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타리나 블룸의 잃어버린 명예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180
하인리히 뵐 지음, 김연수 옮김 / 민음사 / 2008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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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젊은 여자가 즐거운 기분으로 쾌활하게 전혀 위험하지 않은 댄스파티에 갔었는데, 나흘 후에 그녀는 - 여기서는 선고를 내리는 것이 아니라 단지 보고만 해야 하기 때문에, 사실의 보고에 그쳐야 한다. - 살인자가 된다.
 
페이지 : 136쪽  

하인리히 뵐은 이 작품을 '소설'이 아니라 '이야기'라고 말하고 싶어했다. 후기를 쓰면서까지 그가 이것이 '이야기 아니 그를 넘어 선 '팜플렛'이라고까지 말한 이유는 이 작품이 현실에 그 뿌리를 굳게 박고 있기 때문이다. 그는 실제로 한 언론지를 언급하면서 그와 관련이 전혀 없다고 말하고 있지만, 이는 거의 반어적표현으로 보인다. 그러니까 당신의 잡지 이야기요. 라고 말하고 있는 듯 하다는 것이다.

사랑의 아이러니함

어느 젊은 여자 - 카타리나 블룸 - 은 파티에서 위험한 남자를 만나게 되고, 또 사랑하게 되었다. 그녀 스스로가 누군지도 모르는 남자를 파티에 데려오는 것은 위험하다고 말했음에도 불구하고 그녀 자신도 성분이 모호한 남성을 사랑하게 되어버린 것이다. 사랑이라는 것이 얼마나 아이러니 한 것인지! 이성적으로 그녀는 이 강도범을 사랑하지 말았어야 했다. 그녀의 깔끔한 성적 취향을 생각한다면 더더욱. 그러나 그녀는 괴텐의 다정함에 빠져버리고야 말았다. 그리고 그녀가 가진 최대한의 노력을 다해 그를 도망치도록 도와주고 숨겨주기까지 한다. 하지만 그녀가 그렇게 했다고 해서 그의 범죄가 아무렇지도 않았던 것은 아니었다. 근본적으로 그녀는 범죄자형의 인물이 아니었다.

괴텐이 체포되어서 그녀는 오히려 마음이 놓이는 듯 보였다. 이제 그는 더 이상 어리석은 짓을 할 수 없을 거라고 그녀가 말했다. 바이츠메네라는 자가 무시무시하게 느껴져 계속 두려워하고 있었다고도 했다.
 
페이지 : 114쪽  


폭력은 어떻게 발생하는가

소설의 부제는 폭력의 발생과 그 결과에 대해 말하고 있다. 이토록 평범하고 소박한 그녀가 - 그녀가 고급 가정부로서 일을 했던 집에서는 어디서나 그녀에 대해 끊임없는 칭찬을 늘어놓았다. 이 정도면 소박하면서 뛰어난 그녀가 라고 말해야 할 것 같다. - 살인지가 되도록 만든 원천. 그것은 바로 언론이었다. 그녀의 행동과 관계없이 언론은 놀라운 그들의 재간으로 그녀의 주변을 샅샅이 캐고 다녔고 그녀의 인생을 짓밟았다. 그녀 주변 인물들의 긍정적인 발언은 모두 왜곡되었고, 아무런 근거도 없는 게다가 그녀의 인생에 어떠한 영향도 미친 적이 없는 인물의 부정적인 발언은 그대로 체택되었다. 더 나아가 그 기사를 쓴 기자 - 그덕분에 피해자가 된 - 퇴트게스는 면회가 허락되지 않은 암투병중인 엄마를 찾아가 충격을 주기도 했다. - 물론 이것도 사실이라고 믿을 수조차 없지만 - 이렇게 복잡한 과정을 모두 통과한 그녀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참고 견뎌낸 그녀가 마지막으로 방아쇠를 당긴 이유는 복잡한 사건에 비하면 얼마나 간단한지 모른다. 

그렇지만 이자는 '섹스나 한탕 하자'고 했고, 그래서 난 생각했던 겁니다. 좋다, 지금 총으로 탕탕 쏘아 주마.
 
페이지 : 141쪽  

그러나 생각해보면 간단한 문제가 아니다. 퇴트게스는 그녀에 대해 숱한 기사를 썼지만 직접 인터뷰를 하기로 한 건 처음이었다. 때문에 카타리나는 그를 미리 만나보기 위해 그가 다닌다는 술집에서 기다리기까지 했다. 그러나 그는 달랐다. 그는 이미 그녀에 대한 모든 판단을 끝낸 뒤었던 것이다. 그에게 그녀는 자신에게 진실을 말해줄 인터뷰 대상자가 아니었다. 그가 기사에 적은대로 '공산당원의 창녀'였다. 그래서 그는 그렇게 말했고, 그 말에 대한 책임을 져야 했다. 

펜으로 사람을 죽일 수 있다는 것은 이미 경험한 바다. 과거에는 언론이 그랬고, 현재는 매우 위험하게도 모두가 그럴 수 있는 힘을 갖게 되었다. 이 칼날이 퇴트게스의 경우처럼 자신에게 돌아올 수도 있다는 것을 심각하게 생각해 보아야 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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빌헬름 마이스터의 수업시대 1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23
요한 볼프강 폰 괴테 지음, 안삼환 옮김 / 민음사 / 1999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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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을 읽고 그의 '젊음'이 그를 죽음으로 몰아넣었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젊다는 것, 감수성이 예민하다는 것, 사랑이 심장의 전부를 차지하도록 둘 수 있는 정열이 있다는 것. 그것이 그의 자살이유라고 생각했다. 한편 그의 성실하고도 현실적인 친구 빌헬름을 기억하는지? 빌헬름이 물론 이번 소설의 주인공과 동일인물은 아니라고 할지라도 꽤나 유사하다고 느끼는 것은 이번 소설에서 빌헬름이 젊음을 토대로 사랑의 상처를 보듬어가면서 현실과 타협하면서 자신의 재능을 펼치면서 제법 세상을 적절하게 살아가는 모습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1장에서의 빌헬름은 그야말로 베르테르와도 같다. 그는 순진하고도 순수한 열정으로 그의 첫사랑 마리아네에게 순정을 바쳤으며, 마치 베르테르가 로테를 자신과 동일한 인물로 여겼던 것처럼 그의 여인 마리아네를 자기와 한몸으로 여기고 사랑한다. 그러나 그의 사랑을 받는 마리아네는 그처럼 순수한 열정만으로 살아갈 수 있는 여인이 아니었다. 그녀는 그와는 사랑을했고, 그리고 젊은 상인 노어베르크와는 생활을 했다. 이렇게 첫사랑에 실패한 그는 상인으로서의 자신의 역할에 충실하기 위해 아버지가 시키신 업무차 여행을 떠나게 되고 다음 2장에서 5장은 그 여행 중 일어나는 그의 연극담이라고 해야할 것이다. 

겉보기에는 빌헬름의 사랑여정으로 보이는 줄거리이지만 자세히 들여다보면 괴테의 연극과 희곡, 소설, 시 등 문학 전반에 대한 의견이 80프로 이상이다. 그의 문학관의 총체라고 볼 수 있을 정도이다. 특히나 5장의 마지막 부분 - 야르고를 통해 세익스피어를 처음 접하고 햄릿에 푹 빠진 빌헬름이 이 희곡을 상연하기 위해서 극단운영자이자 친구인 제를로와 토론하는 장면 - 에 이르면 한 편의 햄릿 해설서를 읽는 것 같은 느낌이 들 정도이다. 그는 작품에 등장하는 인물 하나하나를 정확하고 세심하게 파악하고 있었으며 인물의 성격이 인물이 처한 상황과 어떻게 관계맺고 있는지를 명확하게 지적할 줄 알았다. 햄릿을 옆에 놓고 읽는다면 더 좋았겠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정말이지, 시인이란 완전히 자기 자신을 위해, 전적으로 자기가 사랑하는 대상들 속에서 살지 않으면 안 돼. 하늘로부터 더할 나위 없이 귀중한 내면적 천분을 부여받아 끊임없이 스스로 불어나는 보물을 가슴 속에 간직하고 있는 시인은 부자가 자기 주변에 수많은 재화를 쌓아놓고 갖은 애를 써도 얻을 수 없는 안온한 행복감 속에서 외적으로도 아무런 방해를 받지 않고 자신의 보물들과 더불어 살아가야 해.
 
페이지 : 126쪽  

이 대사는 빌헬름과는 달리 뼛속부터 상인의 피가 흐르는 친구 베르너가 글 쓰는 것을 취미로 하다가 보면 언젠가 좋은 작품도 나오지 않겠느냐고 말하자 이에 반박하면서 하는 말이다. 글을 쓰는 일에 대해 괴테가 가지고 있는 생각을 극명하게 보여준다. 그는 글 쓰는 일에 자기의 온 존재를 바쳐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그 말은 지금도 글 쓰는 사람들에게는 지극히 당연한 말일 것이다. 문제는 그렇게 살 수만은 없다는 데에 있겠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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빌헬름 마이스터의 수업시대 2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24
요한 볼프강 폰 괴테 지음, 안삼환 옮김 / 민음사 / 1999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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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편소설이 1권과 2권으로 나뉘어 쓰였을 때에는 1권과 2권을 하나의 책으로 인식하고 읽어내려가게 된다. 그러나 빌헬름 마이스터의 수업시대는 1권과 2권의 성격이 전혀 다르다고 느낄 정도로 내용과 표현 의도가 달라서 마치 다른 소설을 읽고 있는 것만 같았다. 1권은 애초에 <빌헬름 마이스터의 연극적 사명>이라는 구상으로 1777년에 시작되었다가 완성된 1794년에는 2권과 함께 <빌헬름 마이스터의 수업시대>가 되었기 때문으로 보인다. 그래서 1권은 연극과 예술에 대한 다양한 의견과 괴테의 문학적 열정을 느끼면서 읽을 수 있었던 반면에, 2권은 빌헬름이 인생을 배우는 과정으로서 종교에 대해, 인생에 대해 교훈을 주는 잠언들로 가득차 있어 그런 종류의 글을 즐기지 않는 나에게는 꽤나 고역인 글이 되어버렸다. 

여러 종류의 잠언들과, 본래 6권의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어느 아름다운 영혼의 고백>이라는 종교적 수기를 제외해 버리고 나면 2권의 줄거리는 대개 1권에서 다 풀어놓지 못한 인물들의 관계를 정리하고 해명하는 데에 사용되었다. 최초에 빌헬름이 아닌 다른 남자의 여인으로 느껴졌던 마리아네는 빌헬름의 아들 펠릭스를 낳고 그에게 정절을 지키고자 노력하였으며, 아이를 낳고 얼마 후에 죽게 되었다는 것. 그가 상처를 입었을 때에 돌봐주었던 '아마존'여인은 그가 연극하던 때에 만났던 백작부인의 언니이자 필리네를 따라다니던 프리드리히의 누나이고, 로타리오 남작의 동생이었다는 것 등. 그리고 그는 그동안 알게 모르게 만나왔던 인물들 중에서 신부가 중심이 된 <탑>의 모임에 입회한 후 그동안 자신의 삶은 인생에 대해 깨달음을 얻기 위한 수행과정이었다는 것을 알게 된다. 그에게 때로는 냉정한 충고를 아끼지 않았던 야르노가 그와 같은 수업시대 두루마리를 가진 <탑>의 일원이라는 것은 그의 약간은 비밀스러운 인물됨을 생각해 볼때, 제법 그럴싸하다. 

그래도 괴테는 예술을 사랑한 젊은 시절을 완전히 배반해버리지는 않았다. 그는 상인기질을 가진 베르너와 빌헬름이 다시 만나게 되었을 때 이 두 사람의 외형이며 내면을 비교하여 제시하는데, 마치 빌헬름이 청년시절에 그렸던 상인의 여신과 예술의 여신을 떠올리게 했다. 그는 예술을 통해 단련되고 성장한 인물이 더더욱 크게 될 수 있으며 이것이 시간을 지체하는 듯 보일지라도 그의 성품을 기르는 데에 오히려 유익하다고 말하고 있다. 

또한 빌헬름이 '나탈리에'라는 완전한 <행복>의 상징. 그의 진정한 <사랑>을 만나게 된 것을 계기로 우리가 사랑이라고 착각하는 여러 감정들에 대해 빌헬름의 독백을 통해 보여주고 있기도 하다. 그리고 아우렐리에를 사랑하지도 않으면서 착각하게 만들었던 로타리오를 그토록 비난했었지만, 그 역시 테레제에게 그와 비슷한 착각을 했다는 것을 생각해 볼 수 있다. 우리의 감정은 밖에서 보면 객관적이고 이성적으로 검토할 수 있지만 내부로 들어오면 이렇게 비논리적인 것이다.


인간이 온 힘을 다하여 사랑할 수 있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이렇게 나는 마리안를 사랑했고, 그 여자한테 그토록 무서운 오해를 했다. 필리네를 사랑했으나 그녀를 멸시하지 않을 수 없었다. 아우레리에를 존중할 수는 있었으나 사랑할 수는 없었다. 테레제를 존경했으나 실은 펠릭스에 대한 부정이 그녀에 대한 애정의 모습을 띤 것이었다.
 
페이지 : 360쪽  


빌헬름의 수업시대만큼이나 우리는 하나의 수업시대를 거치고 있다. 그는 예술과 사랑을 통해 단련되었고, 괴테는 그의 삶을 행복으로 이끌어주었다. 우리의 수업시대는 무엇으로 이루어졌을까. 또 우리의 결국을 어디로 인도해 주게 될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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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후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87
나쓰메 소세키 지음, 윤상인 옮김 / 민음사 / 2003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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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각관계를 다룬 소설이라고는 하지만 본격적으로 삼각관계가 문제가 되는 것은 거의 소설이 끝나갈 무렵이라고 봐야 할 것 같다. 그 이전은 주인공 다이스케의 내면이 자신의 감정을 인지하고 그 감정에 충실하기로 결심하는 일련의 과정들이다. 나는 다이스케에게서 끊임없이 이상의 <날개> 주인공을 떠올렸다. 둘 다 사회에 대한 부정적인 인식을 바탕으로 한 게으름뱅이들이었으니까. 모두 지식인이었으나 무능력했고, 자의식과 감각은 너무도 예민해서 다른 이들은 느끼지 못하는 것들을 느낌으로 인해 고통스러워했다. 다이스케는 그것을 치러내고 그덕에 유유자적하게 보이는 생활을 하고 있는 것이라고까지 생각한다. 


다이스케의 신경은 그만이 가지고 있는 빈틈없는 사고력과 예민한 감수성에 대해 지불해야 할 세금이다. 고상한 교육을 받은 대상으로서의 고통이다 그것은 좋은 가문에서 태어난 탓에 받아야 하는 불문의 형벌이다. 그러한 희생을 감수했기에 자신은 지금의 자신이 될 수 있었다. 아니, 어떤 때는 그러한 희생그 자체에 인생의 진정한 의의가 있다고 생각하기도 한다.
 
페이지 : 16-17쪽  


둘의 다른점이 있다면 생활의 비참함의 정도일 것이다. 하나는 생활의 어려움을 느끼지 않았으나 다른 하나는 생활을 하기 위해 기생에게 기생해야하는 처지였다. 전자의 무능력이 고상한 교양으로 치장될 수 있었던 것은 생활의 여유덕분이었다. 그래서 더더욱 후자의 무능력이 안타까웠던 기억을 더듬으며 왠지 다이스케는 풍요로운 가운데 어리광을 부리는 인물처럼 보이기까지 했다. 아무래도 문학쪽에서는 사회적 아픔이 많았던 민족이 승자가 아니겠나 하는 생각까지도 들었다. 

아무튼 다이스케는 실업자이면서 '선생님'소리를 들으며 제법 어려움 없는 생활을 하고 있다. 그는 자신의 집에서 기거하고 있는 '서생' 가도노가 자신의 의견도 제대로 말하지 않고 남의 의견도 그다지 진지하게 듣지 않는 면이 있다고 꼬집고 있지만 본가에 가서 주변 어른들을 대하는 그의 태도를 살펴보면 가도노의 그것과 크게 다르지 않음을 알 수 있다. 그의 형수 우메코는 그에게 그것이 가족 모두를 무시하기 때문이 아니냐고 지적한다. 

하지만 그렇게 훌륭한 분이 어째서 나 같은 사람에게 돈을 빌릴 필요가 있는 거죠? 이상하지 않아요? 아니, 말꼬리를 잡아 비꼰다고 생각하면 화가 나시겠지만, 그렇지 않아요. 그 정도로 훌륭한 분이라도 돈이 없으면 나 같은 사람에게 머릴를 숙이지 않으면 안 되는 거예요.
 
페이지 : 121쪽  

이렇게 냉혹한 현실을 일러주어도 그는 자신의 생활태도를 바꿀 생각을 하지 않는다. 그에게 있어 빵을 위한 일은 진정한 노동이 아니기 때문이다. 돈때문에 일을 하게 되면 자기 직업의 본질을 잃게 된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자신은 돈이 있기 때문에 또한 직업을 가질 필요도 없다. 형수의 지적에는 화가 날 만한 요소가 분명히 있음에도 그는 화를 내지 않는다. 이상하리만치 다이스케는 화를 내는 일이 없다. 어떤 말에도, 어떤 행동에도. 그는 그것을 겁쟁이이기 때문이라고 비하하고 있지만 사실은 그가 굉장한 중립적 사고를 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는 어느 사람의 입장도 이해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래서 그를 결혼시키기 위해 집안 식구들 모두 그를 교묘하게 꾀어내거나 속여도, 또 자신의 정략결혼시켜 사업상 안정을 추구하려고 했다는 부친의 말에도 그는 전혀 노여움을 느끼지 않는다. 오히려 자신이 생각했던 그런 인물들임을 확인하고 안심한다. 


하지만 그 주된 원인은 약삭빨라서도  우유부단해서도 아니고 오히려 그가 융통성 있는 두 개의 눈을 가지고 있어서 두 가지를 동시에 볼 수가 있기 때문이었다. 그는 바로 그 능력 때문에 이제까지 외곬으로 돌진하려는 용기를 상실하곤 했다. 그래서 다가가지도 물러나지도 않은 채 그대로 현상에 머물러 있는 경우가 많았다. 그렇게 현상을 유지하려는 그의 태도가 생각이 부족해서가 아니라 오히려 명백한 판단에 의한 것이라는 사실은, 그가 평소에는 생각조차 할 수 없는 과감한 태도로 신념을 밀고 나갈 때 비로소 자각할 수 있었다.
 
페이지 : 304쪽  
친구 히라오카의 아내 미치요. 다이스케는 히라오카와 미치요가 결혼하도록 중간에서 다리역할을 한 장본인이었다. 그는 당시에 자신의 본성을 거슬렀다. 미치요를 사랑하는 마음을 부정하고 그녀를 히라오카에게 보낸 것이다. 미치요도 이에 대해 분명히 인지하고 있었음은 미치요와 다이스케의 대화를 통해 알 수 있다. 그녀는 그에게 왜 자신을 버렸느냐고 말했다. 그것은 한 때 자신을 품었기 때문에 가능한 말이다. 그리고 그 댓가로 다이스케는 혹독한 사회에 내던져지게 될 것이다. 친구도 가족도 외면한 가운데 오로지 미치요 한 사람만을 데리고 풍랑을 향해가는 그에게는 각성을 요구하는 빨간 색조들만이 가득하게 번지고 있다. 

양산집 간판에 빨간 양산 네 개가 겹쳐진 채 높이 매달려 있었다. 양산 색깔이 또 다이스케의 머리로 들어와 뱅글뱅글 소용돌이를 쳤다. 네거리에 새빨간 색의 커다란 풍선을 팔고 있는 사람이 있었다...<중략>... 나중에는 세상이 온통 새빨개졌다. 그리고 다이스케의 머릿속을 중심으로 해서 뱅글뱅글 불길을 내뿜으며 회전했다.
 
페이지 : 35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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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탈로니아 찬가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46
조지 오웰 지음, 정영목 옮김 / 민음사 / 2001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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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지 오웰이라는 작가이름을 제외하고는 작품에 대해 아무런 정보를 갖지 못한 채로 읽기 시작했다.  작품이 소설이 아니라 다큐멘터리라는 것은 작품을 읽으면서 자각했다기 보다는 작품을 다 읽고난 후 옮긴이의 말을 읽으면서 아항. 이거 다큐멘터리구나 라고 생각했다고나 할까. 읽으면서는 오히려 일기의 느낌을 많이 받았는데, 실제로 그의 일기를 읽을 수 있다면 그것도 꽤 재미있지 않을까 생각했다. 누가 영국인들에게 유머가 부족하다고 했는지 모르겠다. 그는 전쟁통에도 이토록 유머가 넘쳐났건만!

오웰이 스페인 전쟁에 참가한 이유는 확실하게 나와있지 않다. 단지 그가 반 파시스트라는 것은 확실하다. 그는 스페인 내부의 정당이 어떤 기조로 어떻게 움직이고 있는지는 관심이 없었다. 다만 어디에 속하든지 파시스트들에게 대항할 수 있다면. 프랑코의 반란을 몰아낼 수 있다면 전선의 선두에 나서겠다는 열의가 있었다. 실제로 그는 작전 수행에 있어서 가장 전면에 나섰다. 물론 의용군부대의 평균연령이 매우 어린 탓도 있겠지만. 적진의 참호를 공격할 때나 실종 병사를 찾아 수색할 때에 그는 늘 '자원'했다. 그러나 자신이 죽음을 불사할 정도로 용기있다고는 말하지 않았다. 그는 오히려 총알이 어디에 들어와 박힐지 몰라서 느꼈던 공포를 이야기하고, 땔감이 없어 추운 밤을 보내던 기억의 고통스러움을 이야기했다. 그가 무척이나 자세하게 그의 경험을 이야기해 주었기 때문에 나는 글을 읽으면서 나도 그와 동일한 장소에서 이가 듥끓고 진흙이 여기저기 묻어 움직이기도 불편한 상태가 된 것처럼 느꼈다. 

의용군으로 전쟁에 참전하기 위해 스페인에 도착했을 때 오웰이 본 광경은 그를 크게 고무시킨다. 그는 평등한 사회에 가까운 모습을 보았던 것이다. 모두가 프롤레타리아처럼 보였다. 사람들은 서로에게 존칭을 쓰지도 않았고, 종업원도 손님에게 지나친 아부를 하거나 격식을 갖춘 예법을 지키지 않았다. 전쟁에 참전하는 군인들에게는 명령체계는 있었으나 계급에 따른 차별은 없었다. 상사에게 자신의 의견을 당당하게 이야기할 수 있었고, 논리적인 납득과 이해를 통해 군대는 움직이고 있었다. 시간이 걸리는 일이었지만 분명 그것은 유용한 사회체계였다고 오웰은 분석한다. 나중에 의용군들이 효과적으로 저항하지 못한 것은 그러한 평등적 체제 때문이었다고 비난하는 데 대해 그는 그것은 훈련과 무기 부족 때문이었으며, 신병 부대란 원래 규율이 잡혀있지 않은 법이라고 해명했다.


실제로는 민주적이고 <혁명적>인 규율은 예상했던 것보다 믿을 만했다. 이론적으로 따지자면, 노동자들의 군대에서 규율은 자발적인 것이다. 이들의 규율은 계급에 대한 충성에 기초한다. 반면 부르주아 징집병 부대의 규율은 궁극적으로 공포에 기초를 둔다.
 
페이지 : 41-42쪽  

그는 이 혁명적인 군대에 적응해갔다. 왜 명령에 복종해야 하는지 이해한 후에 정치적인 의식을 갖게 된 의용군들은 비록 무기가 없고, 끊임없는 추위와 싸워야했지만 병영을 이탈하지 않았다. 오웰은 더 치열한 전투 현장에 참여할 수 있게 되기를 바랐다. 그러나 그는 휴가때 바르셀로나에 돌아왔다가 시가전을 보게 된다. 그리고 점점 스페인의 반 프랑코 전쟁에서 승리하기 위해 필요한 내부결속이 무너지고 있다는 것을 깨닫는다. 전쟁은 타락해가기 시작했다.


사실 모든 전쟁은 진행되는 과정에서 점차 타락해 간다.
 
페이지 : 232쪽  

반란군 프랑코와의 전쟁도 타락해 갔다. 외부에 적이 있을 때에 내부의 분열은 치명적이다. 그러나 눈 앞의 이익과 권력에 사람들은 이성적인 판단을 유보시키는 법이다. 공산주의자들도 그랬다. 그들은 그 와중에 권력을 잡고자했으며 정부는 외부세력- 러시아-의 지원을 유지시키기 위해 그들 편을 들어주어야 했다. 시가전의 시작은 경찰조직이었으며 그 배후는 사회당과 공산주의자들이었다. 그러나 노동연맹의 세는 컸고 통일노동당의 세는 약했다. 희생자가 필요했고 그 희생제물은 오웰이 참여한 부대의 소속 당이었던 통일노동당이었다. 순식간에 통일노동당은 불법 단체가 되고 수많은 사람들이 잡혀가기 시작한다. 처음에는 헤프닝으로 생각했던 검거가 총살로 이어졌다. 바르셀로나 시가전의 비극은 시가전 그 자체가 아니라 이후의 희생 제물들에 있었다. 이들은 전쟁을 위해 자신의 모든 것을 희생했다. 대가는 감옥, 아니면 총살이었다. 오웰이 카탈로니아 찬가를 쓰게 된 가장 분명한 이유는 여기에 있었다. 그의 친한 친구. 그리고 바르셀로나 시가전에서 영웅적 행동으로 많은 이들의 죽음을 막았던 노동당 위원장 '콥'의 체포에 대해 그는 화가 났다고 분명히 이야기한다.


나는 그와 함께 총알이 빗발치는 곳을 뛰어 다녔다. 나는 그가 살아온 나들을 잘 알고 있다. 그는 파시스트와 ㅅ싸우기 위해 가족, 국적, 생계 등 모든 것을 희생하고 스페인에 온 사람이었다. <중략> 5월 시가전 동안 내가 직접 보았듯이, 자기 지역에서 전투가 벌어지는 것을 막았으며, 그 덕분에 열 내지 스무 명의 생명을 구했다. 그런데 그 보답이란 것이 고작 그를 감옥에 처넣는 일이라니.
 
페이지 : 268-269쪽  

이후 그는 평등이 실현된 것처럼 보였던 스페인의 변화를 우울한 눈으로 지켜본다. 다시 브르주아들이 눈에 띄기 시작했을 뿐 아니라 자신도 부르주아처럼 움직여야 의심받지 않았다. 종업원들은 풀먹인 칼라로 된 옷을 입고 다시 아부와 격식을 차린 예법을 지키기 시작했다. 혁명은 순식간에 그 이전으로 돌아갔다. 그 역시 통일노동당 산하 부대에 있었다는 이유로 체포될 위기였다. 콥의 구명을 위해 노력했음에도 그는 다시 영국으로 돌아가기 전에 콥을 구해내지 못했다. 그리고 프랑코는 승리했다. 비극적 실화의 끝이었다. 

책을 읽으면서 내내 동물농장이 떠올랐다. 복서가 동물들이 농장에서 인간을 몰아낼 때 얼마나 많은 공을 세웠는지! 그리고 그가 얼마나 단순하게 끌려가 간단하게 처형당해버렸는지! 그리고 혁명이 성공했다고 여기는 순간. 정치권력이 어떻게 사회를 다시 이전의 상태로 회귀시키는지. 민주적 사회주의의 실현을 꿈꿨던 그에게 카탈로니아에서의 경험은 가슴벅찬 것이면서 미치도록 서글픈 현실에 대한 깨달음이었을 것이다. 그리고 그의 이후 작품 세계에 엄청난 자양분이었이 되었다. 

할아버지의 옛날 이야기를 듣듯이 - 어휘면에서 약간의 어려움은 있었지만 - 읽을 수 있었던 작품이었다. 이미 70년도 전에 일어났던 정치적인 사건들에 대해 자세하고도 생생한 보고를 들을 수 있었다. 그 스스로 어떤 정치적인 장들은 1-2년 후에는 의미없는 글이 될 것이라고 말했지만, 오히려 70년이 지난 지금 진지한 증언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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