옛스님들의 편지46. 日 호넨이 천왕의 딸에게

 

 

정토에서 필히 다시 만날 것이외다

 

 

 

 

 

죽음 앞둔 여류시인의
연심 깃든 마지막 부탁에
아미타염불 할 것 신신당부


쇼뇨보(正如房), 당신의 병환이 매우 위중하다는 얘기를 듣고 무척 놀랐습니다. 당신의 청대로 꼭 한번 뵙고 싶지만 돌이켜 생각해보면 이 세상의 만남이야 그리 중요하지 않을 것입니다. 오히려 무리해서 만나면 스러져가는 육신에 집착이 생길 뿐이겠지요. 어느 누구도 이 세상을 떠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다만 먼저냐 나중이냐의 차이만 있을 뿐이지요.
원컨대 임종 때 아미타불께서 모습을 드러내시어 자비로써 이끌어 주시고 정념에 머물 수 있도록 부디 마음으로도 원하고 소리 내어 외우십시오. 이것이 최선이니 결코 마음약해져서는 안될 것입니다.
당신을 떠올리면 이렇게 가슴 절절한 것을 보면 우리의 인연이 이번 생뿐 아니라 전생부터 이어져 왔음이 틀림없습니다. 비록 이번에 당신이 먼저 (극락에) 가시더라도, 혹은 제가 먼저 갈지라도 결국 같은 아미타 정토에 이르러 다시 만나 뵈올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을 것입니다.


쇼쿠시 나이신노(式子內親王, 1153~1202, 법명 쇼뇨보)의 편지를 읽은 켄쿠 호넨(源空法然, 1133~1212)은 순간 깊은 갈등에 휩싸였다. 천왕의 딸이자 일세를 풍미했던 여류 문인 쇼쿠시가 자신을 간절히 찾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것도 죽음의 문턱을 넘나들며 스스로 왕생할 수 없다는 극도의 절망과 두려움에 사로잡힌 채로…. 평생 수행자의 길을 걸어온 호넨이건만 그의 가슴이 두방망이질 쳤다.

호넨은 자신을 향하는 쇼쿠시의 각별한 마음을 모르는 것은 아니었다. ‘옥을 꿴 끈이여, 끊어질테면 끊어져라. 이대로 살아간들 가슴속 그리움을 견딜 수 없을 지도 몰라’라는 그녀의 유명한 와카(和歌)도 자신을 두고 쓴 시라는 세간의 자자한 소문을 호넨도 들어 알고 있었다.

호넨은 쇼쿠시의 연정을 이해하더라도 그건 이루어질 수 없는 일이었다. 20년이라는 세월의 차이가 문제가 아니라 자신은 이 땅에서 고통 받는 중생을 남김없이 구제하겠다고 서원을 세운 수행자였기 때문이다. 열세 살 어린나이에 무사인 아버지를 암살로 잃고 내맡겨진 출가생활. '복수하지 말고 출가하여 명복을 빌어달라'고 부친은 유언을 남겼지만 호넨은 증오와 원망으로 휩싸였다. 그러던 호넨이건만 이곳에서 불법을 공부하면 할수록 복수가 곧 궁극적인 것이 아님을 알았다.

특히 히에이산(比叡山)과 구로다니(黑谷)에서의 천태 및 밀교 공부는 그를 더욱 깊은 불보살의 세계로 이끌었고, 마침내 아미타염불로 체득한 깊은 경지는 그의 맘속에 품고 있던 살인검(殺人劍)을 활인검(活人劍)으로 완전히 바꾸어 놓았다.

태산 같은 구도의 열정으로 온갖 고난의 길을 마다하지 않던 호넨은 마침내 그의 나이 43세(1175년) 때 불법의 요체가 ‘나무아미타불’ 여섯 자에 있음을 깊이 깨닫게 되었다. 이때부터 호넨은 누구든 지극한 마음으로 염불만 하면 구원받을 수 있다는 ‘전수염불(專修念佛)’을 주창했다. 정치적 혼돈, 끊임없는 전란, 잇따른 천재지변으로 고통 받고 죽어가야 했던 백성들에게 호넨의 말은 감로수와 같았다. 백성들은 그의 말을 떠받들어 실천했고, 곧 나무아미타불 소리는 일본 전역으로 급속히 퍼져나갔다. 시간이 지날수록 백성들뿐 아니라 귀족과 지식인층들도 호넨에게 법을 청했고 귀의했다. 그는 이제 유명 인사이자, 다른 종파에서 두려워하는 요주의 인물로 급부상했다.

호넨과 쇼쿠시의 만남이 이루어진 것도 이 무렵이다. 만백성이 우러러보는 동경의 대상이었던 공주 쇼쿠시, 겉으로는 늘 밝게 웃고 있었지만 속으로는 오히려 심한 우울증에 시달리고 있었다. 천황인 아버지는 하루하루 권위를 잃어 갔고 신하들은 두 패로 나뉘어 피비린내 나는 권력 투쟁을 벌였다. 거기에 황가의 일원으로서 지켜야 할 갖가지 규범은 그녀에게 특권의식을 갖도록 하기에 앞서 깊은 절망에 빠져들게 했기 때문이다.

그러던 쇼쿠시는 호넨에게서 용기와 자비, 그리고 걸림 없는 자유를 보았다. 한없이 난해하게만 여겨지던 불교도 그를 거치면 단순하고 명료해졌다. 그녀는 호넨의 말에 귀 기울였고 그의 가르침대로 일심으로 염불했다. 쇼쿠시에게 호넨은 자비로운 법사이자 엄격한 스승이었다. 하지만 때때로 연모의 감정이 거센 파도처럼 밀려드는 건 그녀도 어찌할 수 없었다. 얼마 후 호넨이 멀리 떠나 자주 볼 수 없을 때조차 쇼쿠시의 애틋한 그리움은 쉬이 사그라지지 않았다. 오히려 독특한 감수성과 탁월한 언어조율 능력을 지닌 그녀는 이런 자신의 마음을 ‘와카’로 노래하기도 했다.

세월이 흘러 그녀가 불치의 병에 걸려 죽음의 날만 헤아리게 됐을 무렵 그녀의 마음에는 온통 호넨 생각뿐이었다. 그 분이라면 분명 자신이 겪는 이 고통을 없애주고 편안히 정토로 이끌어 줄 수 있으리라 믿었기 때문이다. 이런 쇼쿠시가 마지막 힘을 모아 자신의 곁으로 와줄 것을 그 사람에게 간청하고 있는 것이다.

쇼쿠시의 마음을 전해 받은 호넨은 결국 그녀에게 가지 않기로 마음을 굳혔다. 인연이 여기서 생에 그치는 것이 아님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기도 했지만 모든 중생들의 왕생을 위해 두문불출하며 일심으로 드리고 있는 기도를 중간에 포기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호넨은 대신 그녀에게 자신이 그곳으로 갈 수 없는 안타까움과 임종의 순간까지 염불을 해야 하는 이유 및 방법, 또 그녀가 정토에 반드시 갈 수 있다는 내용이 담긴 장문의 답장을 보내고 있는 것이다.

‘중죄를 지은 사람도 지극한 염불 한 번에 왕생할 수 있다했거늘 당신은 무엇 때문에 그리 걱정합니까. 지난 오랜 세월 극락왕생을 믿고 출가까지 행하며 오로지 염불수행을 하지 않았더이까. 도대체 어이하여 자신의 왕생을 의심하나이까. 열이면 열, 백이면 다 왕생한다고 (중국의) 선도(善導) 스님도 말씀하시지 않으셨습니까. 오직 아미타부처님의 본원에 매달립시오. 절대로 마음 약하게 먹으면 아니 되십니다. 갈 수 없는 이 몸. 아아, 그저 안타깝고 황송할 뿐이옵니다.’

이 편지를 받은 쇼쿠시는 아마도 호넨의 간절한 바람처럼 더없이 편한 마음으로 세상과 마지막 이별을 고했으리라. 자신을 짝사랑했던 공주를 떠나보낸 호넨도 정토종의 개조로서 제자들이 사형 당하고 본인은 유배형에 처해지는 등 혹독한 박해 속에서도 전법에 매진하다 1212년 1월 25일 80세에 극락으로 향했다. 그녀가 떠난 지 꼭 10년 뒤였다.

이재형 기자 mitra@beop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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