걷는 자세가 나빠서 그런지 신고 다니던 통굽 부츠도 그렇고 구두 몇 켤레들이 제 수명을 다하지 못하고 찢어진 것을 보고는(걷는 자세가 나쁜 것이 아니란 생각이 갑자기 든다. 아마도 볼 넓은 발의 중력을 견디지 못한 것이겠지..-__-;;) 끝내 오늘 폐기처분하기로 마음을 먹었다.
폐기처분하기로 마음먹고 신던 신발들을 바라보고 있자니 나의 험한 걸음걸이도, 나의 볼 넓은 발도 묵묵하게 견뎌준 녀석들이 대견하다는 생각과 함께 녀석들에게 불현듯 연민이 느껴진다. 좋은 주인 만났으면 꽤나 오래 사랑받았을텐데.. 하필이면 자갈길도, 흙탕길도 신나게 뛰어다니는 주인을 만나 가장 아래서 받혀주는 역할을 하느라 이렇게 빨리 시들어 버리다니... 녀석들도 참 운이 없는 녀석들이다.
고흐의 '낡은 구두'라는 작품에서 느껴지는 노동의 질감과 먼지와 때가 앉아 새 구두의 질감이 바래버렸지만 발의 모양에 자연스럽게 맞추어져 부드러워진 가죽의 질감, 다른 신들과 함께 놓여있는 것이 아니라 혼자 놓여있어서 그 고단한 삶을 혼자 뚜벅뚜벅 걸어간 구두 주인의 고독이 느껴지는 모양새가 내 낡은 구두에서도 느껴지는 것을 보니 인간과 더불어 시간을 보낸 물건들은 그 주인의 모양새를 조금씩 닮는 듯하다.
그러나, 과거에 매여 있으면 앞으로 나갈 수 없다. 찢어진 낡은 구두에 아무리 연민을 느낀다고 해도 녀석들을 하나하나 꼬매고 있을 정성은 눈꼽만큼도 없는 게으른 내 자신은 녀석들을 부활시킬 수 없다. 그러므로 녀석들을 버리고 내 육신을 또다시 세상속으로 실어다 줄 새로운 신발을 구할 수 밖에 없다.
세미나를 마치고 돌아오는 길에 10000원짜리 은분홍색 샌들을 사왔다. 굽도 3센티정도 밖에 되지 않으니 뛰어다니기에는 안성마춤. 벌써부터 새신을 신고 뛰어다닐 생각에 부풀어 있는 나를 바라보며 한숨을 쉬고 있는 녀석. 좋은 신은 주인을 좋은 곳으로 데려다 준다지? 많이 뛰어다닐테니 너도 좋은 곳으로 날 안내해다오. 꽤 오랫동안 너에게 신세를 지게 될 주인도 사실은 다른 녀석들에게 발을 맞추느라 꽤나 발이 아팠단다. 나도 힘껏 너에게 발을 맞추어 주고, 뒷꿈치가 까져 쓰라리는 아픔도 참아낼테니 내일부터 힘내다오..흐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