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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 나의 잉글리쉬 보이
왕강 지음, 김양수 옮김 / 푸른숲 / 2006년 4월
평점 :
품절
지금 베이징에서는 올림픽이 한창인데, 중국 북서부 신장(新疆)에서는 어제 큰 테러사건이 발생했다.
이번에 읽은 '오, 나의 잉글리쉬 보이'(원제: 英格力士)는 바로 이 지방 출신의 작가 왕강이 문화혁명기의 이 지역을 배경으로 쓴 아주아주 발랄한 성장 소설이다. 무거운 주제일 수도 있는 내용을 중국 소설에 대한 편견을 확~ 깨줄만큼 상큼하게 접근했다고 보여진다.
2008년8월10일 새벽, 실크로드의 핵심적 길목이라 할 수 있는 신장 위구르 자치구에서 독립을 주장하는 분리주의자들이 정부기관에 사제 폭탄을 무차별 투척하여 총격전이 벌어지고 자신들은 물론 8명이 사망하는 사건이 생긴 것이다. 중국답게 깊은 내막이야 은폐되고 있지만 연일 시끄러운 티벳은 물론이고, 다민족 국가인 중국의 현실은 늘 이런 것 같다.
지금으로부터 40년전 중국 신장은 더하면 더했지 못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신장 위구르 자치구 중에서도 촌인 우루무치에 향수 냄새 휘날리며 상하이 출신의 멋진 영어선생님이 부임해 온다. 문화대혁명기의 중국의 살벌한 분위기는 그것도 우루무치 촌구석에서는 특히나 이 영어선생님을 곱게 바라볼만큼 여유로운 부모는 없었다. 하는 짓을 보면 영락없이 학생들을 타락시킬 것만 같은 위험인물로 경계의 대상이 되는 왕야쥔(王亞軍) 선생님... 그리고, 누가 뭐라해도 왕선생님을 추종하며 영어에 푹 빠져버린 우리의 주인공 류아이...
우르무치에 단 하나뿐인 영어사전... 펼치기만 하면 눈에 들어 오는 단어는 마스터베이션(masturbation)이 말해주는 이 사전과 주인공의 오묘한 관계... 깨끗한 나뭇잎으로 싼 홍사오러우 냄새가 풍겼던 아지타이의 성숙한 아름다움과 개 오줌 냄새 뿐이던 수즙고 순결한 여자 영어 라이벌 황쉬성... 황쉬성과의 삼각관계에 모든 것을 걸었던 쓰레기 리라는 별명의 동창생 리졘밍...
이 소설을 읽는 내내 핍송 문리버(Moon River)가 잔잔하게 흐르는 분위기.... 왕야쥔 선생님이 던져준 화두이면서도 허클베리 프렌드가 누구인가 궁금해 하기도 하면서 마냥 좋아하던 이 노래... 소설이 끝나갈 즈음 오래도록 불편했던 아버지로부터 이 노래를 다시 듣게 되는 류아이는 아버지로부터 다시 해석되는 노래 가사를 통해 다시 갈등하고, 진정으로 화해한다. 그리고 아빠의 인간적인 아픔과 건축가로서의 위대함을 이해하는 계기가 되기까지 한다.
Moon River, wider than a mile
달빛이 흐르는 강, 무척이나 깊어 보여요.
I'm crossing you in style someday.
언젠가 난 당신을 외면한 적이 있어요.
Old dream maker, you heart breaker,
오랫동안 사랑했지만 나의 꿈을 부숴버린 사람.
Wherever you're going.
당신은 어디로 가든지
I'm going your way.
난 당신을 따라갈 거예요.
Two drifters off to see the world
세상 밖으로 떠나는 두 표류자.
There's such a lot of world to see.
얼마나 멋진 세상인가요.
We're after the same rainbow's end
우리는 무지개의 양쪽 끝에 있어요.
Waiting round the bend,
강이 굽어진 곳에서 기다릴게요.
My huckleberry friend,
나의 허클베리 친구여,
Moon river and me.
달빛이 흐르는 강, 그리고 나.
고목 나무 위에서의 추억, 바람난 엄마와 못난 아버지에 대한 멸시, 통닭과 함께 판주임을 쫓아내는 아지타이에 대한 존경심, 애틋한 감정의 대상에서 때로는 질투의 대상이었다가 집안 비극과 친구 쓰레기 리의 비극으로 미쳐버린 황쉬성의 아픔. 보일러실에서 훔쳐보던 아지타이의 알몸을 결국 방공호에서 몽롱하게 만나는 사연, 평생을 독신으로 살았던 교장 선생님의 첫사랑을 이해하는 순간 순간들이 이 소설을 읽는 즐거움의 과정이다.
특히, 류아이가 어렸을 때 우르무치에는 고목나무가 많았노라고 회상하는 장면이 있다.
학교 건물도 직접 설계했던 건축가인 류아이의 아버지는 지도자들을 설득하는 과정에서 이런 멋진 말을 했다.
"나무들은 이미 여기에서 수백 년을 생활했기 때문에 한족이건 위구르족이건 이 나무들과 다퉈서는 안됩니다. 나무들은 우리의 전생은 물론 사후까지 알고 있습니다."
그렇게 아버지로부터 보호된 나무에 올라 남의 사생활이나 훔쳐보는 아들의 이야기가 때로는 진중하게 때로는 배꼽을 잡게 하는 것이 이 소설의 매력이다.
어쨌거나 이 모든 사연들을 뒤로 하고 문화대혁명은 끝이 났지만 왕야쥔은 영어교사로서의 성취감도 없고 사랑도 쟁취하지 못한 채 무명으로 남아 있을 뿐이다. 그리고, 그를 동경하고 추종했던 우리의 잉글리쉬 보이 류아이 또한 대학에 떨어져 우루무치에서 전문대학을 마치고 왕야쥔의 뒤를 이은 모교의 영어교사로 부임했을 뿐이다.
두 실패자들의 재회 순간에도 내 마음을 타고 흐르는 음악은 역시 문 리버였다.
과연 두 남자는 패배자일 뿐인가?
바로 이들이 문 리버 속에 등장하는 세상밖으로 떠나는 두 표류자가 아니겠는가.
강이 굽어진 곳에서 다시 만난 마크 트웨인의 소설 속 두 친구...
그들의 아픔은 곧 희망의 시작일 뿐이다.
빌려간 영어사전과 함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