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야기꾼이 쓴 글이라는 느낌이 들 때가 있다. 이 작가의 머릿속에는 어쩜 이렇게 다양한 인물들이 들어있을까. 이렇게 절묘한 상황을 만들어 낼 수 있을까. 비슷한 주제를 전하는 것 같은데 이렇게 다른 말을 하기도 하는걸까. 등등의 느낌. 푸슈킨의 작품들도 그랬다. 벨킨이야기는 이제 고인이 된 벨킨이 쓴 것이며 모든 작품들에는 실재하는 주인공이 있다고 말하고 있지만 그것부터가 소설의 시작이니 모두 믿을만한 것은 아니다. 하지만 이런 장치는 단편들에 등장하는 인물들이 왠지 실재하는 인물일것만같은 현실감이 들도록 하는데 기여한다. 이들의 이야기는 시간을 뛰어넘어가며 진행된다. <발사>의 실비오는 현재로 시작하지만 과거의 사건을 깊이 간직한 인물이며, 이 과거의 사건은 미래의 실비오에게 영향을 미친다. 화자는 그러니까 과거의 사건에 얽매여있으며 미래의 사건을 준비하는 현재의 실비오를 잠깐 관찰한 인물에 불과하다. 그래서 화자가 그리는 실비오는 그의 진실된 모습이 아닐 수밖에 없다. 그의 진정한 모습은 질투심 때문에 잘못된 결투를 신청해버린. 그리고도 그 결투의 결과를 떨치지 못하는 과거에 사로잡힌 인물일 뿐이다. 화자에게 그토록 호방해보였던 인물이 사실은 그다지 호탕하지 못하다는 것은 아이러니가 아닌가. <눈보라>에서도 사건은 해를 넘어가며 진행된다. 중간의 빈 공간을 독자들이 채워넣기에는 우연이 강하기 때문에 왜 마랴가 드러누웠는지 또 어째서 블라지미르는 그렇게 냉정해졌는지 이해할 수 없다. 그래도 다행인 것은 작가가 가여운 이 여인을 외면하지 않았다는 것일까. <역참지기>에서도 역시 늙은 역참지기의 현재로 시작해서 미래의 일로 끝난다. 그의 미래를 궁금해하는 화자와 독자의 시선은 서서히 일치된다. 어째서 잠깐 동안 그는 늙어버렸을까. 그의 딸은 어떻게 지내고 있을까. 결국 그녀는 돌아올 것인가. 늙은 아버지를 두고 떠났던 딸의 미래와 그 딸을 기다리던 늙은 아버지의 모습이 그래서 조금은 아쉬웠다. 그러고보면 단편들에서 푸슈킨은 선과 악을 명확하게 구분하지 않는 것 같으면서도 은근히 선량함을 긍정하고 악의성을 처벌하는 입장을 고수하는 것 아닌가하는 생각이 들었다. 단편들의 주인공은 그 위치가 어떻든간에 악의적인 사람의 결말을 비참하게 그리고 있다. <스페이드 여왕>의 게르만은 가장 비참한 최후를 맞는 인물인데, 그는 처음부터 끝까지 악의를 띄고 있다. 담담히 서술되어 있기는 하지만 그가 실행한 행동들은 악질적이기까지하다. 불쌍하고 가련한 양녀를 이용해 노파의 방까지 침입한데다 노파가 죽은 뒤에도 가책같은 것은 느끼지 않는다. 한때 절제와 근면이 자신의 성공카드라고 되뇌었던 인물이라고는 전혀 생각되지 않는 모습이다. 정신병원에서 끝없이 여왕을 마지막으로 외치는 그의 결말과 달리 제법 재력있는 인물과 결혼하게 된 리자베타를 보여주는 것은 그때문이리라. 선은 결국 승리하더라는. 그렇다고 권선징악만으로 이 소설들을 읽어낼 수는 없다. 다양한 인물들의 다양한 감정선이 그리고 자연스러운 욕망과 인연의 얽힘이 소설의 씨줄과 날줄을 이루고 있기 때문이다. 그의 이야기에 빠져들면 한동안은 머릿속에서 그들이 춤을 추며 다음 이야기를 들려주겠다고 속삭이는 꿈을 꾸게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