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인자의 기억법
김영하 지음 / 문학동네 / 2013년 7월
평점 :
구판절판


김영하의 소설은 굳이 골라 읽은 것이 아닌데도 세 권 정도 읽었다. '오빠가 돌아왔다.' , '아랑은 왜', '퀴즈쇼' . 이중에서 '오빠가 돌아왔다'를 제외하고는 몽롱한 상태의 글을 읽는 듯한 느낌이었다. 이 세상의 이야기지만 이 세상의 이야기가 아니었던 것 같은. 현실을 이야기하는 것인데, 현실이 아닌 것 같은 느낌. 매번 약간의 혼란을 느꼈던 것 같다. 그런데 이 소설의 말미에 작가의 글을 읽으면서 알게되었다. 김영하의 소설은 그가 여행했던 다른 '세계'였다는 것을. 아하. 그래서 나는 늘 낯선 세상에 떨어진 것 같은 혼란스러움을 느꼈던 것이구나. 타고난 길치가 길잡이를 따라 길을 따라 들어갔다가 어느 순간 서서 자기 자리를 돌아보니 전혀 엉뚱한 곳인 그런 느낌어었던 것이구나. 나는 실제로도 길치니까.

 

아무튼. 살인자의 기억법은 그중에서도 최고봉이라 할 수 있다. 이제 세계는 사라지고 어느 살인자의 기억만 남아있다. 그런데 심지어 이 기억은 도저히 신뢰가 가질 않는다. 기억은 때로 서술자 자신에 의해서, 외부 사람들에 의해서 부정된다. 그런데 더 어처구니 없는 것은 서술자가 그 자신이니 이 부정된 기억마저도 진정한 부정인지 알 수 없다는 것이다.

 

'개'에 대한 기억이 대표적이다. 그는 처음에 남의 개가 들어온다고 했으나 그것을 딸이 부정한다. 그리고 나서 그가 개의 존재를 언급하자 다시 딸은 그것을 부정한다. 그리고 이후에 그는 안형사에게 개의 존재를 부정한다. 오히려 치매를 앓는 노인의 행동이 보다 논리적이다. 그는 딸의 부정을 그대로 따르고 있다. 그러나 이 입장에서라면 딸의 부정이 오히려 이상하다. 우리는 이렇게 앞뒤가 안 맞는 시선으로 이 소설을 이해해야만 한다. 이토록 사소한 것이 엇갈리는 속에서 진실은 어디에 있는가. 과연 그 '개'는 누구의 개인가. 주인없는 개라는 동네 사람들의 말이 진실인가 아니면 무의식적으로 '주인들'을 찾는 서술자 '나'의 말이 진실인가.

 

이 책은 살인자의 기록이라기보다는 치매를 앓으며 기억을 잃어가는 노인의 기록이다. 치매의 진행이 그렇듯, 초반의 기록은 꽤나 구체적이고 자세하다가 점점 끊어지고, 부정되기 시작한다. 그리고 나중에는 처음의 모든 것이 부정되어버린다. 그렇다면 그가 살인자라는 그의 처음 기록 역시 믿을 수 없게 된다. 소설은 그가 치매 진단을 받는 것으로 시작되며, 의사는 어느 정도의 진행인지도 알 수 없다고 한다. 그렇다면 그가 살인을 했다는 기억 역시 믿을 수 없다. 연쇄살인의 등장은 그의 기억과 상상이 맞물린 곳에서 탄생했을지 모른다.  지프차를 만난 그 때 그가 김주태를 '자신'이라고 의식했던 것은 한때 지프차에 시체를 싣고 다녔던 그의 기억었을 수도, 다시 살인을 시작한 '자신'을 바라보던 '자기'에 대한 기록이었을 수도 있다. 모든 것을 의심하게 되는 순간 모든 가능성이 열리기 시작한다. 그가 몸을 움직일 수 없는 상태에서 겪었다는 '평범한 삶'이 그의 젊은 시절이었을 수도 있다. 상상이라고 생각했지만 그것이 현실이었고, 현실이라고 생각한 살인자의 삶이 상상이었을수도. 아니 더 나아가서 이 소설에 존재하는 사람들과 대사들은 모두 방 구석에서 기억을 잃은 노인이 킬킬대며 주절거리는 농담일수도 있다. 작가는 어쩌자로 이런 세계에 발을 들여 놓았을까.

 

'악보를 남기지 않는 작곡가도 어딘가엔 있겠지. 절륜한 무예를 아무에게도 전수하지 않고 제 몸 하나 지키다 죽은 강호의 고수도 있었을 것이다.' p.116

 

가끔 나 역시 상상한다. 엄청 뛰어난 어떤 것들이 아무 손도 타지 않은 채 사라져버렸을지도 모른다고. 이 엄청난 소설 역시 그런 가능성중의 하나이다. 아무도 알아들을 수 없는 말을 하는 누군가의 머릿속에 대단한 어떤 사실이 존재할지도 모른다고. 그러나 모든 것은 '공'으로 돌아가버릴 뿐이라고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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