 일치된다. 어째서 잠깐 동안 그는 늙어버렸을까. 그의 딸은 어떻게 지내고 있을까. 결국 그녀는 돌아올 것인가. 늙은 아버지를 두고 떠났던 딸의 미래와 그 딸을 기다리던 늙은 아버지의 모습이 그래서 조금은 아쉬웠다. 

그러고보면 단편들에서 푸슈킨은 선과 악을 명확하게 구분하지 않는 것 같으면서도 은근히 선량함을 긍정하고 악의성을 처벌하는 입장을 고수하는 것 아닌가하는 생각이 들었다. 단편들의 주인공은 그 위치가 어떻든간에 악의적인 사람의 결말을 비참하게 그리고 있다. <스페이드 여왕>의 게르만은 가장 비참한 최후를 맞는 인물인데, 그는 처음부터 끝까지 악의를 띄고 있다. 담담히 서술되어 있기는 하지만 그가 실행한 행동들은 악질적이기까지하다. 불쌍하고 가련한 양녀를 이용해 노파의 방까지 침입한데다 노파가 죽은 뒤에도 가책같은 것은 느끼지 않는다. 한때 절제와 근면이 자신의 성공카드라고 되뇌었던 인물이라고는 전혀 생각되지 않는 모습이다. 정신병원에서 끝없이 여왕을 마지막으로 외치는 그의 결말과 달리 제법 재력있는 인물과 결혼하게 된 리자베타를 보여주는 것은 그때문이리라. 선은 결국 승리하더라는. 

그렇다고 권선징악만으로 이 소설들을 읽어낼 수는 없다. 다양한 인물들의 다양한 감정선이 그리고 자연스러운 욕망과 인연의 얽힘이 소설의 씨줄과 날줄을 이루고 있기 때문이다. 그의 이야기에 빠져들면 한동안은 머릿속에서 그들이 춤을 추며 다음 이야기를 들려주겠다고 속삭이는 꿈을 꾸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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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루다의 우편배달부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104
안토니오 스카르메타 지음, 우석균 옮김 / 민음사 / 2004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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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루다의 이름은 무겁다. 그가 가진 존재감이 너무도 무거웠기 때문에 나는 읽기 전부터 이 책의 두께와는 상관없이 무겁게 느꼈다. 아마도 시에 관한 진지한 대화가 주로 이어지거나, 아니면 정치적인 내용을 가득 담은 채 전개되는 음울한 바닷가의 서사를 읽게 될 것이라고 예상했다. '일포스티노'라는 영화로 만들어졌다고 들었지만 그때도 역시 그런 영화는 내가 본다고 이해되는 게 아니야. 라고 도리질 먼저 했던 것이 사실이다. 이렇게 재미있는 줄 알았으면 영화 먼저 볼걸. 소설의 중반부에서 낄낄거리면서 맨 처음 든 생각이다. 

이슬라 네그라. 바닷가의 한 작은 마을. 어부들과 그에 빌붙어 사는 사람들의 공간. 여기에는 글자를 읽을 줄 아는 사람도 별로 없다. 그래서 우편배달부가 하는 주된 일은 바로 이 마을의 유일한 수신인 파블로 네루다에게 매일같이 배달되는 수십통의 편지를 운반해다 주는 것이다. 어부로서의 삶에 취미없어하던 마리오는 그래서 이 일에 가장 적합한 이였다. 그는 아는지 모르겠으나 어부이기를 거부하고 빈둥대기 시작했던 그때부터 그의 시심은 자라났는지도 모르겠다. 물론 빈둥댐이 시의 시작이었다기 보다는 주어진 삶에 대한 거부가 시의 시작이었다고 보는 게 더 적합할 것이다. 아무튼 그는 네루다를 처음 만났을 때부터 그의 약간은 냉랭한 태도에도 불구하고 친근함을 느끼기 시작한다. 말을 할 줄 모르고 수줍기만 했던 인물치고는 당돌하게 네루다 시인에게 들이대기도 한다. 결국 그는 네루다를 뚜쟁이로 만드는 데 성공한다. 이런. 뚜쟁이라니. 이 거물을. 정치인을. 시인을. 

한용운 시인의 시를 가지고 한 독일인이 청혼에 성공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한용운 시인이 살아있어 그를 만날 수 있었다면 그 독일인은 아마도 내 결혼을 성사시켜준 은인이라며 크게 한 턱 냈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본래 시는 그런 것. 우리는 사랑으로 가득차 있을 때 누구나 시인이 된다. 네루다에게 사랑은 여인에게도 있었지만 국가에도 있었기에 그리 흘렀을 뿐. 본질적으로 시는 사랑이 아니었던가. 온 마음이 그것으로 가득 차는 것을 사랑이라 부른다면, 시도 그렇게 온 마음 가득 차서 흘러나오게 하는 것일테니 그 둘은 서로 너무나 닮아 떨어질 수 없는 것이리라. 

네루다는 서글프게 세상을 떠나고 마리오는 잡혀가 어찌 되었는지 모를지라도. 이렇게 이야기는 나락으로 떨어져 버릴지라도 우리는 그의 시에서 절망을 읽지 않듯. 이 소설에서도 불행을 읽지 않는다. 오히려 나아가야 할 희망적인 공간을 떠올린다. 그들이 이렇게 밝던 그들이 꿈꾸던 세상을 떠올리게 된다. 그리고 그들의 남겨진 시들을 생각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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