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문학의 창으로 본 과학 - 인문학자 10명이 푼 유쾌한 과학 이야기
김용석.공지영.이진경 외 지음 / 한겨레출판 / 2006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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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학'을 마지막으로 공부한지 벌써 20년이 다 되어간다. 수능을 보기 위해 과학을 공부한 문과생이었기 때문에 졸업한 후에는 과학과 관련한 공부를 할 필요가 거의 없었기 때문이다. 책을 많이 읽어야 했지만, '과학' 관련해서 읽어야 할 책은 없었다. 생각보다 '수학'을 접해야 할 때는 있었는데, '과학'은 멀었다.

 

뉴스에서나 기사에서 우리는 놀라운 '과학'의 발전을 본다. 인문에 좀 더 가까운 사람으로서 때로는 흠칫. 하는 느낌이 들 때도 있다. 우리 이러다가 정말 기계시대같은게 오는 건 아닐까. 과학의 이기를 추구하다가 그 거대한 반작용에 휩쓸리게 되는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

 

물론 그런 두려움 때문에 읽기 시작한 책은 아니다. 다만 과학이 어떻게 인문학자들에게 이해되었는지를 읽어보고 싶었다. 그들 사이의 접점은 무엇이며, 과학자들은 그들 나름의 과학적 철학을 갖고 있을테니 그것도 한번 들어보고 싶었다.

 

그렇기 때문에 이 책에서 과학적 지식을 기대한다면 그건 좀 어려울 듯 싶다. 물론 배경지식을 넓혀주기 위한 페이지가 마련되어 있기는 하다. 하지만 그뿐이다. 다만 과학이나 수학에 무관심했을법한 인문학자들이 과학자의 실험실에 들어가 그들의 연구를 보면서 나눈 사유를 읽는 것은 제법 재미있다. 그리고 모든 학문이 각자 분화 발전하고 어느 순간 서로 만나지 못하는 정도에 이르렀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학문의 기초에 흐르는 동질감을 확인하는 것도 즐거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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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인자의 기억법
김영하 지음 / 문학동네 / 2013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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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하의 소설은 굳이 골라 읽은 것이 아닌데도 세 권 정도 읽었다. '오빠가 돌아왔다.' , '아랑은 왜', '퀴즈쇼' . 이중에서 '오빠가 돌아왔다'를 제외하고는 몽롱한 상태의 글을 읽는 듯한 느낌이었다. 이 세상의 이야기지만 이 세상의 이야기가 아니었던 것 같은. 현실을 이야기하는 것인데, 현실이 아닌 것 같은 느낌. 매번 약간의 혼란을 느꼈던 것 같다. 그런데 이 소설의 말미에 작가의 글을 읽으면서 알게되었다. 김영하의 소설은 그가 여행했던 다른 '세계'였다는 것을. 아하. 그래서 나는 늘 낯선 세상에 떨어진 것 같은 혼란스러움을 느꼈던 것이구나. 타고난 길치가 길잡이를 따라 길을 따라 들어갔다가 어느 순간 서서 자기 자리를 돌아보니 전혀 엉뚱한 곳인 그런 느낌어었던 것이구나. 나는 실제로도 길치니까.

 

아무튼. 살인자의 기억법은 그중에서도 최고봉이라 할 수 있다. 이제 세계는 사라지고 어느 살인자의 기억만 남아있다. 그런데 심지어 이 기억은 도저히 신뢰가 가질 않는다. 기억은 때로 서술자 자신에 의해서, 외부 사람들에 의해서 부정된다. 그런데 더 어처구니 없는 것은 서술자가 그 자신이니 이 부정된 기억마저도 진정한 부정인지 알 수 없다는 것이다.

 

'개'에 대한 기억이 대표적이다. 그는 처음에 남의 개가 들어온다고 했으나 그것을 딸이 부정한다. 그리고 나서 그가 개의 존재를 언급하자 다시 딸은 그것을 부정한다. 그리고 이후에 그는 안형사에게 개의 존재를 부정한다. 오히려 치매를 앓는 노인의 행동이 보다 논리적이다. 그는 딸의 부정을 그대로 따르고 있다. 그러나 이 입장에서라면 딸의 부정이 오히려 이상하다. 우리는 이렇게 앞뒤가 안 맞는 시선으로 이 소설을 이해해야만 한다. 이토록 사소한 것이 엇갈리는 속에서 진실은 어디에 있는가. 과연 그 '개'는 누구의 개인가. 주인없는 개라는 동네 사람들의 말이 진실인가 아니면 무의식적으로 '주인들'을 찾는 서술자 '나'의 말이 진실인가.

 

이 책은 살인자의 기록이라기보다는 치매를 앓으며 기억을 잃어가는 노인의 기록이다. 치매의 진행이 그렇듯, 초반의 기록은 꽤나 구체적이고 자세하다가 점점 끊어지고, 부정되기 시작한다. 그리고 나중에는 처음의 모든 것이 부정되어버린다. 그렇다면 그가 살인자라는 그의 처음 기록 역시 믿을 수 없게 된다. 소설은 그가 치매 진단을 받는 것으로 시작되며, 의사는 어느 정도의 진행인지도 알 수 없다고 한다. 그렇다면 그가 살인을 했다는 기억 역시 믿을 수 없다. 연쇄살인의 등장은 그의 기억과 상상이 맞물린 곳에서 탄생했을지 모른다.  지프차를 만난 그 때 그가 김주태를 '자신'이라고 의식했던 것은 한때 지프차에 시체를 싣고 다녔던 그의 기억었을 수도, 다시 살인을 시작한 '자신'을 바라보던 '자기'에 대한 기록이었을 수도 있다. 모든 것을 의심하게 되는 순간 모든 가능성이 열리기 시작한다. 그가 몸을 움직일 수 없는 상태에서 겪었다는 '평범한 삶'이 그의 젊은 시절이었을 수도 있다. 상상이라고 생각했지만 그것이 현실이었고, 현실이라고 생각한 살인자의 삶이 상상이었을수도. 아니 더 나아가서 이 소설에 존재하는 사람들과 대사들은 모두 방 구석에서 기억을 잃은 노인이 킬킬대며 주절거리는 농담일수도 있다. 작가는 어쩌자로 이런 세계에 발을 들여 놓았을까.

 

'악보를 남기지 않는 작곡가도 어딘가엔 있겠지. 절륜한 무예를 아무에게도 전수하지 않고 제 몸 하나 지키다 죽은 강호의 고수도 있었을 것이다.' p.116

 

가끔 나 역시 상상한다. 엄청 뛰어난 어떤 것들이 아무 손도 타지 않은 채 사라져버렸을지도 모른다고. 이 엄청난 소설 역시 그런 가능성중의 하나이다. 아무도 알아들을 수 없는 말을 하는 누군가의 머릿속에 대단한 어떤 사실이 존재할지도 모른다고. 그러나 모든 것은 '공'으로 돌아가버릴 뿐이라고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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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된 미래, 전통육아의 비밀
EBS <오래된 미래 전통육아의 비밀> 제작팀.김광호.조미진 지음 / 라이온북스 / 2012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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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육아는 감성적이고 본능적인 거예요. 그런데 요즘 사람들은 지능적으로만 하려고 해요. 육아는 자신의 감성과 내면의 관계를 이해해야 해요. 아기가 울면 기분이 어떤가요? 분명 안아주고 싶을 거예요. 그런데 왜 그렇게 하지않죠? 어서 안아주세요. 안아줘도 괜찮아요."

pp.202-203

 

둘째 아이를 키우면서 집에 있다보니 보게 되었던 다큐멘터리가 책으로 나왔다. 포대기에서 시작해서 단동십훈까지. 다큐멘터리를 보면서 아이를 편안하게 키우는 방법은 우리 전통적인 육아방식에 있다고 하는 사실을 알게되었고 훨씬 마음이 편안해졌다. 첫아이를 키우기 위해 여러 육아서적을 뒤지다가 시간에 맞춰 아이를 먹이고 재우고 엄마의 시간을 확보하라는 기계적인 글을 만났을 때와는 전혀 다른 느낌이었다. 엄마의 시간을 확보하여 모두가 편안해진다는데, 읽으면 읽을수록 나는 그렇게 할 수 없겠다는 생각만 들었기 때문이다. 실제로 나는 그 책에서 요구하는 사항들을 전혀 지키지 못했다. 나의 본능은 아이를 많이 않아주고 열심히 스킨십해주라는 책들에 더 귀를 기울였고, 아이를 품에 안고 재우면서 새근새근 숨소리를 들을 때 본능적으로 더 행복했다.

 

마더쇼크에서는 엄마가 본능이 아니라고 한다. 겪어본 바로는 맞는 말이기도 하다. 엄마가 된 다음에 자연스럽게 엄마로서의 모성이 마구 발현되는 사람도 있는지 모르겠지만, 대개는 엄마가 되기 이전에 가졌던 생활을 포기해야하는 상실감과, 집에서 아이와 계속 있으면서 받게 되는 스트레스가 엄마로서 아이로 충분히 만족하지 못한다는 죄책감과 함께 밀려들어왔다. 하지만 한편으로 엄마는 본능이기도 하다. 아이를 지켜보면서 함께 먹고, 자고 스킨십을 하면서 그 전에 만났던 어떤 존재보다 아이를 사랑하게되는 자신을 느끼면서 이게 엄마로구나 실감하기도 한다. 세상에 어떤 다른 존재가 그 대신일 수가 없다. 결론을 내리자면, 아이가 태어나는 순간 엄마로서의 본능이 깨어나는 것이 아니라 아이를 키우면서 점점 엄마로서의 본능을 찾아가는 것이다.

 

전통육아는 엄마로서의 본성을 찾아가게 해 준다. 엄마는 자기 본능대로 아이를 보호하고 양육하면서 당연히 편안할 수밖에 없다. 아이의 욕구와 상황을 이해할 수 있다면 아이가 보채고 울더라도 엄마가 당황할 이유가 없기 때문이다. 아이가 우는데 엄마가 인터넷을 뒤져서 해결책을 찾아야한다면 그 유예된 시간동안 엄마와 아이가 얼마나 불안할 것인가.

 

다양한 유아서적들을 읽어보면 엄마들도 느끼게 될 것이다. 어떤 조언이 가장 편안한지. 엄마의 시간을 가질 수 있다는 솔깃한 조언이나, 아이가 똑똑해진다는 여러 조언들에도 내 본능이 불편하게 반응했던 것처럼.

 

첫아이를 키울때 '손탄다'는 주변 조언에 이렇게 대꾸한 적이 있다. "어차피 크면 내가 안고 싶다고 안을수 있는 것도 아닌데, 이때 손좀 타면 어때요."라고.

 

아이는 엄마가 원하지 않아도 점차로 독립적 존재가 되어간다. 어느 순간 엄마의 이야기를 듣고 싶어하지 않을 수도 있다. 중고등학생이 되어서도 엄마 옆에 붙어서 엄마가 안아주고 업어주기를 바라는 아이는 없다. 그리고 더 크면 엄마가 안아달라고 요구해도 쑥스럽다고 외면하는 아들을 만나게 될 지도 모른다. 이렇게 생각해보면 어떨까. 아이가 다 커서 어른이 된 다음에 내가 아이를 안고 싶다고 할 때 아이가 이렇게 해 줬으면 하는 마음으로 아이를 안아준다면. 그럼 아이가 안아달라고 할 때는 언제든 안아주게 될 것이다. 나중에 엄마 꼭 이렇게 안아줘~라면서. 아직도 스킨십이 그리운 엄마의 욕심인지도 모르지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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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무슨 일 하며 살아야 할까? 길담서원 청소년인문학교실 1
이철수 외 지음 / 철수와영희 / 2011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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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직장을 다니면서 깨닫고 놀라게 된 사실이 하나 있다. 그것은 바로 내가 '노동자'가 되었다는 것이었다. 책에서 밝히고 있는 것처럼 나역시 정규교육과정을 통해 '노동'과 '노동자'에 대해 배운 적이 없었고, 당연히 '노동자'라는 단어를 그 의미 그대로 이해하기 보다 몸을 쓰는 일에 종사하는 일부 소수의 사람들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러나 '노동'과 '노동자'는 그보다 폭넓은 의미의 단어였고, 공부를 열심히 해서 대부분의 사람들이 전문직이라고 하는 직장을 가졌음에도 내가 '노동자'라는 사실을 뼈저리게 실감해야만했다. 일을 하기 시작하면 깨닫게 된다. 이 사회에 '노동자'가 아닌 사람은 아주 드물게 존재하는 몇 몇 '자본가'에 불과하다는 것을.

 

아쉬운 것은 '노동자'라고 생각하면서도, 대개의 사람들이 그것을 있는 그대로 인정하려하지 않는다는 점에 있다. '전문가', '프리랜서', '개인사업자' 등의 단어가 '노동'을 가리고 있다. 그래서 일하는 사람이라기보다는 소비하는 사람으로서, 월급을 받는 사람임에도 투자하는 사람으로서 자신의 가치를 찾고 그를 위한 사회가 만들어지는 것에 대해 전혀 거부감을 갖지 않는 데 문제가 있다. 우리는 '노동자'이지만 '자본가'를 위한 사업에 훨씬 너그러운 것이다.

 

길담서원에서 마련한 청소년 인문학교실인 '일'에 관한 강의에는 청소년들이 어떤 일을 선택하면 좋을지에 대한 이야기 뿐 아니라 현재 시점에서 청소년 노동자로서는 어떤 삶을 살고 있으며 어떤 권리를 가질 수 있는지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있다. 그리고 우리 모두가 걸어가야 하는 '노동자의 길'을 위해서는 어떤 사회가 마련되어야 하는지에 대해서도 생각해볼 수 있는 강의가 실려 있다. 청소년 인문학이지만, 성인들에게 시사하는 바도 많다. 이 책을 통해서 독자는 사회를 바라보는 새로운 프레임을 만나게 될 것이다. 그리고 이 프레임을 통해 바라본 사회는 이전의 사회와 분명 다를 것이다. 큰 틀을 인지하는 힘을 가져야 사회구조를 정확하게 이해할 수 있다. 그러다보면 사소한 문제도 더이상 사소하지 않게 된다. 무슨일을 해야할지 고민하는 사람뿐 아니라 이제서야 자기가 노동자임을 깨달은 모든 이들에게 추천해주고 싶은 책이다.

 

"부모님이 모두 노동자인 집안에서 자랐으면서도 20여 년 동안 노동 문제에 대해 전혀 관심을 가지지 않았다는 거죠. 어떻게 이러한 사회를 정상이라고 할 수 있을까요? ... 다른 나라들에서는 초등학생 정도면 다 배워서 아는 내용인데요." p.19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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돈의 인문학 - 머니 게임의 시대, 부富의 근원을 되묻는다
김찬호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11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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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이에 불과하다는 것을 분명히 알면서도 모두가 좋아하는 것이 돈이다. 돈의 가치는 그 자체에 있다기 보다는 그것이 환산할 수 있는 모든 가능성에 있다. 돈이 있다면... 으로 시작되는 바람에는 그저 돈이 축적되어서 좋다기보다는 그것으로 환산할 수 있는 가능성이 늘어나는 데 대한 충족감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무엇보다 돈을 좋아하고, 많아도 더 있기를 바라는지도 모르겠다. '무한한 가능성'이란, 어린이들에게 꿈나무라며 붙이는 호칭이기보다 돈에게 보내는 찬사일 때 더 어울리는 것 같기까지 하다.

 

이러한 돈이 어떻게 생겨났을까. 그리고 현재 돈의 가치는 어디까지 와 있는 것일까. 돈의 가치에 기반한 자본주의 사회는 어떤 방식으로 유지되어왔으며, 현재 발생되고 있는 문제들에 대한 해결책은 어떤 것들이 실행될 수 있을까. 이러한 물음에 대한 대답이 이 책에 담겨있다.

 

"자본주의의 경쟁력은 비자본주의적인 영역들이 얼마나 건실하게 작동하느냐에 따라 보장된다. 이것이 바로 자본주의의 역설이다." p.175

 

오늘날 자본주의는 생태계,사회관계,세금으로 운영되는 공공서비스 등과 같은 비자본주의의 영역을 갉아먹으면서 성장하고 있다. 특히 우리나라의 경우 이러한 현상이 두드러진다. 하지만 주지했던 것과 같이 이러한 비자본주의영역이 축소될수록 우리의 자본주의구조는 아래층이 빈약한 불안정한 형태를 띨 수밖에 없고, 결국 자본주의가 가진 단점에 잡아먹히는 수밖에 없다. '돈만 있으면 살기 좋은 나라'라는 냉소적 평가가 말해주는 것처럼 우리 사회는 돈이 돈 이상의 가치를 가지면서 삶을 황폐화시키고 있다. 한 사람의 수입으로 자녀를 키우기 힘들다는 호소와 살기 힘들어 스스로 죽음을 선택하는 사람들의 절규가 개개인이 열심히 살아야한다는 어처구니없는 결말로 끝나는 것은 우리 사회가 비자본으로 해결해야할 것까지 모두 자본으로 해결하려하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종종 사회의 잘못을 개인의 잘못으로 오해해버리는 것이다.

 

돈이 흐르게 해야한다는 저자의 마지막 말은 그래서 울림이 있다. 적은돈이라도 벌면 쓰라는 말로 이해해서는 안된다. 사회적 자본의 영역을 확대하기 위한 구조적 노력이 필요하다는 뜻이다. 누군가가 축적해 놓고 대외적으로 우리나라 국민 생산이니 수입이니 떠들어대는데 필요한 수치가 아니라 우리 내부에서 공공재로 흘러다니는 돈이 생겨야 한다는 말이다. 그래야 우리 사회의 구석구석에 퍼져있는 가느다란 모세혈관에까지 숨쉴수 있는 산소가 공급되지 않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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