걷는 자세가 나빠서 그런지 신고 다니던 통굽 부츠도 그렇고 구두 몇 켤레들이 제 수명을 다하지 못하고 찢어진 것을 보고는(걷는 자세가 나쁜 것이 아니란 생각이 갑자기 든다. 아마도 볼 넓은 발의 중력을 견디지 못한 것이겠지..-__-;;) 끝내 오늘 폐기처분하기로 마음을 먹었다.

폐기처분하기로 마음먹고 신던 신발들을 바라보고 있자니 나의 험한 걸음걸이도, 나의 볼 넓은 발도 묵묵하게 견뎌준 녀석들이 대견하다는 생각과 함께 녀석들에게 불현듯 연민이 느껴진다. 좋은 주인 만났으면 꽤나 오래 사랑받았을텐데.. 하필이면 자갈길도, 흙탕길도 신나게 뛰어다니는 주인을 만나 가장 아래서 받혀주는 역할을 하느라 이렇게 빨리 시들어 버리다니... 녀석들도 참 운이 없는 녀석들이다.

고흐의 '낡은 구두'라는 작품에서  느껴지는 노동의 질감과 먼지와 때가 앉아 새 구두의 질감이 바래버렸지만 발의 모양에 자연스럽게 맞추어져 부드러워진 가죽의 질감, 다른 신들과 함께 놓여있는 것이 아니라 혼자 놓여있어서 그 고단한 삶을 혼자 뚜벅뚜벅 걸어간 구두 주인의 고독이 느껴지는 모양새가  내 낡은 구두에서도 느껴지는 것을 보니 인간과 더불어 시간을 보낸 물건들은 그 주인의 모양새를 조금씩 닮는 듯하다.

그러나, 과거에 매여 있으면 앞으로 나갈 수 없다.  찢어진 낡은 구두에 아무리 연민을 느낀다고 해도  녀석들을 하나하나 꼬매고 있을 정성은 눈꼽만큼도 없는 게으른 내 자신은 녀석들을 부활시킬 수 없다. 그러므로 녀석들을 버리고 내 육신을 또다시 세상속으로 실어다 줄 새로운 신발을 구할 수 밖에 없다.

세미나를 마치고 돌아오는 길에 10000원짜리 은분홍색 샌들을 사왔다. 굽도 3센티정도 밖에 되지 않으니 뛰어다니기에는 안성마춤. 벌써부터 새신을 신고 뛰어다닐 생각에 부풀어 있는 나를 바라보며 한숨을 쉬고 있는 녀석. 좋은 신은 주인을 좋은 곳으로 데려다 준다지? 많이 뛰어다닐테니 너도 좋은 곳으로 날 안내해다오. 꽤 오랫동안 너에게 신세를 지게 될 주인도 사실은 다른 녀석들에게 발을 맞추느라 꽤나 발이 아팠단다. 나도 힘껏 너에게 발을 맞추어 주고, 뒷꿈치가 까져 쓰라리는 아픔도 참아낼테니 내일부터 힘내다오..흐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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딸기 2005-05-23 12:3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흑흑... 난 오늘 sister nilliriya의 굽높은 샌들을 빌려신고 왔는데
잘 걷지를 못하고 있어 ㅠ.ㅠ

파란여우 2005-05-23 23:3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슉슉님이나 지안님이나 저나 높은 굽하고는 그다지 친하지 않은 삶을 살고 있군요.
낮은데로 임합시다 뭐...
사실, 저희는 낮은데로 임해도 높은(??) 교양을 지녔으니 견디어낼만하잖아요.
안그래요? 호호호^^*

클레어 2005-05-24 00:1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슉슉님/ -_-;; 슉슉~ 흐흐~ 내일은 닐리랴 신 빌려신지 말고 언니 신발 신어요. 남의 신발 신으니깐 그렇지..

파란여우님/ 하하~ 깜찍한 여우님.. 낮은데서 한번 힘주어 살아볼까요? ^^

딸기 2005-05-25 11:1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으하하하 여우님 ^^
 

예쁜 선물을, 아니 좀 더 자세히 말한다면 작은 생활소품을 의미있는 물건으로
만드는 일을 사랑하는 그녀에 대해 알게 된 것은 제 첫사랑 때문이었습니다.

나지막한 그녀의 목소리, 화장기 없는 그녀의 모습을 좋아한다는 그 앞에서
내 목소리는 너의 영혼에 울림이 있니? 라는 물음을 물어보고 싶은 마음이
항상 들었지만 참았던 적이 한두번이 아니었지요.

그와의 100일날 노영심의 피아노곡과 단 한곡 그녀의 목소리가  노래가 되어
녹음되어 있는 그녀의 첫 앨범을 사서 그에게 내밀었습니다.

"니 사랑, 여기있다."

"내 사랑이 여기 있었군."하며 그는 선물을 받고 내 손을 잡아주었습니다.

오래된 이야기가 되어버렸습니다.
그러나, 그녀의 목소리는 여전히 나지막하고
김창완 아저씨는 헤어짐을 완성이라고 말하는데
아직도 울컥거리는 내 마음은 전혀 그 말을 받아들일 수 없습니다.

아예 인연이 그뿐이었어..라고 말해주었다면 더 이해가 되었을 것인데..

그렇지만, 아직도 그가 좋아하던 노영심처럼
선물을 하게 되면 이것저것 의미담아 보내는 습관이 붙어버렸습니다.

내가 원하던 자유만큼이나 고독도 같이 더불고 가야하는 나에게
예쁜 습관하나 붙여준 채 날 놓아준 그에게
감사하다고 해야 하나? 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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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란여우 2005-05-21 00:4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 들국화의 노래를 들으면 문득 생각납니다.
다들 노래나 가수가 있군요..허허참.^^

클레어 2005-05-22 23:4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노래하나 묻어놓은 거 없다면 왠지 밍밍한 인생일 거 같지 않습니까? 파란여우님~
 

세상은 넓고 할 일은 많고 읽어야 할 책들도 많구나.

간만에 생긴 여유를 즐기면서도 머리 속을 뱅뱅 돌고 있는 것은 "마.케.팅" 세 글자이다.

 

마케팅 관련책을 몇 권 샀다.

내일 온단다.

만쉐이~ 

( -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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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란여우 2005-05-20 16:1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마케팅...
대학때 횡설수설 레포트 쓰느라고 헤맸던 과목입니다.
부디, 좋은 공부 정진하시길^^

클레어 2005-05-20 21:3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레포트의 중압은 없으나 마케팅 관련글을 읽고 수익거리를 만들어야 한다는 부담감은 드는군요. 전문지식이 서비스라는 재화로 바뀌고 다른 사람들에게 어필되려면 아무래도 다른사람들의 눈길을 사로잡아야 하고, 제대로 서비스 시스템을 돌리고 운영하려면 마케팅 및 경영에 대한 지식도 필요한 것 같아서 말이죠. 같이 일하는 사람들에게도 일거리를 계속 만들어주려면 아무래도 노력을 많이 해야할 듯..뭐~ 혼자서 고민한다고 될 문제는 아니지만 알아야 면장질도 해먹는다는 속담도 있으니 공부 좀 해야겠습니다. 흐흐~
 

 

 

옛 스님들의 편지 45. 경봉이 장지연에게

 

 

기차는 재촉한다만 나홀로 어이 가리

 

 

 

 

 

굴절된 시대에 만난
두 선지식의
세대를 넘은 우정


보은의 탑 많은 사람 정성으로 이루어
천추만대 기념하는 그 뜻 감격하네
관수의 구름도 이별을 아쉬워하는 듯
기차는 재촉한다만 나홀로 어이 가리
올 때는 봄바람이 좋더니
떠난 뒤 바다의 달처럼 서로 생각하네
불법에 공덕 심으면 음덕 쌓이는 것
서로 전하는 입비석에 그 이름들 영원하라
(報恩一塔衆人誠 記念千秋感此情
關樹留雲同贈別 汽車催路獨堪行
來時初對春風好 去後相思海月明
佛地樹功多蔭德 相傳口碣不朽名)


1919년 7월 경봉(鏡峰, 1892~1982)은 마산포교당(현 정법사)을 뒤로 하고 산문을 나섰다. 그가 첫 주지로 부임한 지 꼭 2년 6개월만이었다. 이곳 생활이 그리 길지는 않았을지라도 경봉에게 마산포교당은 참으로 각별했다. 민초들과 부딪히며 대중포교에 눈을 뜨고 ‘나는 선재동자처럼 도를 구하고 보현보살의 행원(行願)으로 중생을 제도하리라’는 평생의 서원을 굳건히 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여기에 필봉으로 구국운동을 펼쳤던 선각자 위암(韋庵) 장지연(張志淵, 1864~1921)을 만난 것도 이곳이기 때문이었다.

1917년 이른 봄, 스물여덟의 경봉이 이곳에 부임한지 오래지 않았을 때였다. 포교로 눈코뜰새 없이 바쁘게 지내던 중 하루는 두루마기를 입은 단아한 중년 남성이 포교당을 찾아왔다. 경봉은 순간 그가 위암임을 직감했다. 명성황후 시해 때 항일의병의 궐기를 호소하는 격문을 짓고, 이상재 등과 만민공동회를 개최했던 우국지자, 특히 1905년 11월 을사조약이 체결되자 황성신문에 ‘시일야방성대곡(是日也放聲大哭)’란 사설을 써서 일제와 매국노의 흉계를 통렬히 비판하고 그 사실을 알려 서울 장안을 울음바다로 만들었던 언론인. 하기야 일제의 침탈 앞에 통한의 눈물을 흘려야 했던 조선인 치고 그 누군들 위암을 모를 수 있을까만….

을사조약의 부당성을 알리는 대가로 치러야 했던 혹독한 수감생활과 그 후 구국결사운동을 재개하며 겪었던 온갖 고초들…. 이런 상황에서 위암은 블라디보스톡, 상해, 남경 등을 구름처럼 떠돌다 총상을 입은 채 귀국해 큰아들이 있는 마산에 칩거하고 있었다. 경봉에게 위암의 첫 느낌은 생각과 달리 강인함보다 늙고 지친 모습으로 와 닿은 것도 이 때문이었다.

당시 위암은 자신의 무능과 이로 인한 분노를 그저 술과 시로 하루하루를 달랬다. 그러던 중 마산포교당이문을 열고 젊은 승려 경봉에 대한 이야기를 듣게 된 것이다. 계를 철저히 지키고 설법도 잘 해 많은 사람들이 찾는다는 것, 이곳에 오기 전에 6개월간 토굴 속에서 지독하게 정진했다는 것, 석장을 쥐고 요령을 흔들며 사람들을 불러 모아 법문을 했다는 것, 졸음을 쫓기 위해 기둥에 머리를 박고 얼음을 입에 물었다는 등 그에 대한 소문이 마산시내에 자자했다.

열두 살 어린나이에 어머니와 할머니를 잇따라 잃고 봉화 청량사에서 풍경과 독경소리를 들으며 2년간 지냈던 위암으로써는 불교가 아련한 추억으로 와 닿았다. 그러나 위암이 경봉을 만난고자 했던 가장 큰 이유는 젊은 사문이 시문에도 대단히 밝다는 점이었다. 그 무렵 옛 스님들의 시를 정리하고 있던 위암에게 경봉은 이래저래 여간 흥미 있는 인물이 아닐 수 없었다.

위암은 첫 눈에 경봉이 기품 있는 수행자임을 알아보았다. 180센티의 훤출한 키에 단아한 입술, 거기에 한없이 맑은 눈은 26년의 나이 차이를 떠나 경봉을 흠모하도록 했다.

“경봉선사는 통도사의 큰스님이다. 그의 성품은 단아하고 학식은 해박하여 시를 잘 짓고 글씨도 잘 쓴다. 마산포교당에 와 머물면서 설법하고 계행을 지니니 모든 선남선녀 신도들이 신앙하고 귀의하여 계를 받지 않는 이가 없었다. 나 또한 스님의 오묘한 견해와 정진 그리고 원만하면서도 맑고 담박함을 좋아해서 법석에 임하여 법문을 들은 지 여러 해가 되었다.”

훗날 위암이 밝히고 있듯 경봉과의 교유는 그의 지친 삶에 청량제 역할을 했고, 특히 서신으로 시를 주고받던 일은 위암에게 큰 즐거움이었다.

우담화 꽃 핀지 그 몇 해인가
창생을 제도하며 세상을 경계하네
사자후 토하는 바위 앞에 푸른 뫼 우뚝하고
용트림 하는 바다 위에 흰 구름 떴네
보배 칼날 찬란하니 두려움 없고
지혜달 영롱하니 흥이 겨워라
하늘같이 높은 파도 뉘라서 헤쳐 나오나
야삼경 금까마귀 강가에 내려오네
(優曇花發幾春秋 晩度蒼生警世樓
獅吼巖前靑嶂立 龍吟海上白雲浮
寶鋒璨爛心無怖 慧月玲瓏興未收
誰在滔天浪裡返 金烏夜半下長洲)


칠언시가 담긴 경봉의 편지에 위암은 ‘(시를 보니) 마치 하늘꽃이 어지러이 내리는 듯하여 입에 향기가 나도록 읊조리고 외웠다’며 경봉의 운에 맞춰 쓴 칠언시를 한편 보냈다.

합포성 서편 학령엔 가을이 물들고
포교당 높은 곳 선정이 깊네
숲 사이로 돛단배는 연기 속에 아물아물
하늘가 산봉우리는 물위에 비치네
등불 깜빡이고 향 연기 어리는데 스님은 선정삼매
범종소리 그치자 꿈에서 깨어났네
둥글고 둥근 동방의 밝은 달
우담화 피듯 오대주 두루 비추소서
(合浦城西鶴嶺秋 敎堂高處敞禪樓
樹稍遠舶煙中出 天際群峰水上浮
燈邃香殘僧獨定 梵淸鍾歇夢初收
也知滿滿東方月 遍照曇花五大洲)


나이와 사상의 차이를 뛰어 넘어 두 사람의 우정은 계속됐다. 특히 경봉이 부모님의 은혜를 기리는 보은탑을 건립할 때 위암이 적극 나서 이를 도왔고, 「조선불교총보」(1919)에 ‘마산신조불석탑(馬山新造佛石塔)’이란 글을 기고해 경봉의 갸륵한 뜻을 기리기도 했다.

1919년 7월 경봉이 내원사의 주지로 임명돼 길을 나서며 가장 먼저 떠올린 게 탑과 위암이었다. 그리고 아쉬움과 함께 위암이 불법에 계속 관심을 갖기를 은근히 당부하는 위의 시를 보낸 것이다.

이에 위암은 ‘내가 알기로는 산승의 병과 발우는 뜬구름과 같고 흐르는 물 같아서 머무름도 집착함도 없고 가는 것도 없고 오는 것도 없는 것이다. 그러나 그가 가는데 어찌 서글픈 정이 없으랴. 더구나 스님께서 먼저 서신을 주었음에 그 운으로써 화증(和贈)하노라’며 한 편의 시를 써 인편에 전했다.

높고 높은 공덕탑은 정성을 표현했고
석면에 장경새김 믿음의 뜻이 있네
염화설법 늘 즐거워 법회에 임했는데
뜻밖에도 석장 날려 산으로 들어가네
재 넘어 구름은 멀리 영축산까지 어두운데
바다 달은 뜻이 있어 보배 거울처럼 비추네
내년에 숲 속에 딸기 익으면
예 놀던 바위 위에 다시 이름 써보세
(峨峨功塔表精誠 石面卍書信有情
每喜拈花臨法會 不期飛錫入山行
嶺雲遠逗靈峰黯 海月長留寶鏡明
來藏林間朱苺熱 舊遊岩上更題名)


그렇게 세월은 흘러 저술작업에 전념하던 위대한 문사 위암은 1921년 10월 2일 ‘내가 죽으면 묘비에 숭양산인(嵩陽山人)이라고만 쓰면 족하다’라는 유언을 남기고 고단한 삶을 마무리했다. 반면 경봉은 그 뒤 불같은 구도심으로 정진에 힘써 큰 깨달음을 얻고 중생교화에 매진하다가 1982년 7월 17일 “스님 가시고 난 뒤에도 스님을 뵙고 싶습니다. 스님의 모습이 어떠합니까?”라고 묻는 제자의 눈물 섞인 질문에 “야반삼경에 대문 빗장을 만져보아라.”란 말을 남기고 이승과의 인연을 접었다.

무사의 생애는 한 자루의 칼이요, 문사의 생애는 한 자루의 붓이요, 선승의 생애는 한 자루의 주장자라고 했다. 붓과 주장자로 길을 보이고 시대를 이끌었던 두 사람은 세월의 무게 앞에 비록 세연(世緣)을 접었지만 그들이 나누었던 문자향(文字香)만은 아직도 그윽하다.

이재형 기자 mitra@beop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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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란여우 2005-05-20 16:1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전, 붓은 커녕, 칼은 커녕, 5백원짜리 '호두맛'하드를 손에 들고 있다는 거 아닙니까..

클레어 2005-05-20 21:3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고것 맛나겠는걸요? 요즘 같이 더운 날에는 하드가 제격이죠. 흐흐~
 

 

 

옛스님들의 편지46. 日 호넨이 천왕의 딸에게

 

 

정토에서 필히 다시 만날 것이외다

 

 

 

 

 

죽음 앞둔 여류시인의
연심 깃든 마지막 부탁에
아미타염불 할 것 신신당부


쇼뇨보(正如房), 당신의 병환이 매우 위중하다는 얘기를 듣고 무척 놀랐습니다. 당신의 청대로 꼭 한번 뵙고 싶지만 돌이켜 생각해보면 이 세상의 만남이야 그리 중요하지 않을 것입니다. 오히려 무리해서 만나면 스러져가는 육신에 집착이 생길 뿐이겠지요. 어느 누구도 이 세상을 떠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다만 먼저냐 나중이냐의 차이만 있을 뿐이지요.
원컨대 임종 때 아미타불께서 모습을 드러내시어 자비로써 이끌어 주시고 정념에 머물 수 있도록 부디 마음으로도 원하고 소리 내어 외우십시오. 이것이 최선이니 결코 마음약해져서는 안될 것입니다.
당신을 떠올리면 이렇게 가슴 절절한 것을 보면 우리의 인연이 이번 생뿐 아니라 전생부터 이어져 왔음이 틀림없습니다. 비록 이번에 당신이 먼저 (극락에) 가시더라도, 혹은 제가 먼저 갈지라도 결국 같은 아미타 정토에 이르러 다시 만나 뵈올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을 것입니다.


쇼쿠시 나이신노(式子內親王, 1153~1202, 법명 쇼뇨보)의 편지를 읽은 켄쿠 호넨(源空法然, 1133~1212)은 순간 깊은 갈등에 휩싸였다. 천왕의 딸이자 일세를 풍미했던 여류 문인 쇼쿠시가 자신을 간절히 찾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것도 죽음의 문턱을 넘나들며 스스로 왕생할 수 없다는 극도의 절망과 두려움에 사로잡힌 채로…. 평생 수행자의 길을 걸어온 호넨이건만 그의 가슴이 두방망이질 쳤다.

호넨은 자신을 향하는 쇼쿠시의 각별한 마음을 모르는 것은 아니었다. ‘옥을 꿴 끈이여, 끊어질테면 끊어져라. 이대로 살아간들 가슴속 그리움을 견딜 수 없을 지도 몰라’라는 그녀의 유명한 와카(和歌)도 자신을 두고 쓴 시라는 세간의 자자한 소문을 호넨도 들어 알고 있었다.

호넨은 쇼쿠시의 연정을 이해하더라도 그건 이루어질 수 없는 일이었다. 20년이라는 세월의 차이가 문제가 아니라 자신은 이 땅에서 고통 받는 중생을 남김없이 구제하겠다고 서원을 세운 수행자였기 때문이다. 열세 살 어린나이에 무사인 아버지를 암살로 잃고 내맡겨진 출가생활. '복수하지 말고 출가하여 명복을 빌어달라'고 부친은 유언을 남겼지만 호넨은 증오와 원망으로 휩싸였다. 그러던 호넨이건만 이곳에서 불법을 공부하면 할수록 복수가 곧 궁극적인 것이 아님을 알았다.

특히 히에이산(比叡山)과 구로다니(黑谷)에서의 천태 및 밀교 공부는 그를 더욱 깊은 불보살의 세계로 이끌었고, 마침내 아미타염불로 체득한 깊은 경지는 그의 맘속에 품고 있던 살인검(殺人劍)을 활인검(活人劍)으로 완전히 바꾸어 놓았다.

태산 같은 구도의 열정으로 온갖 고난의 길을 마다하지 않던 호넨은 마침내 그의 나이 43세(1175년) 때 불법의 요체가 ‘나무아미타불’ 여섯 자에 있음을 깊이 깨닫게 되었다. 이때부터 호넨은 누구든 지극한 마음으로 염불만 하면 구원받을 수 있다는 ‘전수염불(專修念佛)’을 주창했다. 정치적 혼돈, 끊임없는 전란, 잇따른 천재지변으로 고통 받고 죽어가야 했던 백성들에게 호넨의 말은 감로수와 같았다. 백성들은 그의 말을 떠받들어 실천했고, 곧 나무아미타불 소리는 일본 전역으로 급속히 퍼져나갔다. 시간이 지날수록 백성들뿐 아니라 귀족과 지식인층들도 호넨에게 법을 청했고 귀의했다. 그는 이제 유명 인사이자, 다른 종파에서 두려워하는 요주의 인물로 급부상했다.

호넨과 쇼쿠시의 만남이 이루어진 것도 이 무렵이다. 만백성이 우러러보는 동경의 대상이었던 공주 쇼쿠시, 겉으로는 늘 밝게 웃고 있었지만 속으로는 오히려 심한 우울증에 시달리고 있었다. 천황인 아버지는 하루하루 권위를 잃어 갔고 신하들은 두 패로 나뉘어 피비린내 나는 권력 투쟁을 벌였다. 거기에 황가의 일원으로서 지켜야 할 갖가지 규범은 그녀에게 특권의식을 갖도록 하기에 앞서 깊은 절망에 빠져들게 했기 때문이다.

그러던 쇼쿠시는 호넨에게서 용기와 자비, 그리고 걸림 없는 자유를 보았다. 한없이 난해하게만 여겨지던 불교도 그를 거치면 단순하고 명료해졌다. 그녀는 호넨의 말에 귀 기울였고 그의 가르침대로 일심으로 염불했다. 쇼쿠시에게 호넨은 자비로운 법사이자 엄격한 스승이었다. 하지만 때때로 연모의 감정이 거센 파도처럼 밀려드는 건 그녀도 어찌할 수 없었다. 얼마 후 호넨이 멀리 떠나 자주 볼 수 없을 때조차 쇼쿠시의 애틋한 그리움은 쉬이 사그라지지 않았다. 오히려 독특한 감수성과 탁월한 언어조율 능력을 지닌 그녀는 이런 자신의 마음을 ‘와카’로 노래하기도 했다.

세월이 흘러 그녀가 불치의 병에 걸려 죽음의 날만 헤아리게 됐을 무렵 그녀의 마음에는 온통 호넨 생각뿐이었다. 그 분이라면 분명 자신이 겪는 이 고통을 없애주고 편안히 정토로 이끌어 줄 수 있으리라 믿었기 때문이다. 이런 쇼쿠시가 마지막 힘을 모아 자신의 곁으로 와줄 것을 그 사람에게 간청하고 있는 것이다.

쇼쿠시의 마음을 전해 받은 호넨은 결국 그녀에게 가지 않기로 마음을 굳혔다. 인연이 여기서 생에 그치는 것이 아님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기도 했지만 모든 중생들의 왕생을 위해 두문불출하며 일심으로 드리고 있는 기도를 중간에 포기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호넨은 대신 그녀에게 자신이 그곳으로 갈 수 없는 안타까움과 임종의 순간까지 염불을 해야 하는 이유 및 방법, 또 그녀가 정토에 반드시 갈 수 있다는 내용이 담긴 장문의 답장을 보내고 있는 것이다.

‘중죄를 지은 사람도 지극한 염불 한 번에 왕생할 수 있다했거늘 당신은 무엇 때문에 그리 걱정합니까. 지난 오랜 세월 극락왕생을 믿고 출가까지 행하며 오로지 염불수행을 하지 않았더이까. 도대체 어이하여 자신의 왕생을 의심하나이까. 열이면 열, 백이면 다 왕생한다고 (중국의) 선도(善導) 스님도 말씀하시지 않으셨습니까. 오직 아미타부처님의 본원에 매달립시오. 절대로 마음 약하게 먹으면 아니 되십니다. 갈 수 없는 이 몸. 아아, 그저 안타깝고 황송할 뿐이옵니다.’

이 편지를 받은 쇼쿠시는 아마도 호넨의 간절한 바람처럼 더없이 편한 마음으로 세상과 마지막 이별을 고했으리라. 자신을 짝사랑했던 공주를 떠나보낸 호넨도 정토종의 개조로서 제자들이 사형 당하고 본인은 유배형에 처해지는 등 혹독한 박해 속에서도 전법에 매진하다 1212년 1월 25일 80세에 극락으로 향했다. 그녀가 떠난 지 꼭 10년 뒤였다.

이재형 기자 mitra@beop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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